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 단절"이 "경력 확장"으로 만드는 일
2월 14일 토요일
나는 회사 생활을 중단하고 지금은 “경단녀”가 되어 외딴 나라에 와있다.
대학졸업 이후 나는 30년 정도 일했다. 다양한 외국계 기업에서 근무했고 50대가 되어선 미국 실리콘밸리에 있는 구글 본사로 가서 글로벌 커뮤니케이션팀에서 비원어민으로 최초 디렉터로 일했다. 2023년 구글 레이오프 이후엔 1년 반 동안은 슈퍼마켓에서 일하고 바리스타로 일하면서 바쁘게 지내오기도 했다. 최근 5년 동안에 책 다섯 권을 냈고. 두 번의 유퀴즈 출연을 포함해 커리어 관련해서 유명 유튜브 채널에 30여회 출연을 하면서 정말 촘촘하게 지내왔다.
그래서였는지 모든 것을 내려놓고 2년반 동안 해외 자원봉사를 간다고 하니 많은 주변 사람들이 놀랐다. “화려한(해보이는) 경력을 굳이 지금 끊을 이유가 있냐?” 라는, “좀 아깝다”라는 반응.
내가 경력 단절을 선택하고 온 곳은 몬테네그로. 서울 송파구보다 적은 인구가 있는 작은 나라.
이 나라의 풀타임 자원봉사로 온 나는 연봉도 없고 직함도 없고 조직도 없는 자리로 스스로 들어왔다. 한국 사회에서 ‘경단녀’란 단어는 공백과 후퇴의 의미를 품고 있다. 커리어 브레이크 (Career Break) 라는 말로 ‘경단녀’란 표현을 순화한다 해도, 이는 성장에서 멈춘 사람, 흐름에서 이탈한 사람, 경쟁력에서 멀어진 사람, 이라는 뉘앙스가 따라붙는다.
이런 사회적 시선을 모두 받으면서 또 나 스스로를 불안함 속으로 몰아넣으며 “경단녀”를 선택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난 지금, 나는 “경단녀” 란 단어가 얼마나 협소한 프레임이었는지 절실히 깨닫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뭣하러 경력을 아깝게 단절하고 2년 반이란 긴 시간을 쓸데 없이 보내는가’ 하게 보이겠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을. 즉, 그건 “경력 단절”이 아니라 “경력 확장”임을 매일매일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경력 확장 기회인까?
첫째, 더 날카로운 마케터가 되어가고 있다.
언어조차 새로 배워야하는 이곳에서 나는 사람들의 니드를 입체적으로 바라보며 어떻게 딜리버리를 해야할지 하는 글로벌 시각을 장착하고 있다. 한국과 미국, 디지털 인프라가 충분한 시장, 데이터가 풍부한 환경 속에서 축적한 경험은 분명 자산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자원이 충분하지 않은 환경과 다른 역사와 문화 속에서 형성된 가치관을 마주하면서 나는 서구적인 ‘당연함’이 얼마나 지역적인 개념이었는지를 배운다. 글로벌 전략을 이야기할 때 빠뜨리기 쉬운 맥락의 힘을 지금 몸으로 다시 익히고 있다. 시장 이해도의 확장이다.
둘째, 강력한 스토리텔링을 능력을 가진 커뮤니케이터가 되어가고 있다.
60억명이 넘게 배우고 있는 영어가 아니라 그의 0.01퍼센트도 안되는 60만명의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서 동화되기 위해 몬테네그로어를 배우고 있다. 더듬거리는 언어력를 보충하기 위해 상대방 눈빛을 읽으려 애쓰고, 표현을 바꾸고, 몸짓을 더한다. 커뮤니케이션은 유창함 이전에 호기심과 배움의 과정, 그리고 메시지를 끝까지 전하려는 태도이다. 새로운 문화에서 생활하는 내내 만들어가는 경험으로 나의 스토리는 그어느때보다 풍성해지고 강력해지고 있다. 이 과정은 내 커뮤니케이션 근육을 더 단단하게 만든다.
셋째, 현실감각이 가득한 전략적 실행가가 되가고 있다.
봉사단원으로 와 있는 이 곳에서는 전략과 실행은 회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 해당 커뮤니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파악해서 딜리버리를 해내는 것은 시장의 니드를 읽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제로썸 게임이 아니라 윈윈 게임을 만들어나가는 것을 연습한다. 아이디어 발견부터 전략설계와 실행, 평가의 과정은 사람 중심적이며, 프로세스 지향적이고 결과 지향적이다. 슬라이드 위에서 완성되는 기업에서 전략이 아니고 현장의 변수 속에서 전략이 살아 움직인다. 문화적 맥락과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따라 늘 계획은 수정되고 실행은 반복된다.
더 날카로운 마케터, 커뮤니케이터, 전략적 실행가의 능력을 장자하게 된 이 경력 단절 기간은 단연 경력 확장의 기간이라고 봐야할 것 같다. 우리는 커리어를 직선으로 생각한다. 멈추면 뒤처지고, 비면 약해진다고 믿는다. 그래서 ‘경력 단절’이라는 단어가 무겁게 느껴진다. 그러나 커리어는 위로만 쌓이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옆으로 넓어지고, 아래로 깊어져야 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 있다. 내 의지로 혹은 예기치못한 변화로 갑작스레 커리어 브레이크를 경험하는 시간도 “경력 단절”이 아니라 “경력 확장”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평소 하고 싶은 것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해외 자원봉사 기회가 있다면, 경력이 끊길까 두려워 망설이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해외 자원봉사를 권하는 건 아닙니다.)
경력은 직함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역량으로 유지된다. 환경이 바뀐다고 능력이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낯선 환경은 잠재력을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경력 단절’는 실체가 아니라 프레임일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그 프레임을 벗어나고 있다. 이것은 단절이 아니다. 이것은 스케일을 바꾸는 선택이고 확장이다.
해외 자원봉사를 하면서 추가적인 장점은 Gen Z들과 일을 같이 하는 기회를 갖는 것, 봉사단 대부분이 20대인 Gen Z 세대와 일을 하는 과정은 그자체로 새롭고 즐겁다. 그들이 쓰는 표현도 재미있고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해나가는 과정 속에 같이 있는 경험은 그 자체로 배움이다. 이들의 속도, 솔직함, 그리고 때로는 불안과 가능성까지. 권위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Gen Z가 현장에서 2년 이상을 실제로 함께 호흡해본 몇 안되는 시니어가 되어 있을 것이다.
길게 썼지만, 사실 오늘 나누고자 하는 말은 간단하다.
경력 단절, 커리어 브레이크가 걸렸다면 불안해하지만 말자, 또는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지 말자, 라는 것이다. “경력 단절”이란 시기가 왔을 때 평소에 못했던 다양한 경험을 입혀서 경력 “확장”의 기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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