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간 마음을 모으는 행위

by Ev




지금 내가 보내는 이 주간은 누군가를 생각하는 주였다. 서서히 멀어지기로 마음먹었던 이에게서 보고 싶다는 문자를 받은 후 꼬질꼬질한 마음들이 수면 위로 다시 떠올랐다. 그 전날부터 우연히 활자들로 떠오르던 마음이었음에도 애써 무시하며 간신히 눌러놨건만 이를 비웃듯 아주 두둥실 떠올랐다. 기분이 침강하는 며칠을 살아내고 점심의 해가 느껴질 때쯤 눈을 떠 창문을 열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 후덥지근하고 기분 나쁜 습기가 들어왔었는데 창문을 연 손으로 찬 바람이 약하게 불어왔다. 과거의 시간과 현재 내가 날려버리고 있는 시간이 서로를 마주하는 건 참으로 눅눅한 일이었다.


나는 누군가가 나에게 준 글씨들을 다 모으는 버릇이 있다. 사실 버리기는 뭐해서 책상 서랍 이곳저곳에 넣어둔 것들이 이사를 하게 되면서 한 박스에 정리된 형태로 남아버렸다. 성인이 되고 나선 편지를 받을 일이 드물었지만 어쩌다 받게 된 편지들이 있어 그것까지 함께 보관했다.


요즘은 속이 덥다. 체한 것도 아니고 진짜 더운 것도 아닌데 속이 너무 덥고 답답하다. 점심으로 샌드위치와 커피만을 사 먹은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빵은 밥으로 쳐주지도 않는 내가, 꼬박꼬박 샌드위치 가게에 생활비를 바치고 있다. 오늘 아침도 진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하루를 시작했건만 답답한 속은 뚫릴 기미가 안 보였다. 괜히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가 금세 일어나 자취방의 저 깊숙이 숨겨져 있는 편지 박스를 가져왔다. 꽤나 어려운 곳에 숨겨놨다고 생각했는데 까먹지도 않았는지 순식간이었다.


그 박스를 꺼낸 기억이 4년 정도 전이니까 지금의 기억으로는 남아있는 게 없었다. 어린 나에게 친구란 환상을 안겨주었지만, 결국 나에게 큰 상처를 주고 멀어진 사람이 준, 평생 친구를 약속하는 문구가 적힌 천 원짜리 한 장이 생일 편지와 함께 보관되어 있었다. 지금이 2025년이니까 이 기념화폐는 벌써 10주년을 맞이했다. 누군가 나의 수능 공부를 응원해 주며 넌 할 수 있다고 말해준 이름 없는 여러 쪽지도 있었다. 지금까지 잘 지내는 친구가 준 휴지 조각도 있었다. 대충 나를 많이 좋아한다며 성인 돼서도 자기랑 놀아달라는 지금은 아주 무던해진 친구의 애정 섞인 말이 적혀있었다. 나풀나풀 어디 걸려 찢어지기 쉬운 그 한 장의 휴지 조각이 상처 하나 없이 잘 보관되어 있었다. 이런 친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해줬구나, 기억 속에서 아주 사라져 버린 이들 몇몇도 둥둥 밀려왔다. 친했지만 시간 속에서 가볍게 흘려낸 이름들도 보였다.


차마 집어넣을 수가 없어서 책상 가까이에 두었던, 내가 정말 애정하는 이들이 준 편지를 바라봤다. 보고 싶다 문자 보냈던 그 사람과, 같은 시기를 함께한 다른 이가 보낸 편지였다. 2년 정도 되는 시간 동안 고민했다. 이 사람들과 보낸 시간이 나에게는 너무 찬란한 순간이었는데, 가족이 아닌 남에게 이 정도의 응원과 사랑을 느껴본 게 처음이었는데 내가 상처받아 괴로워했던 그 시간들로 이 사람들을 날려버려도 되나. 친구에게 전화해 한참을 고민했었다. 고작 그 문자 한 통에 행복하기로 작정하고 행동했던 하루가 아사리판 났었다. 서서히 멀어지는 그 무엇도 아닌 관계에 만족스러워하고 있던 찰나였다. 그렇지만 좋은 기억들로 언젠가는 다시 연결될 수 있는, 책임 따위는 아무도 지지 않는 그런 관계.


그때의 그들과 나를 떠올려보면 매우 비현실적인 사이였다. 사랑은 아니고 우정도 아니다. 그렇다고 가족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었다. 그 사잇값의 어떤 존재들이었다. 정말 소중했고, 존재만으로 안정감이 들었다. 나에게 이런 사람들이 생기다니 드디어 내가 그리 꿈꾸던 안락한 삶의 조건에 한발 다가간 느낌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도치 않은 배신과 농락 이후, 그로 인한 수치심을 일 년 동안 견뎌내야 했었다. 그럼에도 나는 친밀한 거리를 유지했었다. 괜찮고 싶었으니까 이 관계를 놓고 싶지 않았으니까. 힘들어했던 것도 나, 용서한 것도 나, 그들과 시간을 보낼 때마다 비참해지는 것도 나, 그때 그 기억을 안고 사는 것도 나. 오래 본 친구들이 나를 호구라고 불렀다. 미련한 거라고. 생각이 복잡했다. 나도 내가 호구임을 알고 있었다. 그때 행복했던 순간의 농도가 너무 진해서 상처의 농도가 감정을 잡아먹지 못했음을 난 알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과거에서 온 편지들과 지금 내 손에 들린 그들의 편지를 번갈아 보다가 내 나름의 결정을 했다. 차곡차곡 정리된 편지 사이에 아무렇게나 그 편지들을 처박아놨다. 현재가 아닌 기억 한편으로 넘길 거라는 일종의 다짐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받아온 편지들이 모인 그 박스에 고작 몇 년 전 날짜 스탬프가 찍힌 편지가 추가됐다.

그리고 그 박스는 내가 당장이라도 찾아낼 수 있는 어딘가에 꽁꽁 숨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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