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페이스를 잃어버리는 마음에 대하여
몇 년 전, 긴 여행을 끝나고 돌아왔을 때 누군가는 내게 말했다. 초연아, 세상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야. 이제는 방향만 잘 찾으면 다 괜찮아질 거야. 스물일곱, 내 또래들은 대부분 취업을 했고, 모두들 자신만의 방향을 찾아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속도와 방향 중 무엇이 중요한 지 고민할 틈도 없이 나는 사회로 곧장 뛰어들었다. 일단 움직이고 생각하자, 그것이 나의 방식이었다. 내가 뛰어든 직종이 내가 적합한 방향이라 믿으며, 적당히 뚜벅뚜벅 걸어 경력을 쌓아나갔다.
서른이 되고 이 방향이 나쁘지 않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할 무렵, 이상하게 다시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속도의 문제였다. 조금 더 큰 회사에 오고 나니, 자신의 길을 닦아 빠르게 나아가는 듯 보이는 사람이 많았다. "야, 나 욜로 하다가 골로 간 것 같은데." 친구에게 하소연을 하고는 적금을 하나 둘 들기 시작했다. 회사 밖에서도 돈을 벌 요량으로 편집일을 시작했고, 남들보다 늦었지만 차곡차곡 잔고를 쌓아갔다. 회사도, 외주도 안정기를 맞을 무렵, 이번에는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이른바 슈퍼직장인을 만나게 된 것이다. 내 주변에 결코 없던, 회사 안에서 큰 꿈을 가지고 일을 하는 사람. 회사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회사의 감투란 감투는 죄다 쓰고 있는 사람. 엔지니어면서 영어도 곧잘 해 여기저기 불려 다니기 바쁜 그를 만나고 나니, 내가 이렇게 회사생활을 해도 되는 건가, 앞으로의 내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건가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너무 빨리 달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 까닭에 그를 만나는 동안의 나는 내가 하는 일이 너무 보잘것없고 하찮지 않은가 염려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착실하게 커리어를 쌓아 앞으로 나아갔지만, 나는 아니었다. 느리고 꾸준히 걷는 내가 한심하면서도 그렇다고 마뜩한 해답을 찾기 어려웠다.
언니, 슈퍼직장인이 되고 싶어?
그 남자를 만나는 동안 내가 너무 작았었다는 고민을 털어놓았을 때, 친구는 말했다. 내 꿈이 슈퍼직장인이었냐고. "아니, 슈퍼직장인이 아니라 슈퍼백수가 꿈인데?" 이렇게 말하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내 꿈은... 어떤 한 시절에 대한 글을 쓰는 것, 스스로 떳떳한 인간이 되는 것 이 정도가 전부였다. 그래서 그와 헤어지고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브런치를 시작하는 일이었다. 소설이나 시는 아니더라도, 하루에 한 번씩 나에게 있었던 일을 기록하는 건 조금씩 괜찮아지기 위한 발판이었다. 느리지만 꾸준히 하루를 기록하는 행위. 그건 나의 자아실현과 자아시련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
남들 페이스대로 가다간 개망하는거야
친구는 남들 페이스대로 가면 개망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맞아, 남들 페이스대로 가지 말자. 다시 마음을 다잡고 괜찮아진 것이 보름 정도. 오늘에야 내가 왜 그렇게 페이스를 잃어버렸는지 그 까닭을 알게 되었다.
9월 29일 일요일, 한창 연애에 빠져 각성상태일 때 신청한 뉴발란스 마라톤 날이 드디어 밝았다. 여름 내내 퇴근 후 10km씩 꾸준히 연습을 하며 적당히 맞는 페이스를 찾았으니 달리는 일이 크게 불안하진 않았다. 10km 정도는 빠르진 않아도, 가뿐하게 들어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여의도로 향했다.
아침 7시라는 이른 시간에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여의도공원에 나와 몸을 풀고 있었다. 저 너머로 회사가 보였다. 회사를 보면서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내 페이스대로 꾸준히 뛰자고. 평소처럼 에어팟을 귀에 끼고 출발선에 섰다.
그렇게 1km, 2km씩 나아가는데... 어느 순간부터 숨이 턱, 하고 막히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3km 까지는 쉼 없이 달릴 수 있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과 달리는 건 처음이라 그런가? 당황했다. 달리기 APP으로 페이스를 확인해보니, 평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어플을 켜든 켜지 않든 지난 한 달간 늘 일정한 속도로 달렸는데, 왜 이런담. 나는 다시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두 뛰고 있단 말이야?
서강대교에 진입하자, 먼저 출발한 1그룹 사람들이 반환점을 돌아 올라오고 있었다. 도로를 가득 채운 참가자들의 모습이 한눈에 보이자 괜히 마음이 아득해졌다. 나는 이 많은 사람들 중에 몇 등이나 될까. 어느 지점에 있을까. 내 앞에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데, 하고 뒤를 돌아보니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내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문득 아찔해졌다. 나는 다시금 페이스를 잃고 미친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건, 아마 지금 여기서 걸으면 제시간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마라톤은 실패로 끝나게 된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나보다 더 빠른 옆 사람, 내 앞을 달리는 사람, 자꾸만 나를 앞지르는 사람. 그 모든 사람들의 속도를 신경 쓰며 질주하다 보니 6km부터 완전히 지쳐버렸다. 그 결과 평소보다 좋지 않은 기록으로 완주하게 되었다.
안 보여서, 아무것도 못 따라 했는데?
1그룹으로 출발한 친구는 일찍이 여의도공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록은? 내가 묻자 친구는 아, 눈 비비다가 렌즈 빠졌어, 라면서 동문서답을 해댔다. 그러고 보여준 친구의 기록은 나와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두 달이나 연습한 사람이나, 단 한 번도 10km를 뛰어본 적 없는 사람이나 기록은 비등비등하다니. 야, 처음이라도 잘했네. 내가 말하자 그녀는 "처음에는 남들 따라서 미친 듯이 달렸는데, 중간에 렌즈 빠지고 아무것도 안 보여서... 그냥 내 마음대로 뛰다 걷다 뛰다 걷다 했어." 라며 눈을 찡그렸다. "눈에 뵈는 게 없으니까 더 나은 듯?" 기념품으로 주는 물을 마시면서 그녀가 그런 말을 했을 때, 문득 서강대교에서 느꼈던 아득함이 우습게 여겨졌다. 아오, 안 볼 걸 그랬네. 그냥 내 페이스대로 뛸걸.
남들 페이스대로 가다간 개망한다는 누군가의 조언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는 주말, 앞으로도 한쪽 렌즈가 빠진 사람처럼 남들을 눈여겨보지 않아야겠다고 스스로 타일러 본다. 자꾸만 페이스를 잃게 만드는 조급증과 불안감은 내려놓자며. 서른, 이번 생의 방향은 어느 정도 주어졌으니 남은 것은 속도. 내 체력에 맞는 속도를 자신과 호흡하며 찾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
덧붙여, 길고 긴 마라톤에서 중요한 것은 완주라는 흔하고 편협한 말은 하고 싶지 않다. 힘들면 그쯤 해도 괜찮으니, 자신만의 속도로 딱 후회하지 않을 만큼만 해내는 사람이 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