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미아 Aug 09. 2022

아이는 네 시 반에 집에 온다.

오늘 아침 여덟 시 무렵 나는 아이를 말아 싸서 어린이집에 보냈다. 원내에서 물놀이를 한다고 해서 여벌 옷을 어린이집 가방에 넣어 주었다. 나는 씻은 후 논술학원으로 가서 원장 선생님과 상담했다. 지병이 심해져서 몇 달 일을 쉬겠다고. 원장 선생님은 꼭 다시 연락 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염치 없지만 그렇게 말해 주는 원장 선생님이 참으로 고마웠다. 외주 일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고, 나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거실 바닥에 던진 후 조금 읽다가 점심으로 햄버거를 먹었다. 오아시스를 배경 음악으로 계속 듣고 있다. 나는 나를 찾아가고 있다. 본래 내 모습이었던 것, 본래 내 것이었던 일상들을 되찾는 중이다.


아이는 네 시 반에 집에 온다. 정확히는 그즈음 조금 넘어서. 나는 네 시 반에 아이를 '찾으러' 간다. 아이는 몇 달 새에 부쩍 컸다. 키가 몇 달 전보다 몇 센티나 자랐다. 아이가 자라나는 게 영 익숙지 않다. 내 기억 속의 딸은 언제나 이혼 직전, 그 조그맣게 떨던 만 한살배기 아기로 인식된다. 남편과의 잦은 싸움 속에서 영문을 모른 채 우리를 바라보던 그 아이, 그 아이가 벌써 네 살이다. 아이는 말도 엄청 늘었다. 며칠 전에 아이는 이런 말을 했다. "아무리 OO이가 귀여워도 얼굴을 함부로 만지면 안 돼!" 어린이집에서 뭔가 행동 지침에 대해 배운 것을 응용해서 써먹은 것 같은데, 정말 고차원적인 문장 구사라 놀랐다.


네 시 반에 오는 내 딸은 양갈래 머리가 잘 어울리는 귀염둥이이다. 나는 평범하게 생겼다. 눈도 코도, 입술이 조금 도톰하다는 것을 빼면 평범한, 흉하지는 않은 얼굴. 전 남편은 눈이 정말 크다. 얼마 되지는 않지만 내가 태어나서 가장 잘한 것들 중 하나, 내 딸 하나 잘 빚어서 낳은 것. 유전자 조합이 기가 막히게 되었다. 남들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객관적 통계를 근거로 한다, 다들 이쁘다고 하니까!) 내 눈에는 정말 너무 너무 예쁜 딸. 쌍꺼풀 없는 큰 눈에 오밀조밀한 코, 입, 그리고 끝내주게 이쁜 뒤통수. 오리궁뎅이인 아빠를 닮아 엉덩이도 예쁘다. 딸은 희미하게 나를 닮았고 전 남편을 진하게 닮았다. 딸의 톡 튀어나온 이마를 볼 때마다 전 남편이 생각난다.


네 시 반에 오는 내 딸은 조울증을 앓는 엄마를 두고 있다. 여름 내내 정신을 못 차리고 휘청거렸던 한 여자를 엄마로 두고 있다. 그 여자, 나는 이번에 병원을 옮긴다. 이번 주 금요일에 간다. 상담 선생님은 내게 입원을 권유하셨다. 입원하면, 딸은 누가 보나. 엄마 아빠가 봐야 할 텐데 그걸 내가 어떻게 시키나. 나는 버티고 있다. 이렇게, 딸을 회상하는 글을 쓰면서, 마치 아침 여덟 시마다 딸을 잃어버리고 네 시 반에 딸을 찾는 것처럼, 내 삶 속에 영속되지 못한 무언가에 대한 그리움을 풀어놓는 것처럼, 아련하게, 있어보이게, 회한 넘치게 쓰고 있다. 병증은 쉬이 낫질 않는다. 나는 또 뭔갈 쓴다. 그리고 지운다. 그리고 다시 쓴다.


네 시 반에 오는 내 딸은 조울증을 앓는 엄마를 두고 있음에도 무럭무럭 커가고 있다. 친아빠와 떨어져 있음에도 무럭무럭 커가고 있다. 물을 잘 주지 않아도, 손이 많이 가지 않아도 어느새 살펴보면 커져 있는 다육이처럼 내 딸은, 네 시 반에 어린이집에서 오는 그 딸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고 있다. 어찌 인간이 보살핌 없이 크겠냐만은, 어찌 내가 하는 것에 일말의 고생도 없겠냐만은, 내 딸은 나의 방종함과 게으름과 불안정함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잘 자라나고 있다. 엄마는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뒤를 돌아보면 이 작은 인간은 제 길을 뚜벅뚜벅 걷고 있더라 이 말이다. 작은 발을 놀리면서, 구렁텅이는 요리조리 피해 가면서, 거미나 사마귀를 마주치면 화들짝 놀라 뒤로 피하면서, 꽃을 보면 향기를 맡으면서, 그렇게 뚜벅뚜벅 제 작은 길을 걷고 있더라 이 말이다.


정신병증이 있는, 지금도 크게 록을 들으며 글을 쓰는, 방종하고 게으르고 불안정한 이 여자는 딸 하나가 있다. 네 시 반이면 집에 오는 귀여운 딸이 있다. 나는 그 아이를 씻기고 먹이고 재워야 한다. 내 불안이 전이되지 않도록 최대한 목소리를 다정하게 내야만 한다. 나는 그 아이의 모범이 되진 못하더라도 그 아이에게 이상 징후를 보여서는 안 된다. 연극이라도 좋다, 아이가 안정되게 클 수만 있다면. 내 흉한 꼴을 보이지 않을 수만 있다면. 아이의 세상에 하나의 검댕이라도 덜 묻힐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나를 찾아가고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라는 책도 그래서 선택한 것이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면서, 그 제목에 이끌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송두리째 빼앗긴 내 여름을 되찾고 말 것이다.


네 시 반에 오는 딸을 찾으러 가야지. 콧노래라도 부르면서. 가는 길에 사탕이라도 하나 사서 달랑 들고. 짠! 하고 딸에게 보여 주며 놀래키면서, 그 작고 따뜻한 몸을 안아주어야지. 엄마! 하고 부르는 그 사랑스러운 존재를 꽉 안아주어야지. 네 시 반이면 되찾게 되는 아이와의 시간을 소중히 여겨야지. 그 아이를 방치하지 말아야지. 그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지 말아야지. 그 아이를 사랑해 주어야지. 그 아이가 날 쳐다볼 때 나도 끈질기게 쳐다봐 주어야지. 그 아이가 웃을 때면 온 사방에서 울려퍼지는 천국의 노래, 그 울림을 즐겨야지. 그 아이가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생떼를 쓸 때는 가만히 바라봐 주어야지. 그러고는 곧바로 안아 주어야지. 그렇게 해야지. 몇 달을 병증에 시달린 이 엄마는 그것밖에 해 줄 게 없지. 네 시 반에, 널 찾으러 갈게.

작가의 이전글 아이의 작은 밥상을 보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