[언론고시반 근황올림픽] 이O수 이야기

뭐가 될진 모르겠지만 뭐라도 해야 하는 우리 시대, 우리의 이야기

by 뱅뱅뱅

8월 20일 금요일 저녁 6시반. 광화문역 1번 출구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저멀리서 베이지색의 반팔 니트를 입은 희끄무레한 남자가 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삼십대 남자가 무릎 위로 올라오는 반바지를 입었을 때 이렇게 청순할 수도 있구나, 라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그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적당히 큰 키에 적당히 마른 체구가 마치 비율이 좋아보이는 듯한 착시를 일으켰다. 3,4년 전 언론고시반에서 함께 공부할 때에도 사뿐사뿐 봄길을 걷는 처녀 느낌의 선배였다. 오랜만에 이O수(31)를 만나 근황을 들어보았다.


1. 병약미 폴폴 나지만 술 빚는 남자



이모씨는 자주 아팠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구내염을 달고 나왔다. 1년에 3번 정도 구내염에 걸린다고 하는데 이정도면 면역체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지 머리가 갸우뚱해졌다. 추위도 많이 타는지 빈티지풍의 에코백에는 가디건도 들어있어 0.5초 보호본능이 일었다. 과거 함께 공부하던 당시에도 그는 심심하면 코피 흘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번은 고시반 입실 동기끼리 김치찌개집에서 대중문화계의 이슈였던 '아이유 제제 사건'에 대해 모두가 핏대 올리던 날이 있었다. 그는 나긋나긋한 어투로 얘기했지만 논쟁에 상당히 심취한 나머지 한쪽 코에서 눈물같은 피를 떨어뜨렸었다.


본인의 병약함을 인지하고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모씨는 약간의 결벽증을 안고 있다. 스마트폰을 알코올티슈로 닦는 것쯤은 코로나 시대에 권장할만한 습관이다. 그러나 그는 이를 넘어 스마트폰에 비누를 문질러 거품목욕을 시킨 후 티슈로 닦는 사람이다. 불청결한 생활습관으로 유명한 웹툰만화가 '기안84'와 분명 반대 지점에 있는 사람이지만, 기이하기로는 매한가지다.


나는 그의 병약함을 '소년미'로 포장해주었지만, 이모씨는 자신의 건재함을 증명하려는 듯 매번 꽤나 놀라운 주량을 보여주곤 한다. 이 날도 함께 간 이자카야에서 아사히 생맥주로 시작해 '화요25'와 고구마 사케를 주문했고, 생맥주 맛집이라며 광화문의 한 치킨집에 데려가더니 맥주에 소주를 말아주었다. 여러 알코올의 화학작용 덕분에 구내염이 치료되었다며 그는 하얗게 웃었다. 이러한 그를 무식하게 술 마시는 술고래로 보기보다는, 주종에 따른 각각의 매력을 즐기는 애주가로 보는 편이 낫다. 언론고시 준비할 때 사학과 친구 하나와 무악재까지 가서 전통주와 막걸리 빚는 공방을 다녔기 때문이다. 나름 고시를 준비한다는 사람이 이정도로 디오니소스적인 수험생활을 했는지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2. 공허함을 느끼지만 업무적으로 향상시키고 싶은 것이 많은 직장인


'기자 준비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던 이모씨는 2018년 즈음 한 전문지에 추가합격하는 기염을 토하며 몇 개월 기자로 일한 적이 있다. (이모씨는 전문지 합격을 기염이라기엔 너무 민망하다며 반감을 표했다.) 일하면서 그는 자신이 명예보다는 워라벨과 돈이 더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는 퇴사 후 사기업 입사를 준비하게 된다. 그로부터 1년 반의 시간이 지나 그는 어느 대기업 계열사 홍보팀 신입사원으로 입사한다.


취업한지 어느 덧 1년 8개월. 그에게 직장에 대한 느낌을 물어보았다. 현 직장은 워라밸이 좋고 B2B 업계 특성상 소비재에 비해 이슈가 많지 않기 때문에 몸은 편하다고 말했다. 다만 외부 박람회가 개최되면 회사 홍보 부스 설치를 위해 현장에 나가게 되는데 "이쪽 가벽 조금 더 올려주세요"라고 말할 때마다 머릿 속이 복잡해진다고 한다. 자신이 하는 일이 사회적으로나 회사에 가치 있는 일인지 잘 모르겠다고 한다. 같은 맥락으로 그를 슬프게 하는 일의 예시로는 기자들 밥 사주기, CI 관리하기, 홍보영상 만들기, 홍보 브로슈어 만들기 등등이 있다.


하지만 그가 현실 모르는 이상주의자나 몽상가인 것은 아니다. 기자가 아닌 홍보담당자로서 사는 지금의 삶이 여러가지 면을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마음에 든다고 했다. 앞으로는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도록 업무 능력을 향상시키고 싶다고도 말했다. 해당 업계의 구조나 프로세스에 대해 더 공부해야하며, 기자들 앞에서 소위 입을 잘 털기 위해서는 회사의 어떤 면을 부각시키고 드러내지 않을지 현명하게 판단하는 센스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에 평소대로라면 소설을 읽었을 그이지만, 가장 최근 읽은 책으로 팀장님이 추천한 <돈의 흐름이 보이는 회계 이야기>를 꼽았다. 정확히 말하면 9개월째 방치, 아니 붙잡고 있는 책이다.


이모씨는 공허함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시사주간지 <시사인>을 구독해왔던 사람이다. 기자가 되기를 포기한 이후, 앞으로 진보를 추구함에 있어서 자신이 어떤 사회적인 역할은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데에서 허무함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추구하는 가치와 직업이 일치하길 원했고 이왕이면 글 쓰는 직업이면 좋겠다는 생각에 기자를 준비했었다. 하지만 자신의 역량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한동안 꿈꿨던 목표를 떠나보낸 후 그 빈자리가 다른 것으로 채워지지 않을 때 우리는 공허함을 느낀다.


3. 왼손에는 아메리카노, 오른손에는 책을 든 국문학도였지만 현재는 활자를 혐오하며 쇼핑에 중독된 32살


인생은 생각한대로 흘러가지 않아 재밌다는 생각을 타인을 보면서도 종종 한다. 함께 언론고시반에서 공부하던 O모씨는 한 때 마르크스 서적을 읽는 스터디에서 공부할만큼 어딘가가 뜨거운 사람이었지만 그는 현재 '머니투데이' 기자다.


이러한 '변절'과 유사하게 이모씨도 과거 모습과는 사뭇 다른 요즘을 살고 있다. 그는 최근 옷 쇼핑에 중독되었다. 본인 말에 따르면, 원래 쇼핑을 좋아했지만 자제하다가 취업 후 구매액이 급증했다고 한다. 그러나 과거 고시생이었을 당시를 회상하면, 그는 학교 후문 카페인 '카페 1.5'에서 가성비 높으면서 원두 상태가 좋기로 유명한 '따아'를 테이크아웃해 마시는 것을 낙으로 알았다. 그에게 사치는 영화와 책 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이제 그는 '책은 지겹고 너무 잔잔하다'고 말한다. 웹툰를 한 회라도 먼저 보기 위해 쿠키를 충전한다. 왜 이렇게 변했냐고 묻자, 그는 탈자본주의와 대안적 가치를 추구하던 자신의 과거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과거에서 자유로워지기로 하며 내면의 욕망을 긍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모든 변화는 '밸런스를 찾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모습에 변절이라고 놀린 것이 머쓱해질만큼 건강한 변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모씨는 최근 자가용으로 수입차도 한 대 뽑았다. '볼보'를 샀다고 해서 왜 일반적으로 젊은 남성들이 선호하는 BMW나 벤츠, 아우디가 아닌지 물었다. 사회민주주의의 정체성을 가진 북유럽 국가 스웨덴의 브랜드이기 때문이라 답했고 나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기본과 안전에 충실하며 차의 본질에 충실한 헤리티지가 있다며 나를 설득하려 했지만 그가 확실히 북유럽뽕에 취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느 덧 그의 취향과 가치관을 만든 배경이 궁금해졌다.


이모씨는 어머니를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그의 많은 것을 닮았다. 어머니는 대안적인 가치를 추구하셨으며 독서를 굉장히 좋아하시는 분이라고 한다. 자연주의적인 성향 때문에 아파트에서 살지 않으셨고 은퇴 이후 살게 될 집도 강원도에 한옥 형태로 지어놓으셨다. 그가 국문학과를 선택한 것도, 언론인이 되겠다는 꿈을 품었던 것도 어머니의 파장이란다. 이러한 부모님의 취향 때문에 그는 오래 전부터 부암동에서 대가족과 살고 있다. 과거 작문 수업시간 때, 부암동의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에세이를 썼던 그는 자신이 사는 동네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부암동은 아파트가 없고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해 멋스러우며 생각보다 시내버스가 잘 다녀 교통이 불편하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날은 부암동이 월세가 비싸고 아파트가 없어 또래 친구들을 사귈 수 없다고 했다. 개발제한구역으로 4층 이상의 건물을 지을 수 없어 부동산 가격이 오를 수 없다는 말까지 발랄하게 덧붙였다.


이모씨는 하고 싶은 것이 없지만 올 가을 테니스는 배울 계획이라고 했다. 골프는 너무 부르주아적이라 자신도 모르게 반감이 생긴다고 한다. 골프가 비용과 접근성 때문에 고급스포츠로 여겨지긴 하지만, 테니스가 귀족 스포츠로 대접받았음을 그도 모르진 않을 것이다. 또 영화잡지 <씨네21>을 구독할 예정이라고 한다. 과거에도 그는 언론고시반 책상에 나비처럼 삼사십분 머물다 독립영화를 보러 팅커벨처럼 사라지곤 했었다. 그는 최근 '아리랑시네센터'에서 독립영화 <액션히어로>를 봤다. 루저들의 유쾌한 반란을 소재로 한 영화라고 한다. 그는 이제 워라밸 좋은 직장을 다니는 어엿한 사회인이자, 쇼핑과 웹툰에 절여진 소비요정이 되었으며, 결혼을 꼭 해야하는가 자문하는 30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가슴 한 켠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반항과 순수를 꿈꾸는 학생의 모습을 갖고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생물학 석박사생에게서 '자기만의 속도'를 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