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율리아나 Mar 29. 2022

객관화를 싫어하는 우울한 뇌

호르몬과의 싸움



나를 우울함으로 끌어들인 것은 내가 아니다

결과가 중요하다고 가르치면서
과정의 의미를 가르쳐주지 않음에 있고
결과에 따라 과정을 무색하게 만들어 온
환경과 사회에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빠져나오는 것은 오롯이 나의 몫이다.




우울한 사람들은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분석하기를 힘들어한다. 내가 그랬다. 벗어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처럼 막막했다.


인생에서 가장 우울했던 시절을 돌이켜 보면 바람이 불지 않는 망망대해의 배 위에서 방향키도 잡지 않은 채 ‘그저 있는’ 것과 같았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왜 가야 하는지 모르는 無의 상태로, 머릿속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감정에 침식되어 사리 분별을 할 수 없었다. 자아가 없는 빈 껍데기이다.


그런 내게 너무나 이성적인 사람이 곁에 있다. 감정적이기만 한 나를 위해 우울함을 벗어나는 길은 일단 밖에 나가는 것이고, 밖에 나가서 운동을 하면 기분을 좋게 만드는 각종 긍정적인 호르몬이 분비된다는 내용의 유튜브 동영상을 자주 보내주었다.


그러나 우울함이란 감정이 세로토닌과 엔도르핀과 같은 호르몬의 부족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고통스럽게 해온 고민과 생각들이 호르몬 앞에 무참하게 작아지는 것 같으니까. 나는 우울이라는 감정이 과학적으로 통증임이 인정된다는 사실을 외면했다. 마치 내가 우울함에 고통받아야 특별하기라도 하다는 것처럼.


정신적 침체를 벗어나는 것에 있어서 진짜 복병은 상태를 진단 내리는 것이 아닌 처방에 있었다. 우울함에 빠지면 움직이기로 결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판단력과 분별력이 떨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사실을 접하더라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뇌가 신호를 보내주지 않기에 운동을 하라는 처방이 있어도 실행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울한 사람을 억지로 밖으로 끌고 나가려는 행동은 극단적인 선택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에 절대 금물이다)


‘내가 무언가를 하면 모두 망치게 돼. 나도 내가 싫은데, 누가 나를 좋아해? 내가 왜 나아져야 하는 걸까? 나에게는 산소도 아까운데.’


우울함은 이렇게 자신을 ‘쓸모없게’ 만듦으로 인하여 사회로부터 격리한다. 그러고 보니 우울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고 사회에서 무언가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없으므로 오는 분노와 자괴감이 원인으로 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무엇을 해낼 필요가 없어도 존재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 때, 결과가 아닌 과정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을 때 진정으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결국은 ‘그저 하는 것’에 의미를 둘 수 있게 하는 ‘자존감’이 핵심이었다. 나를 짓누르던 것은 ‘해내지 못했을 때’ 찾아올 절망감과 자괴감이었다.


우울함은 타인은 고사하고 자신도 존중하지 못하기에 사소한 실수와 실패에 무너져 내리게 만든다.


(자아존중감 (자존감), 영어로는 self-esteem, 네이버 사전적 풀이로는 ‘자신에 대한 존엄성이 타인들의 외적인 인정이나 칭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 내부의 성숙한 사고와 가치에 의해 얻어지는 개인의 의식’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결과만이 중요하다면, 살아가야 할 의미가 없어진다. 삶의 결과는 예외 없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과정을 통해 발전하는 내 모습을 보며 행복해하는 반복의 결과로써 인생의 종국에 만족한 죽음을 맞이 하는 것이 내 삶의 의미였다.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고 살아가는 데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너’가 아니라 ‘나’이다. ‘나’를 유일하게 이해하고 사랑해주고 어떤 결과가 오더라도 노력했음에 기특해하고, 품어주고 응원해주고. 내가 좋아하는 행동들을 찾아서 쉴 수 있는 시간을 내어주어 소모된 체력이 충전될 때까지 기다려주면서 다음을 기약하는 유일한 내 편, 그런 ‘나’가 필요했다.


지하도

사실, 그때의 우울함이 조금 부끄럽다. 불가능하다고 느끼기에 대단해 보였던 우울을 벗어나는 일이, 사실은 호르몬만 조절하면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반쯤 열린 옷장에 보이는 귀신이 두려워 떨다가 손전등을 들고 용기를 내어 열어보았을 때 보이는 것은 낮에 걸어 두었던 롱 코트뿐인 느낌.


두려워했던 것들의 실체는 힘들더라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렇다면 미래에 날 기다리고 있을 일들도 그럴 것이다.


바보 같게도 우울이 나를 다시 찾아오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다. 어떻게 하루도 우울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을까. 호르몬은 내가 나와달라고 해서, 나오지 말라고 해서 얌전히 있는 순종적인 존재가 아니다. 이제 나는 방어할 방법을 안다. 내 뇌가 호르몬에 지배당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내가 다루면 된다.


인간으로서 뇌를 이용하며 사는 삶은 전략이 될 수밖에 없다. 부정적인 상황에 분비되는 호르몬을 알고 억제해주는 호르몬을 분비하는 방법을 알면 어느 정도 감정을 전략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감정의 문제를 뇌과학적 지식을 통해 탐구하고 납득하다 보니,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데에 도움이 되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예민 감성’ 인간이 말을 소화하는 방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