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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카당스 Sep 15. 2024

남기고 온 것들에 대한 그리움

해외 생활 10년. 무엇이 제일 아쉬울까.

어느덧 해외에 나와서 산지도 벌써 10년이 되었다. 20년, 30년 사신 분들이 어디서 주름잡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10년이면 강산이 변하고도 남을 긴 시간이다. 그동안 나라를 3번 옮겼으니, 정말 다이내믹한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못해도 매년, 아니면 2년에 한 번씩이라도 한국에 들어가려고 애를 쓰지만, 들어갈 때마다 헐레벌떡 일을 해치우는 느낌이라 진짜 고향 땅에 돌아왔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왜 이렇게 해야 할 일이 많은 건지. 분명 휴가로 갔는데 왜 이렇게 바쁜 건지.


아마 태생이 바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한국인인지라 그런 모양이다. 지금도, 그냥 쉬면서 책이나 읽고 있으면 불안감이 솟아오른다. 무언가 해야 할 것 같고, 무언가 이루어야 할 것 같고.


발전 지상주의가 만연한 한국에서 자란 나와 아내는, 그러다 보니 늘 바쁘게 산다. 한국에 있을 때는 그 바쁨이 싫었다. 바쁜 것만이 아니라, 정말 미친 듯이 일했다. 사람을 갈아 넣는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그때는 바빠서 지나치거나, 당연한 생각이 들어 소중한 느낌이 들지 않았던 것들. 해외 생활 10년 차가 되니 슬슬 그런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끓어 넘치기 시작한다. 어떤 때는 격하게, 어떤 때는 잔잔하게. 무엇이 그렇게 아쉬운지, 아니, 그리운지, 한 번 넋두리를 해보련다.




분명히 같은 음식인데, 왜 다른 맛이 날까.


우리 아이 학교 친구 중에는 조상이 고려인인 아이가 있다. 분명히 생긴 것도 한국사람이고, 성도 한국 성을 따르는데, 한국어도 못하고 한국에 가본 적도 전혀 없다고 한다. 그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조부모 때 러시아로 넘어가, 카자흐스탄에 자리 잡고 계속 살아왔다고 하니, 러시아어가 한국어보다 더 편한 것이다.


심지어 자신들이 한국인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오래 해외에 살다 보니, 한국과의 연결고리가 희박했던 탓이다. 지금이야 한류다 뭐다 해서 관심이 크지만, 그들이 어렸던 80-90년대에는 더 관심이 안 갔을 것이다. 마치 미국에 사는 아프리카계 흑인들이 자신들을 아프리카 사람이 아닌, 미국 사람이라고 인지하듯이 말이다.


하루는 그 친구 아빠가 런던에 사는 고려인 후손들 모임을 했다며 사진을 보여줬는데, 놀랍게도 잡채와 김치 같은 음식들이 차려져 있는 게 아닌가. 본인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도 없는 이들인데, 음식은 한식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마음에 조사를 해보니, 이민한 지 최소 3세대는 지나야 음식이 서서히 현지 음식으로 바뀌기 시작한다고 한다. 3세대라면 최소 6-70년은 지나야 그때부터 입맛이 바뀌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1세대에 불과하니, 얼마나 한식이 그립겠는가!


물론 런던에 와서 사정이 많이 나아졌다. 우리가 살던 플로리다 잭슨빌이나 헝가리 부다페스트에는 제대로 된 한식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이 거의 없었다. 헝가리야 배터리 공장들이 우후죽순 들어서면서 사정이 나아졌지만, 역시 주재원들만을 상대로 하다 보니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고, 경쟁도 적다 보니 만족도가 떨어지는 식당들도 있었다. 플로리다야 뭐...


다행히 런던에는 한식 붐이 일고 있는 모양인지, 한식당들이 많았다. 뉴욕이나 엘에이와는 비교도 안되지만, 한인 타운도 나름 있고, 어떤 식당은 한국에서 먹는 한식보다도 더 잘하는 식당도 있을 정도. 한국 식재료도 조금 비싸지만 대형마트를 통해 충분히 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그런지 한국에서 먹던 맛이 나질 않는다.


분명 같은 김치찌개이고 순두부찌개인데, 미묘하게 예전에 먹던 맛이 나질 않는다. 짜장면과 탕수육을 무척 잘하는 한국식 중국집인데도, 예전에 사무실에서 점심을 먹으러 갔던 허름한 중국집의 맛이 나질 않는 것이다. 회도,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치킨도, 떡볶이도, 다 그랬다.


'혹시 조미료 때문인가...?'


이런 생각도 한 번 해봤다. 한국보다 미원이 덜 들어가서 그런 건 아닐까. 그런데 먹고 나면 입이 텁텁하고 잠이 솔솔 쏟아지는 게, 절대로 미원이 더 들어가면 더 들어갔지 덜 들어간 건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분위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무리 식당에서 한국 티브이를 틀어주고, 파란 플라스틱 의자에 벌겋게 달군 숯을 둥그런 테이블 가운데에 있는 불판에 가져다준다 해도,


비가 와서 축축하게 젖은 좁은 골목길 복판의, 달근하게 취해 넥타이를 반쯤 푼 직장인들이 북적이는 고깃집의 비좁은 자리에 간신히 앉아 먹는 고기의 맛이 나질 않는 것이다.


경기도에 살았던 나는 차는 언제 끊길까, 내일 출근은 어떻게 할까, 그냥 반차를 쓸까, 이런 잡생각을 하면서 술잔을 기울였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외국에서는 그때의 그 맛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분위기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는 절대 먹을 수 없는 음식들도 많다.


아무리 한식당이 많이 생겼다지만, 한국에서 먹던 스끼다시가 가득한 회 한상, 담백하면서도 얼큰했던 닭 한 마리, 상다리 휘어지게 먹는 한정식, 혹은 들기름만 부어 먹는 메밀국수 같은, 이런 것들은 외국에서 아예 먹을 수조차 없는 것들이다. 한국에서는 간장게장이 "선택의 문제"였다면, 여기서는 "존재의 문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없으면 만든다고, 외국 와서 살면서 느는 것은 요리실력뿐이다. 삼계탕은 기본이고, 양념소갈비, 육개장, 제육볶음, 돈까스, 대구뽈살찜까지, 집에서 해 먹을 수 있는 음식의 가짓수가 엄청나게 늘었다. 양념게장과 간장게장은 물론이고, 집에서 곱창까지 만들어 드시는 분들도 봤다. 그립고 아쉬운데 해결할 방법이 없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나 할까.


오늘도 글을 쓰면서 점심으로 무엇을 해먹을지, 저녁은 아이에게 무엇을 해주어야 할지 고민한다. 아무 생각 없이 들러서 먹을 수 있었던 백반집이 그리운 하루다.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와 동료들


외국과 한국의 결정적인 차이점 중 하나는,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가 아닐까 싶다. 한국에서의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는 단순히 직장에서 마주치는, 같이 일하는 이들을 넘어, 친구나 걱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한 형이나 오빠와 같은 사이로 발전하곤 했으니 말이다.


사실 그닥 도움이 되는 사이는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술을 진탕 마시면서 고민을 털어놓고, 그 순간은 무언가 서로 연결된 느낌, 속이 풀리는 느낌이 들지만, 막상 깨고 나면 별거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으니까. 그냥 잠깐 다른 세상으로 도망친 느낌이랄까. 아니면 필름이 끊기는 전조현상이랄까.


그렇다 하더라도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고, 비슷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늘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커다란 것까지, 굳이 1부터 100까지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20-30 정도는 서로 공유하고 있는 부분들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내가 가진 문제는 다른 이들이 가진 문제이기도 했고, 다른 이들이 가진 문제는 내가 가진 문제이기도 했으니까.


아마 이것이 공동체라는 느낌일 것이다. 비록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진 않더라도, 서로를 이해하고 위안할 수 있는 그런 소중한 사람들 말이다.


외국에 나오면서 이런 공동체라는 느낌을 받아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물론 어딜 가든 한국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과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수다를 떨면서 공동체의 느낌을 받는다. 타지에 있다 보니 오히려 한국보다도 끈끈해지기도 한다. 공동의 문제를 가지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사무실에 들어서면 그렇게 외로운 마음이 들 수가 없다. 재택근무가 정착되어 1주일에 이틀만 출근하다 보니 더 그런 것도 있다. 그냥 혼자 출근해서 혼자 일하고, 주변에 있는 몇 사람과 농담 따먹기를 하고, 그리고 혼자 퇴근하는 것이다. 다들 개인의 삶을 중시하는 터라, 일이 끝나고 회식을 하는 일도 극히 드물다. 가끔 친구처럼 지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한국처럼 공동체를 느낄 만큼 끈끈한 사이가 되지 않는 것이다.


물론 회사마다, 개인마다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매일매일 첫 본사 출근을 하는 느낌이었다.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새로운 사람들. 서로 간의 공유할 거리가 많이 없는 사람들. 서로 다가가는 것조차 귀찮아진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는 느낌 말이다.


언어 문제일까. 그렇지 않다. 플로리다나 헝가리에서는 가족 같은 느낌이 있었으니까. 이건 런던이 문제이거나, 아니면 내가 바뀐 것이거나, 아니면 둘 다이거나. 절대 언어 문제는 아닐 것이다.


어디선가 죽기 전에 가장 후회하는 것들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가 없었던 것"이라고 한다. 어디서는 평생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 세 명만 있으면 성공한 인생이라고도 했다.


한국에 있을 때는 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후보군들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술잔을 기울이며 했던 얘기를 하고, 또 하면서, 회사와 사회를 대차게 비판했던, 어스름한 불빛 아래에서 웃고 울었던 기억과 얼굴들이 그리워진다.




가족, 그 그리운 이름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가족이 아닐까 싶다.


해외에 나와서 사는 것은 불효로 가는 직행열차다. [신과 함께]라는 만화의 지옥편에 보면, 불효를 저지른 자식들은 차가운 얼음 속에 갇히는 한랭지옥에 떨어진다고 한다. 아마 해외에 나와서 사는 것만으로도 한랭지옥행 티켓을 끊은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한국에 있다고 해서 연락을 더 자주 드리거나 했던 것도 아니다. 주중에는 야근하랴 회식하랴, 주말에는 결혼식이나 돌잔치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그것도 아니면 너무 피곤해서 하루종일 퍼져서 자는 날들도 많았으니까. 그럴 때면 연락을 뒷전이고, 나 살기에 바빴다.


그래도 원할 때면 언제든지 달려갈 수 있었다. 반찬을 나눠주시기도 하고, 무슨 일이 있으면 찾아가기도 쉬웠다. 하물며 단순히 문자만 하더라도, 시차를 생각하지 않고 아무 때나 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해외에 살면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당장 달려가고 싶어도, 계획을 해야 하고, 비행기 값을 알아봐야 한다. 코로나가 끝나고 비행기 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가면서, 더 찾아가기가 어려워졌다. 이런 망할.


특히나 어머니가 아프시면서, 나름 노력했다고는 하지만 결국 돌아가시고 나니 내 마음에는 큰 멍울이 남았다. 코로나 때문에 한국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그때 정말 삼일 밤낮을 울기만 했던 것 같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목이 멘다. 평생 돌이킬 수 없는 후회로 남은 것이다.


한국에 있었더라면, 그 정도 후회로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가시기 전에 했던 마지막 영상통화에서 어머니는 웃고 계셨다. 아마 그동안 너무 힘들었던 탓도 있을 것이고, 내게 마지막으로 웃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으셨을 것이다.


돌아가시기 전, 하루는 내가 효도를 못해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그 말에 어머니는 웃으시면서, 태어난 것만으로도 효도는 다 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을 듣고 또 한 번 펑펑 울었다. 물론 아이를 키우는 지금은 그 말이 정말 마음으로 와닿지만, 그래도 한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정말 "한"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제는 이해가 간다.


형제라도 있었으면 죄송스러운 마음이 덜했을 것이다. 이런 가슴 아픈 그리움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이 드신 부모님을 중국에 두고 온 중국인 부부도 그랬고, 실제로 그래서 한국이나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번에 연락이 닿았던 한국에 계신 임원 한 분은, 같은 이유 때문에 아이와 남편을 두고 한국에 귀국하셨다고 했다.


그렇다고 외국에서 모시고 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장인장모님께서 미국에 오셔서 한 달 정도 계신 적이 있다. 말씀은 안 하셨지만,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 오셔서 힘들어하셨다. 이번에 런던에 오셨을 때는, 부모님께 못 해 드린 것이 생각이나 더 잘하려고 애썼지만, 아마 똑같이 불편한 점이 많으셨을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부모님 얘기를 하면 나는 항상 계실 때 잘하라고 말하곤 한다. 이 그리움은 한으로 남고, 죽을 때까지도 지워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오늘은 이 정도로 넋두리를 마칠까 한다. 글을 쓰고 읽는 것은 치유를 목적으로 해야 하기도 하고, 이대로 쓰다가는 밤을 새도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아서이기도 하다.


런던의 인구 중 40% 이상이 해외에서 태어난 외국인이라고 한다. 어떤 이들은 늘 밝은 표정으로 살고, 어떤 이들은 시종일관 세상이 끝난 것 같은 표정으로 살지만, 그 표정 뒤에 숨은 것은 가족과, 친구와, 그리고 맛있는 고향의 음식과 따뜻한 정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다.


언제라도 돌아가 따뜻한 저녁밥을 먹을 수 있는 고향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지만, 마음속의 아쉬움을 고향으로 삼고 오늘도 하루 열심히 살아보련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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