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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동희 Mar 09. 2024

알렉산더를 환대한 '비르마운드'

간다라 이야기 #12


전편에서 소개 한 바와 같이, 탁실라에는 세 개의 고대 도시유적이 있다. 그중 가장 오래된 유적은 '비르마운드(Bhir Mound)'이다. 비르마운드는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까지 탁실라의 중심지로 사용되었다. 기간에도 탁실라에는 많은 방문객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손님은 멀리 그리스에서 알렉산드로스 3세 마그누스 대왕(Alexander III Magnus, BCE 356 - BCE 323) 일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과 비르마운드


기원전 326년, 알렉산더 대왕은 인더스 강에 도달했다. 기원전 334년 동방원정에 나선 지 불과 9년 만에 페르시아를 시작으로 이집트, 메디아, 파르티아, 아리아, 드란지아나, 아라코시아, 박트리아, 스키티아, 소그디아를 차례차례 정복하였다. 그의 군대는 유라시아를 통일할 기세였다. 군대를 이끄는 알렉산더 본인도 인도를 정벌하고 동쪽의 끝을 보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길(출처: 위키피디아)


하지만 휘하 장군들과 병사들은 이미 한계에 달해있었다. 반복된 전쟁으로 인한 지침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반발이 점차 커져가고 있었다. 실상 위대한 원정은 언제 중단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때 은혜로운 지원세력이 등장했다. 바로 탁실레스(Taxiles) 왕이었다. 탁실레스는 그리스 역사가들이 기록한 이름인데, 실제 이름은 암비(Ambhi) 왕이었다. 탁실레스는 도시의 이름이었던 탁실라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암비왕은 이웃 왕국의 국왕 포루스(Porus)를 굴복시기키 위해, 먼 서쪽에서 건너온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과 손을 잡기로 결정하였다 말해진. 암비왕은 알렉산더에게 은화, 소와 양, 기병 등을 선물하여 화친을 제안하였다. 저항하지 않던 세력에게는 언제나 관대했던 알렉산더는 암비왕의 제안을 받아들고 탁실라로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넘어왔다. 인더스 강을 건너는 알렉산더를 맞이하기 위해 암비왕은 헌드(Hund)까지 마중 나갔고, 탁실라로 직접 안내했다. 또한 알렉산더와 그의 군대를 위해 지극한 환대를 베풀었다.


알렉산더 대왕을 맞이하는 탁실레스(출처: 위키피디아, François Verdier 1651)


알렉산더와 암비왕의 연합군은 포루스와의 전쟁에 착수했다. 알렉산더 연합군은 히다스페스(Hydaspes) 강에서 포루스와 대전을 펼쳤고, 승리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이 전쟁을 끝으로 알렉산더의 군대는 더 이상 동쪽으로 진격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진격을 말라는 신탁을 빌미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 지친 장군들과 군대의 반발을 더 이상 누를 수 없었던 것이 이유라는 견해가 많다. 결국 히다스페스 전투는 알렉산더 대왕이 가장 동쪽에서 치른 전쟁이자 그의 마지막 대형 전쟁이 되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인도 원정길(출처: VOICE OF INDIA 블로그)


위 이야기는 알렉산더 대왕이 탁실라에 왔던 시기에 대해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야기이다. 곧 이어진 히다스페스 전투에서 대장부와 같은 포루스를 굴복시킨 알랙산더의 무용담에, 암비왕의 행적은 비굴하게 굴복한 왕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암비왕이야 말로 인도에 있었던 지도자 중 가장 현명한 판단을 내렸던 지도자가 아닐까 싶다. 암비왕이 알렉산더에게 사신을 처음 보냈던 것은 알렉산더가 소그디아나(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 머물고 있었던 시기이다. 이는 그가 얼마나 대외정보에 민감했었는지를 추측하게 해 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알렉산더를 끌어들여 골칫거리 이웃 세력인 포루스를 굴복시켰다. 그는 다가오는 재앙으로부터 자신의 도시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근심거리였던 주변 세력을 정벌하기까지 한 것이다. 최후의 승자는 탁실라의 암비왕이다.



비르마운드 유적


동방원정이 탁실라에 닿았던 기원전 326년, 탁실라에서 가장 중심지가 되었던 곳이 비르마운드였다. 알렉산더 대왕을 환대했던 탁실라의 옛 모습은 비르마운드 유적을 통해서 약간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탁실라의 통치자였던 암비왕의 거주지도 비르마운드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고대도시 비르마운드는 탁실라 박물관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박물관의 입구에서 넓게 펼쳐진 공터가 보이는데, 이 일대가 모두 비르마운드 유적지이다. 비르마운드 유적지는 동서 500m, 남북 400m에 이르는 영역이 개활지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좌) 탁실라의 고대 도시들의 위치, (우) 비르마운드 유적


1900년대 초반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비르마운드 유적은 기원전 6세기(혹은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에 걸쳐 융성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첫 발굴조사는 지금으로부터 1세기 이전인 영국 식민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도고고학연구소(ASI)의 존 마셜(John Marshall)은 1913년부터 1925년까지 비르마운드 발굴을 추진하였다. 가장 오랜 시기에 걸쳐 진행된 만큼 발굴 대상지도 가장 넓다. 현재의 유적지 남동쪽으로 넓게 노출된 유구들이 그에 의해 발굴된 지역이다. 그 이후로는 단발적 형태의 발굴조사가 이어졌다. 1944년부터 1945년까지 모르티머 휠러(Mortimer Wheeler)에 의해서 서쪽일대가, 1966년부터 1967년까지 모하마드 샤리프(Mohammad Sharif) 박사에 의해서 동쪽의 일부,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바하두르 칸(Bahadur Khan)에 의해서 북서쪽 일대가, 마지막으로 2002년에 아쉬라프(Ashraf) 박사와 마뭇 울 하싼(Mahmud-al-Hassan) 박사에 의해서 북동쪽 일대의 발굴이 진행되었다.



발굴 조사와 연구 결과 비르마운드는 기원전 6~5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에 걸쳐 융성했던 도시임이 확인되었다.  그리스의 역사가들이 기록한 부유(wealthy)하고, 번창(prosperous)하고, 잘 통치된(well governed) 도시의 모습에 걸맞은 규모로 보인다. 유적에서는 반듯한 형태는 아니지만 사각형으로 된 수많은 방들이 확인되었다. 토기, 동전, 귀금속 등 다양한 출토된 유물을 통해서도 부유했던 고대도시의 삶을 유추할 수 있다.


다만 안타깝게도 알렉산더 대왕과 관련된 발견은 매우 한정적이다. 존마셜의 발굴조사에서 알렉산더 대왕의 주화 2개를 발견하기도 하였지만, 알렉산더의 대군이 이 땅에 머물렀음을 보여줄 수 있는 사료로는 다소 부족해 보인다. 500년에 걸친 긴 도시의 역사에 비해 알렉산더의 군대가 머물렀던 기간이 짧았기에 그 흔적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을 듯하다. 아직 많은 영역이 미지의 상태로 남아있는 만큼 추후의 조사성과가 기대된다.


비르마운드 고대 도시 유적



참고자료

Sastri, K. A. Nilakanta, ed., Age of the Nandas and Mauryas (Second ed.), Delhi: Motilal Banarsidass, p.46~p.55, 1988

Dr.D.K.Shahi, Spatial History and Cultural Geography of Taxila: A Search for the Buddhist Identity, Online Journal of Multidisciplinary Subjects, Volume-13, issue-1, 20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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