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선미 Nov 23. 2020

나의 노동 르포

늙어 죽을 때까지는 아니지만

 반찬가게에 취직했다. 조리실에서 만든 반찬을 포장하고 판매하는 일이다. 판매직이 셋, 조리직 셋 모두 여섯 명이 일한다. 조리 직원은 아침 일곱 시 반에 출근해서 네 시가 조금 지나면 퇴근했다. 퇴근시간은 다섯 시지만 그날의 반찬을 모두 만들고 나면 퇴근을 해도 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십 분이라도 빨리 퇴근하기 위해 쉬지 않고 움직였다. 조리장과 부조리장, 주방보조로 역할이 나뉘었고 서열이 분명했다. 각자 만드는 반찬도 정해져 있다. 판매 팀은 두 조로 나뉘어 일한다. 아침 조는 오전 아홉 시에 출근해서 다섯 시에 퇴근이고, 마감 조는 오후 두 시 반에 출근, 열 시까지 일한다. 아침에 집중적으로 만든 반찬을 용기에 포장하는 일이 오전 조가 주로 하는 일이다. 출근하자마자 하는 일은 ‘선도 확인.’ 유통기한이 지난 제품이 진열되어 있는지 일일이 확인해야 한다. 구청 식품위생과 불시 점검에 걸리거나, 신고당하면 ‘영업정지 먹기’ 때문이다. 서너층 쌓인 용기를 하나씩 들추며 확인하는데, 쇼 케이스 냉장고에 진열되어 있는 용기가 얼어 손을 베이기 십상이다. 맨손으로 확인하다 여러 군데 피를 보고 나서야 장갑을 끼기 시작했다. 그때 생긴 흉터가 아직 오른손에 남아 있다.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들여다본다. 몸으로 살았던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서.


 실링기(sealing)는 어깨 통증과 화상의 주범이다. 국물 있는 반찬용기를 기계 홈에 넣고 안쪽에 걸려 있는 비닐로 덮은 다음, 열판 뚜껑을 힘껏 누른다. 자칫하다가는 손가락이 열판에 구운 오징어가 될 수도 있다. 장갑을 착용하라고 하지만 번번이 꼈다 벗었다 할 만큼 여유롭지 않다. 용기에 반찬을 담고 나면 라벨을 붙인다. 라벨 프린터 저울에서 상품명과 무게에 따른 가격이 인쇄된 라벨을 출력해 용기에 부착하는 일이다. 상품코드를 입력하면 상품명이 뜨는데, 70~80가지에 이르는 코드 번호를 찾아가며 입력해야 한다. 시간이 걸린다. 조리실에서 연신 쏟아져 나오는 반찬이 줄을 서서 포장을 재촉한다. 코드표에서 번호를 찾고, 반찬이 든 용기를 올린 다음, 출력된 라벨을 붙인다. 석 달쯤 지나자 주요 품목의 코드를 외울 수 있게 됐다. 반찬가게 ‘경력’이 붙은 셈이다. 반찬을 담을 때는 부담 없는 가격이 되도록 요령껏 양을 조절한다. 나물류는 삼천 원이 넘으면 잘 안 팔렸다. 매장의 위치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동네 주민 살림살이가 반찬 가격과 연동되는 것이다. 내가 일하던 매장에선 도라지 무침은 잘 팔렸지만, 더덕무침은 재고가 많았다.


 구인공고에 있던 ‘중식비 지급’대로 점심 값을 받고 싶다는 내 요청은 조리장의 부드럽지만 거침없는 한마디로 묵살되었다. “여기 널린 게 반찬이잖아요, 밥만 하면 되는데.” 조리장의 말은 점장도 무시하지 못한다. 점심밥은 함께 먹는다. 주방에 있는 스테인리스 조리대에 빈자리를 만드는 동안, 조리장이 매장을 돌며 유통기한이 ‘오늘까지’인 반찬 중 몇 가지를 골라 가져온다. 그날의 점심 메뉴다. 15분 남짓 둘러선 채 먹는다. 처음엔 내가 ‘잔반처리기’ 같다는 생각에 젓가락이 잘 가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새 나부터 ‘오늘까지’ 반찬을 골라 집어 들게 됐다. 재고에 대한 점장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 내 뱃속에라도 쓸어 넣자는 생각에서다. 진짜 ‘잔반처리기’가 됐다. 오전 조가 정신없이 포장을 하고 나면, 마감 조가 출근한다. 남은 포장과 판매, 청소, 마감 정산을 한다. 혼자 포장하며 판매까지 하려면 동동거리며 뛰어다녀야 한다. 매장을 끊임없이 흔들어대는 ‘신나는 가요 메들리’가 어거지로 아드레날린을 유도한다. 


 매장 입구에 그가 나타났다. ‘단골 환불러’다. 사간 지 사흘이나 지난 시금치나물이 짜다며 환불해 달란다. 목소리가 자신만만하다. 내 몸에 사리가 생긴다. 카레도 먹다 가져오고, 김도 포장을 뜯어 가져온다. 배추김치가 두껍다고 환불해 달라고도 한다. ‘맞짱’ 뜨려니 동료가 말렸다. 한 번은 이웃 매장에서 환불을 거절했더니, 본사에 민원을 넣고, 대표에게 사과를 요구하며, 말 그대로 쌩 난리를 쳤는데, 곰탕 한 박스를 받고서야 간신히 마무리되었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진상 손님은 당장엔 매출 손실이지만 업주가 겁을 내는 건 소문이다. 이웃이나 SNS를 이용해서 매장에 대한 악플을 뿌리면 문 닫는 건 시간문제라고 한다. 구청에 식품위생 검사를 하도록 민원을 넣는 일도 다반사라 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거”라며 동료가 씁쓸히 웃었다. ‘똥’ 대접받는다는 걸 알려나. ‘저렇게 살진 말아야지.’ 다짐하게 하는 반면교사였다.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나와 달리 경력자인 둘은 일도 손에 익었고, 신경 써야 하는 일과 무시해도 좋을 일을 확실히 구분했다. 책임져야 하는 일은 가급적 하지 않으려 했다. 재료 입고 결제나 마감 정산에 민감했다. 단돈 십 원이라도 차이가 나면 제 주머니를 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외의 것들엔 그저 문제만 생기지 않으면 된다고 내게 ‘가르쳐’ 줬다. 




 영업을 시작한 지 두어 달이 지나면서 매출이 줄기 시작했다. ‘오픈 빨’이 떨어진 거다. 손님이 계산대 앞에 줄을 설 정도로 매출이 많아야 이문이 남을 규모의 매장이었다. 마감 근무를 기다릴 만큼 저녁 시간이 한가했다. 근무 경험이 많은 동료는 매장 위치가 영 아니랬다. 유동인구는 많아도 술집과 쇼핑몰이 대부분인데 누가 술집 가면서 반찬을 사겠느냐는 거다. 고등어조림 봉지를 손에 든 채 옷 사러 가지는 않을 거라며 손사래를 쳤다. 게다가 매장 월 임대료가 천만 원을 훌쩍 넘는다고 했다. 투자자가 계속 손해를 보고 있을 거라고도 했다. 조리장이 자주 바뀌었다. 당연히 맛도 바뀌고 그나마 주기적으로 오던 손님도 발길이 뜸해졌다. 월급이 밀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보름 정도 늦게, 다음엔 한 달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점장은 나타나지 않았고 본사 전화기는 먹통이었다. 일자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마감 조였던 날 아침, 오전 조가 전화를 했다. 매장이 ‘오늘까지’만 영업을 한다는 거였다. 헝클어진 머릿속으로 서둘러 매장으로 갔다. 주방엔 조리장만 멀뚱한 얼굴로 왔다 갔다 하고, 판매 팀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점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매장은 폐업하기로 결정됐다, 필요한 반찬 있으면 가져가도 된다, 출입구에 폐업 공지문을 붙여 달라, 금전 등록기는 그대로 둬라, 궁금한 건 본사와 이야기하라 등등을 순식간에 쏟아내고 끝이었다. 이런 걸 뒤통수 맞았다고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느닷없이 잘렸다. 나름 적응하고 있었는데. 늙어 죽을 때까지 이 일을 하려는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끝이 날 줄은 몰랐다. 며칠 지나 사정을 알아보니, 본사의 지나친 사업 확장으로 부도가 난 거였고, 위촉 직으로 계약된 나 같은 판매직은 안중에도 없는 상황이었다. 대표는 이미 여러 매장 업주와 직원으로부터 고발당한 상태였다. 동료들과 만나 대책을 의논한 후 며칠 지나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나를 제외한 둘이 다른 매장에 자리를 얻어 다시 일을 시작한 것이다. 나중에, 그들이 점장과 만나 일자리를 알아봐 주면 임금체불로 고발하지 않겠다고 했다는 걸 알게 됐다. 의논할 땐 고발하자고 했었는데…. 나도 그들처럼 ‘협상’을 했어야 했나 싶었다. 그들은 내게 “그렇게 됐다, 힘내라.”라고 했다. 잘 지내고 있었다고 여겼는데 두 번 뒤통수를 맞으니 물정 모르는 내가 오히려 한심했다. 하긴 밥벌이 앞에서 의리를 들먹이는 자체가 우스운 건지도 모른다. 정글 같은 세상이었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 


 인터넷을 뒤져 방법을 찾았다. <고용노동부>가 화면에 등장했다. 찾아가 상담을 기다리며 다른 이의 사정을 귀동냥으로 들어보니 대부분 비슷했다.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육 개월씩 임금을 못 받으면 뭘 먹고살라는 말일까, 저이는 어떻게 버티고 있는 걸까. 목구멍은 잔인하다.’ 두서없는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했다. 대표를 고발하면 폐업 위로금을 받을 수 있지만 액수가 적은 데다, 절차나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며 그나마 업주가 폐업 진행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지급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급여를 받던 나만 실업자가 되고 마무리가 되는 것이다. 상담 사무관은 애매한 부분이 많은 법의 사각지대를 업주들은 ‘귀신같이’ 모두 알고 있다며 포기하는 게 맘 편할 거라 했다. 어떻게 해도 맘은 편하지 않을 거 같은데. 그는 <근로복지공단>에서 도와줄 거라 했다. 공단 담당자는 내 서류를 보더니 사업주의 일방적 폐업이니 실업급여 신청이 가능하다고 했다. 이번엔 <고용복지센터>. 실업급여 신청을 했다. 3개월 수급자격을 받았다. 실업급여와 부정 수급 시 불이익에 관한 일장 연설도 들어야 했다. 실업자가… 정말 많았다. 여기가 ‘뉴스 현장’이었다. 4대 보험가입이 되어 실업급여 신청을 할 수 있으면 다행이다. 하루에도 수십수백의 사업장이 문을 닫고 멀쩡히 일하던 노동자는 졸지에 실업자가 되는 세상이다. 고용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영세 사업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아무런 보호막이 없다. 가입되어 있어도 계약기간이 정해지지 않은 경우엔 그만두더라도 비자발적 퇴사에 해당되지 않아 혜택을 못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 경우처럼 ‘정당한 이직 사유’가 아니면 실업급여를 신청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사계절 내내 정장을 입어도 더운 줄도 추운 줄도 모르는 여의도 정치인들은 이 사정을 알까. 그래프로 나타나는 실업 상황이 아닌, 실제 현장을 안다면, 그래서 서민의 사는 형편을 개선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온갖 명목의 영역다툼에만 관심을 쏟을 순 없다. 그들은 다른 세상에 산다.


 최소 월 2회의 구직 신청 이력을 증명하면 실업급여가 통장으로 들어왔다. 한 달 동안 세 군데 기관을 찾아다닌 끝에, 수십 년 세금 낸 이래 처음으로 국가의 재정지원을 받았다. 일자리를 잃었다고, 도와주지 않으면 생계가 막막하다고 증명해야 하는 지원이었다. 어쩐지 계속 받고 싶지는 않았다. 


 매장이 있던 곳을 가끔 지나간다. 그 자리에 유명 브랜드 신발가게가 들어섰다. 신발을 몇 켤레나 팔아야 월세 내고, 직원들 월급 주며, 이익이 나려나 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 본다. 쥐가 고양이 생각하는 셈. 수급기간이 끝날 때까지 일을 구하지 못한 나는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했다. 지금은 다시 일을 하고 있지만 통장은 여전히 마이너스 상태다. 비우는 인생을 살라는데 비우다 못해 마이너스가 됐다.

작가의 이전글 외식하는 여자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