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장군청을 지나니 주유소다. 길은 이 곳에서 갈라진다. 첫 번째 길은 오르막길로 이어지는 해파랑길. 이 길을 따라가면 해안가를 돌고 돌아 산 하나를 넘어 내일 해운대에 도착한다. 두 번째는 시내를 가로지르다 달맞이길을 넘어가는 길. 이 길을 따라가면 오늘 해운대에 도착한다.
이 지점에서 결정하자고 했었다. 해파랑길을 따라갈지, 시내를 가로질러 갈지에 대해. 더스틴은 어느 길로 갔을까. 아직 화가 나 있을까. 풀릴 수 있는 화일까. 내가 그렇게 이성을 잃고 소리를 빽빽 지르다 혼자 가버렸는데. 이대로 끝을 내더라도 한 번은 만나야 하니, 나를 만나기 위해 내가 갈 만한 길로 갔겠지. 그렇다면 내가 갈 만한 길은 어디인가? 나는 해안가와 산을 돌고 도는 해파랑길을 따라갈 사람인가? 아니면 시내 길을 가로질러 갈 사람인가?
모르겠다.
내가 원하는 것도 모르겠고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다. 이 먼 길을 걸어왔건만, 아무것도 모르겠다. 안다고 생각했던 것도 모르는 것이 되어버렸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모르겠다. 나는 해파랑길로도, 시내 길로도 갈 사람이 아니다. 더스틴에게 결정을 미룰 사람이다. 혹시 모를 예외와 돌발상황이 벌어질 경우 그를 탓하기 위해.
해파랑길로 이어지는 길 초입에는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다소 포기한 상태가 되어 정류장 벤치에 앉았다. 시선을 둘 곳도, 생각을 둘 곳도 없어 고개를 숙인 채 까만 등산화에 시선을 꽂았다. 깨진 도로 사이로 연두색 풀잎이 3cm 정도 크기로 솟아 있었다.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등산복을 차려입은 50대 아주머니 아저씨가 보였다. 거 흑돼지집 가서 밥 먹을까? 아 왜 괜시리 돈을 써? 집에 가서 조기 찌개나 끓여 먹어. 소주도 한 병 까고.
아주머니의 선홍색 셔츠를 흘끔 훔쳐보다 오른손으로 왼손 약지에 끼워진 결혼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아저씨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더니 받지 않는다며 끊어버렸다. 지금이다. 전화를 빌리려면 지금이 가장 자연스럽다. 나는 태연한 척 등산화를 신은 두 발을 출렁대다, 머리를 만지작거리다, 아줌마를 흘끔 바라보다, 왼쪽으로 이어지는 먼 길을 바라봤다. 작은 마을버스가 오더니 아줌마 아저씨를 태우고 떠나버렸다. 해파랑길로 이어지는 길의 지평선 너머로.
벤치에서 일어났다. 다시 양 갈래 길에 섰다.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아무 곳으로도 갈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니까.
다시 생각해보자. 그는 어디로 갔을까. 맥도날드. 맥도날드 얘기를 했었어. 기장군청 근처에 맥도날드가 있다고. 거기에 있을거야. 그를 찾자. 나는 버스가 떠난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주유소 정문. 이번에는 꼭 용기를 내야 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주유소의 차가운 철문을 열었다. 아주머니 한 분이 계신다. 카운터에는 노란색 유선 전화기가 놓여있다.
“저기….”
“네?”
“저 그게…. 죄송한데 전화 한 통만 쓸 수 있을까요.”
“아. 응 그래요 그래. 편하게 써요.”
다행이다. 수화기를 들고 내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익숙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야?”
“넌 어딘데?”
“어딘지 빨리 말해. 다른 사람 전화 쓰고 있어.”
“맥도날드. 돈이 없어.”
“뭐라고?”
“돈이 한 푼도 없다고.”
전화를 끊었다. 원치 않는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역시 맥도날드에 있구나. 참 너답다. 전화 연결이 안 되었어도 나는 너를 찾았을 거다. 나는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아니까. 뭘 원하는지 아니까.
“저 죄송한데…. 맥도날드가 어느 방향인 줄 아세요?”
이 길로 직진해서 길 건너면. 좌회전 한 번 하면 보일 거예요. 주유소에서 나와 아주머니의 말을 되새김질하며 길을 걸었다. 직진. 길 건너기. 좌회전. 익숙한 노란 M자가 보였다. 더스틴이 앉아있을 2층 창가를 바라봤다. 다시 원치 않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안돼. 웃으면 안 돼. 끝장을 봐야 해.
테이블에는 빅맥 반 조각이 놓여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빨대로 사이다를 한 모금 빨았다. 더스틴은 오랜 옛날부터 같은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갓 빗은 듯 가지런한 짙은 눈썹 아래 깊은 두 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나는 앞에 놓인 휴지를 반으로 찢었다. 반으로 찢은 휴지를 가지런히 모아 또 반으로 찢었다. 또 반. 또 그 반의반. 그 반의반의 반의반.
“그래서?”
더스틴의 앙다문 입술이 움직였다.
“뭐가 그래서야.”
“피하지 말고. 아까 말한 거 진심이야?”
반의반의 반의반의 반. 반의반의 반의반의 반, 반. 나는 더는 반으로 쪼개질 수도 없이 작은 휴짓조각들을 모아 음식이 놓은 쟁반 위로 던져버렸다. 눈을 들어 더스틴을 바라봤다. 흔들리지 않는 더스틴의 두 눈이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 버튼이 눌린 기계처럼, 내 아랫입술이 자동으로 삐쭉 튀어나왔다.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진심이었나. 아까 내가 한 말. 그만하자는 말. 이혼하자는 말.
이런 식으로 끝날 줄은 몰랐다. 한국을 떠나려고 시작한 여행이 더스틴을 떠나는 일로 끝날 줄은.
우리는 한국에 지쳐 있었다. 그의 고향인 미국으로, 그게 아니라면 제 3국으로 조만간 떠나자 싶었다. 떠나기 전에 한국과 작별 의식을 치르고 싶었다. 그래서 걷기로 했다. 철원에서 부산까지 800km. 내가 태어나고 자란 한국을 걸음으로써 나를, 한국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그래. 애초의 목적은 그거였는데. 새로운 시작을 위한 여행이었는데.
아니. 아직 결론은 나지 않았다. 아직 하루만큼의 걸음이 남아있다. 널브러진 휴짓조각들 위로 햇살이 비췄다. 눈가에 통증이 오더니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늘만 더 걸어내면 여행의 끝이다. 우린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