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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작가 Dec 31. 2022

광석이 형, 서른 즈음은 예사였어

징그럽다, 숫자로는 참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을 유달리 민감하게 인식하는 편이다.


형님 무탈하십니까


명확한 시점은 모르겠는데, 얼추 학창 시절부터는 그랬던 것 같다. 초등학교 6년은 무척이나 길었고, 중학교에 들어서자 학업 단계가 3년 단위로 끊어지며 굉장히 빨리 나이가 들어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얼레벌레 중학교 3년을 보내니 고등학교가 다가왔고, 고교 시절도 1~2년만 지나니 어느새 이 땅에서는 굉장히 특별하게 회자되는 고삼이더라. 그렇게 대학생이 되었다.


대학교 1학년도 정신없이 흘러간 기억이다. 타지에서 다녔던 까닭에 언어나 문화에 적응하기 바빴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낯을 가렸던 성격 탓에 조용하게 지냈던 기억이다. 남들 다 하는 것 같았던(실제로는 아주 일부만 했지만) 흔한 연예도 하지 못했고 별 다른 추억도 없었다.


별 시리 열정도 없는 대학교 1학년 생활을 마치자마자 도피하듯 입대했다. 동반입대의 파트너를 찾던 대학 동기 놈한테 딱 걸려서 최전방에서 군생활하는 불운을 겪고 말았다(지금은 모르겠지만, 당시엔 동반입대를 하는 걸 메리트로 봤던 까닭에, 디메리트를 지리적 불리함으로 부여했다).


그렇게 2년을 고등학교 지리 교과서에서도 잘 보지 못했던 강원도 철원이라는 곳에서 보냈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이상한 곳이었다. 의정부 306 보충대에서 철원으로 진입하며 등장한 해골상의 위엄에 심장이 쫄깃했던 기억이다(다시는 가고 싶지 않다). 


당연하게도 이렇게 멋지지는 않았다


군생활은 제법 길었다. 왜냐고. 군생활에 전혀 맞지 않은 성향이었으니까. 대부분 그러겠지만 그냥 남들 하니깐 했다. 축구와 탁구와 좋은 선후임이 없었더라면 하고 싶지 않았을 군생활이다. 잡기를 조금 할 줄 알았던 덕에 그걸로 포상휴가도 받고 난관이었던 군생활을 슬기롭게 넘길 수 있었다.


21세에 입대해 23세에 나와 처음 연애란 걸 제대로 해보았다. 군대에서 하도 고참들이 무용담을 풀어대는 까닭에 나만 병신이 된 거 같은 느낌이 들어 올해는 꼭 여자를 꼬셔봐야지 하는 일념으로 고등학생 졸업반 여자애를 만났다. 지금은 기혼이라 구체적으로 썰을 풀지는 못하지만, 참 어리숙하고도 어리석었던 연애였다.


24세에 대학교에 복학해 머저리 같은 2학년을 보냈다. 거의 3년 만에 캠퍼스에 돌아가보니 그렇게 낯설 수가 없었다. 복학생을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은 차가웠다. 지금 보면 24세이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나이인데, 그때는 어찌나 아저씨 같은 느낌을 받았던지. 24세 복학생은 뭐든지 할 수 있는 나이였지만, 그때마저도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다. 유일하게 잘했던 건 그 와중에도 연애란 걸 했다는 거다.


라때는 프리스타일이지 역시


25세. 싸이월드 세상이 망해갈 것 같은 알림을 남겼던 기억이다. 얼추 '아 벌써 이십 대가 꺾여가네... 앞으로 어떡하냐. 지잡대에 취업은 될라나' 같은 막연한 걱정. 제대 후 사귀었던 여자친구와는 이별했고(차였다), 다음 여친이 다행스럽게도 좋아해 줘 자연스레 아픔이 달래졌다. 물론 그 사이의 간격은 고통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별은 인생의 어떤 시점에서든 제일 힘든 과정 중 하나인 것 같다.


이십 대 중반이 꺾이는 시점에는 고생을 참 많이도 했다. 알바도 닥치는 대로 했고, 또 한 번의 이별을 겪었으며, 이 아픔을 도피하려 필리핀에 보름 넘게 봉사활동을 가기도 했다. 뭐를 열심히 하기는 했는데 채워지지 않은 결핍 때문에 어딘지 모르게 공허했다. 대학 동기를 만나도 별 재미가 없고, 그냥 친한 친구 몇몇과 소주나 마시면서 시간을 때웠다. 


이십 대 후반은 어떻게 간지 잘 모르겠다. 취업 생각밖에 없었다. 돌이켜 보면 참 협소한 생각이었다. 지금처럼 유튜브라도 발달했다면, 자청이니 신사임당이니 보면서 일찍 머가리를 깼을 텐데, 그때는 취업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알았다. 그리고 좆소를 가더라도 실력만 키운다면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마약 삼아 하루하루를 보냈다. 스물여섯 살, 대학교 4학년 때 학점을 사이버로 돌리고 인천의 한 좆소 언론사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직원은 사장까지 단 네 명. 첫 월급은 80만 원. 현타가 왔지만 글쟁이가 되고 싶었기에 감내했다.


당시 편집장이었던 이 분을 알아보지 못한 덕에 입사의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오른쪽 분도 왼쪽 분따라 이직해 왔다.


스물일곱, 지금도 유명한 해외 남성 매거진 한국판 인턴으로 입사했다. 인턴 나부랭이인데 무슨 서류 전형에 필기시험에 1차 면접도 모자라 임원 면접까지 있었다. 어찌어찌 재수가 좋았는지 다 뚫고 들어갔다. 임원 면접에는 지금은 작고한 고 신해철 님이 면접관으로 있었는데, 그분한테 별로 관심이 없던 까닭에 나만 쫄지 않고 면접을 제대로 봤다. 그것도 운이었는지 그 결과 구십몇 대 일의 바늘구멍을 통과했다. 


인턴 생활은 두 번째 직장이었지만 가장 흥미로웠다. 신분이 인턴이라는 핑계로 오만 발칙한 기획과 별짓을 다해볼 수 있었다(지금의 신입들에게는 아쉬운 대목이다). 목동 야구장에서 치어리더와 함께  신나게 치어리딩을 했고, 홍대 놀이터에서 비둘기와 함께 도시락을 까먹었다. 그 발칙함(이라 쓰고 돌아이 짓. 당시 체력으로 유튜브를 했다면 성공했을 듯)을 고참들은 다행히도 다 받아줬다. 운 좋게 연애도 했다. 그리고 그 연애로 반년도 채 안 되어 회사를 나가야 했다(회사에 걸리고 말았다).


이상하게 태엽을 감아보면 힘들 때가 제일 재밌더라. "아프니까 청춘이야" 따위의 개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고 진짜다. 잡지사 인턴 시절 너무나도 재밌게 일했다. 월급은 세금 떼면 사십몇 만 원이 통장에 꽂혔고, 지방에서 상경한 나로서는 주말에 피시방 알바를 하다가 졸아서 잘렸지만 유능한 직장 동기와 여자친구가 있었고 무엇보다 자유가 있었다.


잡지사 퇴사 후 백수로 지내다가 정부에서 진행하는 행정 인턴 같은 걸 하면서 토익을 공부했다. 한 달 두 달 세 달... 백수 생활이 길어지자 자격지심이 생기고 말았고, 전 직장 동료였던 여친은 내로라하는 대기업으로 이직했다. 그때는 어찌나 견디기 힘들었는지, 여친의 성공을 감싸주지 못하고 또 한 번의 이별을 했다.


이별의 아픔을 지우려면 재취업을 해야 했다. 이력서를 미친 듯이 냈다. 하고 싶은 것과 전혀 관련이 없는 한국 야쿠르트, 현대카드, 새마을 기관 같은데도 넣었다. 몇 군데는 면접까지 봤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면접 후에 타는 지하철 좌석은 유난히도 차가웠다. 몸서리치게 외로웠고, 서울이라 편히 만날 친구도 별로 없었다. 지금 같았으면 어플로 많이 사귀었을 텐데 말이다.  


이력서를 미친 듯이 쓰면서 이별의 아픔을 달랬다


그래도 백수 생활은 길지 않았다. 6개월 정도만에 백수를 청산했다. 모 언론사 산하의 신문사 편집기자로 입사했다. 사실 취재를 뛰고 싶었지만, 당시 편집부장이 나를 편집부로 빼갔다(고 알고 있다). 취재를 하고 싶다고 자소서에 써놨는데, 원치 않은 일을 하게 되니 도살장에 끌려간 돼지가 된 기분이었다. 선배는 기회가 생기면 너를 취재부로 빼주겠다고 안심시켰지만, 2년 반이 흘러도 그런 날은 오지 않았다.  


그래도 글, 특히 단어를 다루는 업무라 그런지 재미는 있었다. 선배 기자들의 제목을 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었다. 그게 곧 편집기자의 권한이었다. 그만큼 책임도 많이 따랐다. 어찌어찌 회식에 끌려 가 술 몇 잔을 먹더라도 정신 똑바로 챙기고 신문 지면을 붙잡아야 했다. 오타는 곧 사형선고를 뜻했기에, 알코올에 젖어든 눈동자를 부릅뜨고 모니터를 확인 또 확인했다. 그래도 좋은 사수랑 함께했고 많은 걸 배웠다(지금도 연락하고 있다). 다만 그 선배가 연예부서로 먼저 빠지는 바람에 큰 배신감을 느꼈고, 어느 하루는 술에 만취해 "왜 당신만 가느냐. 어찌 그럴 수 있느냐"라며 꼬장도 부렸다. 지금은 그렇게 잘해줬던 선배도 없었기에 과거를 반성하며 받았던 것 이상을 베풀려고 노력 중이다. 


그렇게 2년 반이 흘렀고 서른이 되어 군 시절부터 가장 가고 싶었던 매체에서 펜 기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리고 재작년부터는 그 매체의 편집장으로 현재까지 재직 중이다. 후배들로부터는 고인 물이라는 비아냥도 듣지만, 그러는 자네들도 어느새 5~6년 차를 넘어가고 있어 같이 고인 내를 진동시키고 있다.


서른에 들어온 매체에서 7년가량 펜 기자(혹은 에디터)로 활동했고, 취재팀장을 거쳐 현재 편집장을 맡고 있다. 이 회사에서 결혼을 했고, 이 회사에서 아이도 낳았다(그것도 둘째나). 이 회사 때문에 생활고도 겪었지만, 이 회사 때문에 먹고도 살고 있다. 이 회사가 물질적 풍요를 안겨주진 못했지만, 그걸 바라볼 수 있는 글쓰기 능력이라는 것을 길러줬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서른 즈음은 너무나 청춘이었어 형


스물여섯 살, 이십 대가 꺾일 무렵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반 오십을 살았구나 하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랬던 청춘이 덧없게 지나고 지나 두 아이의 아빠와 가장이 되었고, 이제는 김광석이 고뇌에 빠졌던 서른 즈음을 훨씬 넘어 마흔 즈음을 두 시간 여 앞두고 있다. 아직도 철없는 인생인데 마흔이라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현시대의 마흔은 우리 부모 세대의 서른보다도 철이 없는 것 같다. 아무래도 오냐오냐 보호받으며 물질적 풍요와 안위 속에서 자라났던 세대이니 그런 것 같다. 마흔에는 조금은 더 철이 들어보길 바라본다. 아! 대통령님이 한 살 깎아주기로 하셨으니, 1년 정도는 더 철이 없어도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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