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쓰이지 않은 비하인드 스토리
아무개가 전하는 아무개의 이야기
재작년 봄. 나는 전북 완주군의 출판사 <완두콩> 에
취직했다. 기자 경력도 없이 관련 학과도 졸업하지 않은 내가 이곳에 지원하게 된 계기는 ‘누구나 주인공이 되는’ 신문을 성의껏 만든다는 점에 끌려서였다.
유명하고 이름난 사람들이 아닌 그냥 지나칠법한 아무개의 소식을 조명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면접 전 읽고 간 신문에 담기는 소식은 이러했다.
수컷인 줄 알고 키웠던 개가 어느 날 새끼를 출산해서 깜짝 놀랐다는 주민의 이야기. 오는 가을 혼인 한다는 예비 신혼부부가 서로를 만나게 된 이야기. 향년 100세로 세상을 떠났다는 어느 마을 할머니의 이야기.
단출한 글쓰기 실력을 가진 내가 용기 내 이 출판사에 일하고 싶다고 문을 두드린 것은 이 모든 이야기를 읽은 덕분이었다.
거리에 꽃도, 강아지도, 마을도 모두 이 소식지에 주인공이 된다면 그 소식을 담아내는 사람 또한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이곳은 면접도 참 특이했다. 채용 공고에 적힌 이메일로 이력서를 제출했는데 몇 날 며칠 확인이 없는 것이다. 기다리다 대표 번호로 문의했는데, “바빠서(?) 지원서를 하나도 확인 못했다”며 “곧 연락을 주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게 며칠이 또 흘렀으나 여전히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 기다리는 데 소질이 없는 내가 다시 전화를 했고 똑같은 답변을 받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을까. 주말에 면접을 볼 수 있냐는 전화를 받고 나는 한달음에 완주로 향했다.
‘떨어져도 어쩔 수 없지‘ 하며 마음을 다잡고 갔는데 무색하게도 이곳의 대표님은 ‘면접=채용‘ 이라며 앞으로 우리가 어떤 일을 어떻게 해갈 것인지 설명해 주었다. 더불어 완두콩에서 지난 시간 발행한 월간지와 책 몇 가지를 전해주었다. 그것들을 품에 안고서 얼떨떨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신입의 좌충우돌 적응기
첫 출근부터 나는 취재 현장에 투입됐다. 대표님과 선배님이 함께 동행한 자리였는데, 나는 질문을 던지는 대신 옆에서 인터뷰 내용을 타이핑하는 역할을 맡았다.한 마디라도 놓치면 큰일 날까 싶어 그간 연습한 타자 실력을 최대로 발휘했다.
그다음 취재로는 마을에 다녀왔다. 앞서 읽었던 것처럼주민들의 시시콜콜한 일상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기록해 오면 됐다.
그동안 펴낸 신문을 보면 사진 속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직접 맞닥뜨린 현장은 예상외로 굴곡이 심했다.
대뜸 어느 댁의 문을 두드려 ‘계세요 ‘라고 묻고 초대 없이 들어가서는 언제부터 이곳에 살게 된 것인지, 요즘의 일과는 어떻게 흐르는지 묻는 이방인이 달가울 게 없기 때문이다. 종종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고 싫은 소리를 듣기도 했다.
어쩌다 흔쾌히 인터뷰를 수락한 주민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웠다. 초기에는 양봉업을 한다는 할아버지를 만났었는데, 한창 채밀하는 중이라 일하는 곁에서 대화를 나누어야 했다. 어르신이 쏘일지도 모른다며 머리에 보호망을 씌워주셨는데, 수십 마리의 벌이 내 주변을 맴돌 땐 취재는 뒷전이고 도망치고 싶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초보 운전이던 내게 시골길은 쥐약이었다.유독 논이 넓던 마을에 방문했을 때는 골목을 돌며 하마터면 논두렁에 빠질뻔하기도 했다.
가뜩이나 좁은 길, 코너에 박힌 돌멩이를 마주 할 땐 차를 버리고 싶었다.
오가도 못하는 길 위에서 하염없이 논을 바라보며 나를 구해줄 사람을 기다렸던 때도 있었다. (다행히 근처에 있던 친척 오빠가 구출하러 와주었다)
하마터면 모를 뻔한 중요한 사실들
마을 취재를 다니다 보면 새삼 몰랐던 중요한 사실들을마주하게 된다.
가령, 아카시아 줄기로 머리를 땋으면 파마가 된다거나
지금은 옮겼지만, 옛날 사무실 바로 옆에는 ‘숟가락‘이라는 돌봄 육아나눔터가 있었다. (맞벌이 가정, 핵가족이 늘며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이념 아래 부모들이 모여 설립한 공동체다)
아카시아 꽃 피는 오월에는 아이들과 선생님은 ‘아카시아 미용실’을 열었다. 이때 들은 이야기로는 갓 따온 줄기로 머리를 돌돌 묶으면 꼭 고데기한 것처럼 웨이브가생긴단다.
반신반의로 나도 따라 했는데, 그게 정말이라 신기하기도 했다.
또 거위가 강아지만큼 집을 잘 지킨다는 사실도 알았다. 주인은 알아보고 처음 보는 사람은 쫓아와 문다.
실은 이건 몰랐다면 좋을 뻔 했다. 한 번은 집 지키는 거위에게 쫓긴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거위는 내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벼농사는 손맛’이라며 이앙기 대신 손모내기에 도전하는 청년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전통방식을 보존해야 한다며 여전히 10m 토굴 아래 생강을 보관하는 어른들이 있다는 걸 알았다.
받은 것 없이 더해주는 마음들
햇수로 3년 차 기자가 된 올해. 제법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대화하는 스킬이 늘고 애교(?)도 많이 늘었다.
살가운 미소를 띤 채 경로회관 문을 열고 자연스레 소파에 앉아 ‘놀러왔다’ 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삼삼오오 몇 마디를 나누고 나면 어느새 나는 이분들의 손녀가 된다.
어쩌다 모르는 어르신이 회관을 찾아 내가 누구인지 물으면 대화를 나누던 어르신들은 “우리 손녀“ 라며 자연스레 농담을 건네신다.
끼니때면 한솥밥 식구가 되기도 한다. 어쩌다 식사 약속이 있어 거절하면, 그래도 한 술만 뜨고 가라며 손에 숟가락을 꼭 쥐어주신다.
봄에 가면 고사리를 쥐어주셨고
가을이면 잘 익은 홍시와 알밤을
그래도 부족하다며 밭으로 데려가 부추를 캐어 주셨다.
그리고 호두도 가져가라며 챙겨주는 어르신들.
덕분에 두 주머니 가득가득 무겁게 채워진다.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훨씬 많은 새내기 기자이지만 하나는 어렴풋이 알 거 같다.
평범하고 시시한 얘길 전하겠다고 했으나 정작 이야기를 듣다 보면 치열하지 않은 삶이란 하나도 없었다. 환히 웃는 얼굴 뒤로 숨 가쁘게 살아왔던 세월이 빼곡히 숨겨져 있었다.
그럼에도 애써 자랑하거나 뽐내는 법 또한 없었다. 전쟁이며, 해방이며 … 지금이라면 상상 못 할 일을 겪고도 ”당연했다 “는 덤덤한 모습을 보며 나는 오랫동안 이일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앞으로도 그들의 숨겨진 삶을 열심히 조명해 보겠다고 마음 깊이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