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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리아나 Mar 21. 2022

가스라이팅

무색, 무취, 무통의 불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설계 : 보이드 아키텍트건축사사무소의 장기욱건축가와 인터아키건축사사무소의 윤승현 건축가)



정말 유명한 영화는 줄거리도 보지 않고 아끼고 아끼다가 정말 볼 것이 없을 때 보는 편이라서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도 최근에서야 봤다. 이 영화를 보면서 첫 직장에서 당한 가스라이팅이 생각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르바이트를 쉰 적이 없었지만, 파트 타이머로 일을 할 때 보다 직장인의 마음가짐은 더욱더 책임감이 있어야 하고 분위기나 환경 또한 다를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 예상의 벽을 완전히 넘어버렸던 곳이 나의 ‘첫 직장’이었다. 나는 자유인이었지만 지옥에 갇혀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어디까지 했어? 아직도 이거밖에 못했어? 내일까지 이거 다 외워와. 너를 위해서 내가 가르쳐주는 거야. 학교는 대체 왜 다닌 거야? 대학원까지 나와서는. 정시 퇴근하는 거야? 하. 진짜, 이것 봐, 내가 없으면 안 된다니까. 회사 생활 안 해본 너를 위해서 조언하는데, 너 웃으면서 인사하는 거 소장님이 안 좋아해. 왜 안 그만두니?”




성경에서는 이런 것을 ‘뱀의 혀’라고 한다. 뱀은 동물 세계를 대표하는, 마음을 꾀어내기에 능한 악한 존재의 상징이다. 악마는 기생충처럼 누군가를 현혹시켜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들고, 많은 이들을 어둠으로 전염시키게 하면서 손 데 지 않고 코를 푼다. 그렇게 사람들이 자신만의 희망을 버리고 절망에 빠져서 괴로워하며 살려달라고 빌 때 더 심한 지옥으로 끌고 가 노리개 삼는다.


나를 탓하는 말과 나를 위한다는 말들을 매일 조금씩 변형된 언어로 들었다. 신경 쓰지 않는다고 착각하지만 내 귀는 열고 닫기가 되지 않아서 소리를 곧바로 뇌로 전달하고 저장했다. 그러면서 처음 보는 것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멍청한 줄 알았고, 처음 만들어 보는 것을 완벽하게 해내지 못하는 내가 재능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원래 스스로에게 너그럽지 못하고, 사회가 원래 냉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 말을 모두 받아들이려고 애썼다. 그러나 괴롭힘의 강도가 점점 심해지며 내 안위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을 때 소장에게 상사의 행동이 좋지 못한 것 같다고 이야기했지만 군부대의 내리 갈굼에 대해서 교육받아야 했다. 개선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소장의 됨됨이와 대처 방법이 궁금했고 그만둘 것을 각오한 뒤에 이야기했다. 예상대로 괴롭힘은 더욱 심해졌다.


가스라이터는 악마와 같이 생각을 심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핀 곰팡이처럼 스멀스멀 엉겨 붙어 좀처럼 지워지기 힘든 얼룩을 세긴다. 사람이건 사회건 약물이건 가스라이팅을 하는 주체는 다양하다.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도록 느끼게 만들고자 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나약함과 의지함을 이용해 잇속을 채우는 것. 애걸복걸하며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는 모습, 자신의 한 마디에 어찌할 바 모르고 벌벌 떠는 모습을 보며 자신이 우월하다는 착각 속에 빠지는 것이 그들의 목표로 보였다.


가스라이팅은 사적 관계에서도 있었다.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자신이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고 도움을 청해서 가까워지게 된 그 아이는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내가 못생겼음을 각인시키려 애썼고 자신의 예쁜 친구들과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함께 추종하기를 바랐다. 그를 이해하고 같은 관심사를 좋아하기 위해 애썼던 행동에 대하여 자신을 따라 한다며 기분 나빠했다. 그 아이가 험담을 할 때 “그렇구나.” 했던 말이 내가 험담을 한 것으로 되기도 했다. 내가 관계에 서툴고 세상 것에 대한 주관이 없으며 성숙하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하기에도 그 행동들이 행동들이 전부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나를 싫어할 사람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싫어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 아이가 뱉은 것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너 A랑 아직도 친해? 그럼 걔 놓치지 마. 너한테 친구는 걔 하나뿐 일 거다.”라는 말이다. 자신도 알고 있었다. 우리가 친구가 아니라는 사실, 혼자이고 싶지 않고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내가 필요하긴 하므로 이어지는 관계일 뿐이지 나를 친구로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사실. 그 아이가 나를 위한다는 말들에 내 삶이 흔들리길 바라는 마음이 가득 담겨있었다. 나를 망가트리고 내가 부족함을 각인하면서 그 아이가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이쯤 되면 나한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리고 이후부터 그 아이와 마주하지 않았다.


사람이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얼마나 이득이 되기에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는 행동을 감행하는 것일까. 그저 당신이 남보다 낫다는 오해 하나, 누군가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착각 하나를 위해 사람은 이토록 잔인해질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초래한 많은 인생들의 고통이 어떤 형태로, 얼마만큼의 범위로 되돌아오게 될지 생각해 본 적 없을 것이다. 알지 못하기에 그리도 용감한 것이겠지, 자신이 어떤 형상으로 보이는지 안다면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본인이 누군가에게 그토록 끔찍한 기억이라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일까. 나 또한 언제나 불완전하고 실수를 하기에 누군가의 안 좋은 기억일 수 있다. 다만 그것을 생각하면 수치심이 몰려오고 흔히 말하듯 밤에 이불을 찬다. 그리고 답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피곤하게 산다.


수도 없는 가정 끝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 모든 가정이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거울을 마주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앞선 가정들이 성립될 수 없었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사회생활이 다 그런 거야.”

사회생활이 다 그런 것인 줄 알았다. 상사는 원래 ‘아랫사람’에게 거침없이 내뱉어도 되는 줄 알았고 나는 그러한 취급들을 당해도 되는 사람인 줄 알았다. 나조차도 아껴주고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더는 겪어낼 자신이 없었고 내 인생에 사회생활은 앞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걸 포기하고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경험은 그동안 곪아왔던 상처들을 터트렸다. 번아웃 증후군과 우울증을 연달아서 불러왔고 남은 건 하나, 나의 회복이었다.


나를 회복시킨 건 내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사실도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아니었다. 내가 일련의 일들을 당해도 싼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너’가 그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고 ‘나’는 어쩌다 운이 나쁘게 너를 만난 것 일뿐이라는 깨달음이었다.


‘나’라서 그런 일을 당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돌을 맞을 만큼 잘못한 것이 없다. 누군가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 만큼 고결한 사람도 없다. 그저 지나가다가 우연히 돌을 맞았을 뿐이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듯이 불행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며 악마는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낚시터의 물고기와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 악은 그저 낚싯대를 드리우고 누군가 걸려들기를 기다리고 있다. 사람에게 선과 악의 기준은 ‘’나’에게 어떻게 했는가’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는 천사, 누구에게는 악마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절대 우리가 잘못해서 그들이 악마가 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숨어있는 악을 행할 수 있을 만큼 우리가 선해 보였을 뿐이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내 첫 직장은 매우 아담한 가구 제작 사무실이었다. 그의 말대로 ‘대학원까지 나와서’ 이곳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딱 두 가지였다. 소장이 내가 선망하던 사람이라서, 그리고 ‘목공업’에 대해 미화된 나의 어린 시절 기억 때문에.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가 목수셨다.

유치원을 마치면 목공소가 있는 우리 집 1층으로 곧장 달려갔다. 아버지의 도면 위에 내 몸집만 한 노란 가방을 던져놓고서 커다랗고 따뜻한 손에 들려졌다. 아버지를 껴안을 때 나는 포근한 목재 냄새와 텁텁한 담배 냄새의 합주가 좋았고 까칠한 턱은 보드라운 얼굴에 사랑을 느끼게 했다. 아버지가 나를 한 편의 안전 구역에 내려놓으면 폭신폭신한 톱밥으로 장난을 쳤고, 작품의 일부가 되지 못하여 안쓰럽게 버려진 나뭇조각들을 나만의 세계로 재구성하며 놀았다. 전기톱 테이블에서 목재가 잘릴 때에 찢어지는 소음이 났지만 향기롭고 묵직한 탄 냄새도 같이 났다. 그 냄새도 정말 좋았다.


아버지는 자신의 재능으로 사람들의 공간을 아름답게 구성해 주고 꾸며 주었다. 목공소가 있던 동네의 몰딩과 문짝의 상당 부분이 아버지의 손에서 탄생했다. 가족들이 쓰기 위해 만든 수납함에도 조각을 넣으셨는데, 곡선이 이루는 비례감은 어린 내가 보기에도 아름다움을 느낄 정도였고 정교하게 짜이는 목재 퍼즐에 희열을 느꼈다.


목공소에 대한 이미지는 나에게 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사람이던 물건이던 아끼는 것들을 소중히 담을 수 있게 하기 위해 공간을 만들어 주는 ‘마음이 따뜻한 예술가’가 내 기억 속의 목수였다. 그러나 환상은 나만의 것이었고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현실은 그저 현실, 타인은 바꿀 수 없는 절댓값이다. 그렇다면 어찌할 수 있는 건 내 마음뿐이다.


그래 그렇지. 내가 기억하는 목공소와 목수는 사랑이 가득했다. 그곳이 이상한 곳이었고 그 사람들이 잘못된 것이다. 나는 사랑을 양분 삼아 자랐고, 아마도 나를 괴롭힌 이는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안다면 나누어 주지 않고는 못 배긴다. 그리고 오랜 아르바이트 생활을 하면서 나설 때와 나서지 않는 때를 구분하는 방법을 배웠다. 나의 생각이 도덕적 관념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누구의 앞이라도 당당하게 내 의견을 이야기하는 사람이었고 불의를 보면 화도 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사실은 우리가 강하기 때문에 참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나를 잃어서 전부를 잃은 것 같아도 차분하게 과거를 돌아가다 보면 내가 잊고 있었던 중요한 삶의 맥을 찾을 수 있게 된다. 마음이 너무 어둡고 깊어져서 알아채지 못했지만 힘이 되었던 기억들은 항상 ‘지금’과 연결되어 있다. 과거에 받은 사랑들은 현재에 밀려서 잠시 잊을 뿐이지 잃어지지는 않는다. 사실 아픔도 마찬가지 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가스라이팅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단 한 가지, 우선은 벗어나는 것이다. 상황이 된다면, 아니 상황이 되지 않아도 일단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대항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다. 그렇기에 대항하는 것도, 벗어나는 것도 혼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자신이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를뿐더러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이미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무엇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건지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까지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당신이 필요하다.

누군가가 천재지변같이 어쩔 수 없이 찾아온 불행까지 내 잘못이라는 듯 모든 일에 ‘나’의 탓을 하고, 아주 가쯤 챙겨주면서 타박을 하는 동시에 생색을 내며 공동체 안에서 이간질을 시키고 나를 고립시키려는 상황을 만들고 있다면, 아니 그것도 모르는 채로 그냥 사회에서 외롭고 슬픈 기분이 든다면, 일단 가족이나 아주 가까운 지인에게 말해야 한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면 들어줄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 주변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다. 요즘에는 무료 상담사도 많고 합리적인 비용으로 양질의 상담을 해주는 상담소가 정말 많다. (자신에게 맞는 상담사를 찾아서 여러 군데를 겪어보아야 합니다)


불이 나면 일단 빠져나와야 살 수 있지 않은가, 가스라이팅은 무색, 무취, 무통의 불이다. 모르는 사이에 타들어 가고 있다. 알아챌 수 있는 방법은 부정적이고 극단적인 방향으로 변해가는 나 자신의 감정 상태이다.


모든 인생에서 ‘나’들이 주인공이기에, 저마다가 모두가 ‘갑’이 됨을 인지하지 못하고 남의 인생에 갑질을 하는 이들로부터 예민하게 반응하여야 한다. 그럼으로써 바깥세상에 ‘을’로서 존재하는 나를 ‘갑’으로서 지켜야 한다. 우리 인생에서 타인에게 갑의 자리를 내어주지 말기로 지금 약속하자.





안녕하신가요? 저는 안녕하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당신 덕분에 이렇게 다수를 도울 수도 있는 내용의 글을   있게 되었네요. 값진 경험을 하게  주어서 감사합니다.  저를 지키려는 주변의 노력들을 보면서 제가 얼마나 사랑받는 사람인지를 깨달았어요. 그리고 지금은 당당하고 단호하게 맞설  있는 힘을 다시 찾게 되었어요. 악의 실상이 생각보다 비겁하고 하찮음을 깨달았거든요.


저는 잘 지냅니다.

이제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당신이 너무 안쓰럽습니다. 당신도 부디 잘 지내서 더 이상 나 같은 피해자를 탄생시키며 아픈 사회를 만들고 있지 않기를 바라요. 고운 마음으로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기를 바라요. 사랑이 얼마나 좋은 건지 깨달았기를 바라요. 나는 이제 괜찮으니까 당신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 나만큼은 아프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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