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렇게나 쓰는 소설
사건이 일어났을 때, 홍보팀 직원 네 명은 다음 날 행사용 짐을 하나씩 들고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 있었다. 짐들을 업무용 차량 트렁크에 싣고 사무실로 다시 올라가 내일 오전에 있을 리허설을 위한 마지막 정리 회의를 할 참이었다.
그런데 지하 주차장의 전등이 모두 꺼진 것이다.
“어? 뭐지?”
팀장인 최진석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최진석이 갑자기 멈춰 선 바람에 커다란 상자를 들고 그의 뒤를 쫓고 있던 이현식 대리가 최진석과 충돌했다. 이현식이 들고 있던 짐들이 바닥으로 우르르 떨어졌다. 아크릴 표찰, 가위, 커터칼, 자, 계산기 등이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각종 문구가 인쇄된 A4 용지 수십 장이 춤을 추듯 허공 위를 떠돌며 약간의 바람을 만들어냈다.
“지구 멸망?”
핸드폰을 확인한 진수현 대리가 중얼거렸다. 긴급 재난 문자가 와 있었다. ‘지구 멸망 수준에 이를 수 있는 대형 재난 상황 임박. 다음 안내 시까지 외출 금지’라는 내용이었다. 어디선가 요란스러운 사이렌이 울리더니 금세 사그라들었다. 핸드폰이 밝히고 있는 진수현의 얼굴에는 신경질이 가득했다. 내일 행사의 담당자인 진수현은 지하 주차장에 내려오기 전부터 이미 잔뜩 짜증이 난 상태였다. 짜증이 날 만도 했다. 행사가 하루 앞인데 참석자가 분 단위로 바뀌질 않나, 업체가 자료집을 잘못 인쇄한 채로 달해오질 않나, 그깟 거 하나 업체가 알아서 해결 못해서 진수현이 인쇄소 공장 사장에게 전화해 제발 오늘 중으로 다시 제작해 달라고 사정을 해야 하질 않나, 팀장 놈은 하는 일도 없으면서 시도 때도 없이 시답잖은 일이 생길 때마다 진수현을 찾아대질 않나, 멍청한 이현식은 짐 하나 옮기랬더니 그거 하나 못해서 이렇게 다 내동댕이쳐버리질 않나. 근데 지금은 또 뭐? 지구 멸망?
“멸망 뭐? 그게 뭔 소리예요?”
짐을 실은 접이식 운반 카트를 끌고 오던 홍선미 주임이 물었다. 다들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홍선미가 핸드폰을 꺼냈다.
“어 뭐야? 진짜네?”
홍선미의 목소리가 커졌다. 홍선미가 인터넷에 접속해 봤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카카오톡을 열었다. ‘ㅋㅋㅋㅋ’라고 적힌, 읽지 않음으로 표시된 친구의 10분 전 메시지가 제일 위에 있었다. 채팅창을 열고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내봤다. 가지 않았다.
“지구 멸망이라는데요 팀장님. 그럼 내일 행사는 어떻게 되는 거죠?”
진수현이 최진석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몇 달 내내 신경 쓰던 행사가 코앞인데, 이제 다 됐는데, 무사히 치를 일만 남았는데, 뭐? 지구 멸망? 아니 그리고 멸망이면 멸망이지, 멸망했다는 것도 아니고, 멸망한다는 것도 아니고, 멸망할 수준에 이를 수 있다니. 뭐 이런 이도저도 아닌 개떡 같은 재난 문자가 다 있단 말인가? 이거 누가 쓴 거야? 담당 기관이 어디야? 전화가 터지는 대로 당장 전화해서 미친 듯이 따져야지. 그러니까 행사를 하라는 거냐고 말라는 거냐고? 지구 가 멸망할 수 있으니 그만둬? 아니면 지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계속 준비해? 진수현은 핸드폰을 냅다 집어던지고 바닥에 드러누워 악! 하고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홍주임이 위에 한 번 올라가 봐요. 무슨 일이 있나.” 최진석이 말했다.
“... 네?”
홍선미는 카트 손잡이를 꼭 잡은 채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최진석은 틈만 나면 홍선미를 비서처럼 부려먹었다. 제 점심 약속, 저녁 약속, 술 약속 식당 예약을 시키는가 하면, 문서 복사 같은 자잘한 일부터 사장에게 보고할 보고 문건 작성 같은 큰일까지 홍선미에게 시키곤 했다. 최진석의 업무 스타일이라면 스타일이었다. 손 빠르고 일머리 잘 돌아가면서도, 소심해서 반항은 잘하지 않는 직원을 한 명 점찍어서 제 비서처럼 부려먹는 것. 홍보팀에서는 그게 바로 홍선미였고, 최진석은 하루 에도 몇 번씩, 시도 때도 없이 홍선미를 불러댔다.
“.... 싫어요.”
홍선미가 말했다. 어둠에 싸인 홍선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싫다, 는 말만 차가운 강철처럼 홍선미와 최진석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최진석은 당황했다. 그리고 후회했다. 홍선미가 아니라 이현식에게 시켰어야 했다. 홍선미가 자기에게 싫다는 말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최근 들어 낌새는 있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 하던 홍선미가 최진석에 대한 불만을 소심하게나마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일단 얼굴 표정이 달랐다. 뭘 시킬 때마다 얼굴이 뾰로통했다. 홍선미가 최진석에 대한 험담을 하고 다닌다는 얘기도 귀에 들어왔다. 그렇다고 면전에 대고 싫다는 말을 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 빌미를 준 것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뭔가를 시킴으로써 말이다. 지구 멸망이라는 이판사판의 상황은 평소에 하지 못하던 싫다는 말을 하기에 가장 좋은 빌미 아니겠는가?
“뭐.... 싫어? 아.... 참.... 허이고 참.... 뭐 그럼.... 이현식 대리가 한 번 나가보죠?”
이현식은 최진석의 두 번째 비서였다. 다만 이현식은 홍선미만큼 빠릿빠릿하지 않아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최진석이 자주 찾지는 않았다. 병따개가 있는데 굳이 숟가락으로 병을 따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이현식의 장점은 홍선미보다 더욱 소심하다는 것이었다. 홍선미는 (최근 들어서지만) 이따금 표정 등으로 싫은 티를 냈지만 이현식은 아니었다. 최진석이 왼쪽으로 밀면 왼쪽으로 가고, 오른쪽으로 밀면 오른쪽으로 가는 사람이었다. 제가 스스로 계획을 짜서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가지는 못해도.
“아.... 제.... 제가요?.... 저는....”
이현식이 우물쭈물하며 말을 더듬었다.
“저기요 최팀장님. 왜 그런 걸 직원들한테 시켜요? 지금 이 상황에 팀장질이 하고 싶어요? 팀장질을 하고 싶으면 내일 행사 어떻게 할지나 결정하시든가요.”
진수현의 신경질 난 목소리가 어둠을 다 찢어버릴 듯 뾰족하게 터져 나왔다. 최진석이 다시 한번 당황했다. 진수현은 평소에도 최진석에게 할 말 다 하는 스타일이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까지는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팀장질'이라니... 최진석은 차라리 전등이 나간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당황한 모습을 직원들에게 보이면 더 쪽팔리니까.
“맞아요, 팀장님.... 위에 올라갔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알아요? 팀장님도 무서워서 못 올라가는 거면서.... 그러면서 왜 저한테 가라고 그러세요? 정말.... 진짜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저는 그냥.... 그냥 막, 어? 막 없어져도 되는 사람이에요? 제가 무슨 팀장님 비서, 아니 노예예요?”
홍선미가 울먹이며 말했다. 최진석은 전등이 나간 건 다행이지만 지구가 곧 멸망할 수 있다는 건 정말 안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않았어도 이것들이 팀장을 이렇게 막대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성과평가도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
“아니 나는.... 아 근데.... 그래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확인은 해봐야지. 그러니까 우리 이현식 대리가....”
“아니 팀장님! 왜 그런 위험한 짓을 직원들한테 시키냐고요! 지구가 멸망할 수도 있다는데, 이 상황에서 팀장이고 뭐고 다 무슨 소용이죠? 행사 준비 할 때도 내내, 어? 몇 개월 내내 상황 파악 못하고 우왕좌왕하더니 여기서도 그럴 거예요? 상황 파악 안 돼요? 아니, 한 번 팀장은 영원한 팀장이야 뭐야? 그렇게 궁금하면 당신이 나가시든가!”
진수현이 소리를 꽥, 질렀다. 진수현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행사 준비로 쌓인 스트레스는 행사가 끝남으로써만 풀리는 것이었는데, 지구가 멸망한다면 행사는 열리지 않을 것이었고, 고로 진수현의 스트레스는 영영 풀리지 않을 것이었다. 따라서 지구는 멸망하지 않아야 하고 행사도 열려야 했다. 아직 희망은 있었다. 진수현은 아까 읽은 재난 문자를 곱씹어 봤다. 지구가 멸망한다고 확정된 건 아니었어. 멸망 수준에 이를 수 있다는 거지.... 그러니까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는 거잖아. 머리가 아파왔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진수현을 자주 찾아온 익숙한 두통이었다. 두통과 함께 자질구레한 챙길 거리, 그리고 걱정거리들이 떠올랐다. 자리 배치 변경안도 보고해야 하고, 사회자 멘트에서 참석자 변경 사항도 수정해야 하고.... 사람들이 재난 문자 받고 몸 사리느라 행사에 덜 오면 어떡하지? 너무 텅텅 비면 모양새가 안 좋은데.... 참석 독려 전화를 돌려야겠다. 자리 배치도 다시 해야 하는 건가? 시나리오도 다시 확인해야겠고, 인쇄소에 다시 맡긴 자료집 시안도 확인해야 하고 또.... 뭐가 있더라. 아, 까먹기 전에 USB 챙겨야지.
진수현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최진석은 아무 말 없이 주차장 구석 자리로 갔다. 말은 없었지만 소란스러운 발걸음이었다. 제 몸이 천근만근이라도 되는 듯 터덜터덜, 두 발을 질질 끌고 가던 최진석은 다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크게 푹 쉬더니 구석에 쭈그려 앉았다. 삐진 것이다.
진수현은 그런 최진석을 내버려 두고 핸드폰 불빛으로 바닥을 비추더니 어디론가 걸어갔다. 진수현 핸드폰의 작은 불빛이 춤을 추듯 총총거리며 비상계단 쪽으로 이어졌다. 진수현은 사무실로 가 USB를 챙겨둘 참이었다. 만약 유선 전화가 된다면 업체와 인쇄소 쪽에 전화도 넣어둬야겠다고, 진수현은 생각했다.
홍선미는 최진석에 대고 처음으로 한 반항에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다면, 최진석을 상대로 직장 내 괴롭힘 신고를 하리라 다짐했다.
어둠과 적막이 속에서, 이현식이 바닥에 나뒹구는 잡동사니들을 상자에 주워 담는 소리만 잔잔히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