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이 필요한 마음에 대하여
초연아 잘 지내? 경이었다. 뭐라고 답장할까 망설이다 그럭저럭 산다고 답장했다. 회사고 나발이고 엉망진창으로 산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경은 그럭저럭 사는 인생도 좋아 보인다고 했다.
너는 어때? 경에게 물었을 때, 그녀는 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프로젝트 때문에 도쿄에서 고베로 잠시 옮겼다고. 고베에 집을 구하고, 짐을 풀 무렵에는 인도인 직장동료에게 나쁜 일을 당했지만 그럭저럭 잘 대처했다고. 그 와중에 장례 때문에 한국에 잠깐 들렀고, 그렇지만 새로 투입되는 프로젝트의 일정이 빠듯해 연락하지 못하고 곧장 일본에 돌아왔다고.
경이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시시콜콜하는 일은 거의 드물었기 때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잠시 틈을 두고 그녀는 말했다.
-요즘 잠을 잘 못 자.
경은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하지 않고, 어려워도 어렵다고 말하지 않는 부류였다. 조금만 힘들어도 온 세상 사람들에게 떠들고 다니는 나와는 결부터 달랐다. 아직도 차분한 성미의 그녀와 왈가닥인 내가 친구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건, 아무것도 모르는 초등학생 때 이미 친해져 버렸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내가 갈까?
어쩐지 올 해는 그녀를 꼭 만나야 할 것만 같았다.
경을 만나는 건 거의 3년 만의 일이었다. 3년 만에 보면 어색할 법도 하지만 산노미야 역 앞에서 우리는 한눈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당연했다. 우리는 초-중-고등학교가 같았던 만큼 10대 때는 매일 만나는 사이였고, 대학이 달라진 20대에는 가끔 만나는 사이가 되었지만 견고하게 다져놓은 관계는 시간이 지나도 내구성이 좋았다. 우리는 단숨에 긴 공백을 뚝딱 지어 넣을 수 있었다.
가지런한 머리카락, 깔끔한 옷매무새, 단정하고 차분한 말투. 경은 변함이 없었다. 그에 비해 나는 온갖 호들갑을 떨면서 보고 싶었다고, 비행기가 얼마나 연착이 됐는지 하와이에 가는 줄 알았다고, 이 시국에 일본에 다 왔다고, 그런 시답잖은 농담을 해댔다. 경은 내가 숨만 쉬어도 꺄르륵 웃었다. 그녀는 세상에서 제일 웃긴 사람이 나라고 했다. 나는 아니라고, 나는 정말 낯을 많이 가리고 내성적이고 소심하다고 반박하면 또 웃어댔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면서 말이다.
낮술을 하면서 경의 이야기를 들었다. 개발자로 일을 하면서 잠을 잘 못 잔다고 했다. 뭐? 개발자? 경의 전공은 정치외교. 복수전공이 경영이었나. 경제였나. 첫 번째 회사도 일본의 마케팅 회사였으니, 나는 당연히 그녀가 해외영업이나 마케팅을 할 것이라 짐작했다. 그런데 개발자라고? 개발 공부는 언제 했냐고 물으니 경은 웃었다. 한국에서, 혼자.
경을 보면 항상 나보다 반 바퀴 앞서 걷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경이 한국에서 지낸 건 2년 전, 일본에서 회사를 다니다 한국으로 이직을 하겠다고 돌아왔을 때였다. 개발... 개발 전공자가 아니어도 뽑아 줘? 아니, 개발을 혼자 공부 해? 경은 가능하다고 했다. 백세 인생에 늦은 건 없다고 했다. 사실 스물여덟은 내가 불안한 마음에 아무 곳에나 취업을 해버린 나이였다. 그때 그녀는 반 보 쉬고 미래를 준비한 셈이었다.
스트레스가 심해 잠을 잘 못 자지만, 개발은 생각보다 잘 맞고 보람 있다며, 경은 웃었다. 너는 요즘 어때? 회사는 괜찮아? 경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 이게 맞는 건지, 이렇게 회사원이 되어도 되는 건지, 이렇게 마흔이 되면 어떻게 되는 건지 무섭다고. 경은 다들 그렇다고 위로해 주었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만약 개발에 관심이 있으면 이 길도 추천한다고.
-너무 늦었어. 개발을 배우기에 서른은 너무 늦었잖아.
그러자 경은 고개를 저었다.
- 하지만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시작해도 돼. 개발이 안 맞을 수는 있어도 너무 늦지는 않았어. 그리고 사실 무엇을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는 없어. 내가 스물여덟에 개발 공부를 시작하지 않았으면 서른의 나는 여기에 있지 않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두려웠다. 애초에 나는 경과 다른 부류였다. 인생 2 회차 같은 말을 쉽게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잃을 것도 없는데 겁은 많고, 겁은 많은데 또 덜렁거리고, 그러니 언제나 ‘엉망진창 우당탕탕’이 인생의 모토처럼 살아온 게 겨우 나였다.
- 뭔가 회사도 다녀야 할 것 같고, 글도 쓰고 싶어. 그런데 더 솔직히 말하면 이제는 내가 글이 좋아서 글을 쓰고 싶은 건지,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쓰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무엇보다 이제는... 못쓰겠어. 너무 많이 왔어.
경은 아니라고 했다. 너무 멀리 가지 않았다고.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 너는... 써야 해. 뭐가 됐든... 이제는 다시 썼으면 좋겠어. 경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 견딜 수 없을만큼의 머쓱함이 밀려왔다. 이럴 때 내가 잘하는 건 역시...
- 야, 개발자. 개발이 영어로 뭔지 아냐?
- development?
- 아니야. 멍청아. dog foot이야.
경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야! 그러면 임금 중에 가장 가난한 임금은 누구게?
경은 다시 한번 진절머리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최저임금.
벌써 서른과 겨우 서른 사이, 나는 여전히 피하고 있다. 무거운 이야기와 이루지 못한 것들을 마주하는 일은 숙연하다. 너무 속상할까 봐, 이야기가 지나가고 나서도 그 무거운 공기를 주워 담지 못할까 봐, 비교적 가벼운 이야기를 지향하는 편이다.
겨울 밤, 한기가 도는 불꺼진 방에서 가끔 다짐했다. 우울함과 예민함을 구분하는 사람이 되자고. 사람들에게 되도록이면 전자의 사람으로는 남고 싶지 않았다. 예민한 건 어쩔 수 없지만, 우울한 성미는 가면으로 어떻게 할 수 있으니.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농담이었다. 농담과 아무 말, 헤픈 웃음, 영혼없는 칭찬들.
물론 19년이나 나를 지켜봐 온 경은 모든 걸 알아차렸을 테지만 짐짓 모르는 척했을 것이다. 늦은 밤까지 잠들지 못하던 경이 약을 털어 넣고서야 겨우 뒤척이며 눕는걸, 나 역시 알아도 모르는 척했던 것처럼 말이다.
떠나는 날, 경은 백세 인생을 명심하라고 했다. 나는 이 기차가 사고 나면 백세 인생이고 나발이고 서른 인생으로 끝난다고 농담했다. 경은 질색하는 표정을 짓다 끝내 웃어주었다.
-그러니까 회사가 아닌거 같으면 다시 시작하자. 안늦었어.
그렇게 웃는 경에게만은 잘 지내지 않아도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잘 자고 잘 먹는 모습을 열심히 보여주다보니 어떤 순간에는 정말 괜찮아지기도 했다. 어쩌면, 아마도 경도 그랬을 것이다.
오사카까지 갔다 지겨우면 다시 고베로 돌아와. 경은 급행열차가 플랫폼을 완전히 떠날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오사카를 지나 단숨에 공항까지 향했다. 기차 안에서는 그녀의 손편지를 읽었다.
-너와 시답잖은 농담을 하는 시간이 좋았어. 이 나이가 되면 농담 하나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몰라.
농담이 환기하는 가벼운 마음, 잠시의 웃음, 알 수 없는 위로. 경의 짧은 편지에 조금의 온기가 퍼지고 있었다. 그녀는 나의 농담에 위로를 받았겠지만, 나는 19년째 나보다 반 바퀴 앞서 걷는 그녀의 존재 자체가 위로가 된다고. 하지만 그런 말은 머쓱해서 차마 할 수 없었다. 다만 너무 고마웠다고, 다음에 또 보자는 답장을 남길 뿐이었다.
반 보 쉬다 반 바퀴 앞서 걸을 수 있는 경이 앞으로도 너무 힘들지 않기를. 그녀 말대로 서른은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나이니까. 가능할 테지. 가능할 것이다. 너도, 나도 백세 인생이니까. 가볍게, 가볍게.
- 개발은 영어로 dog foot
-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임금은 최저임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