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렇게나 쓰는 소설
건명: 세현 무역상사 상해 사건 피의자 참고인 조사
사건경위: 세현 무역상사 총무팀 이진아(38)가 2024년 1월 8일 오후 6시경 사무용 가위로 같은 팀 팀장인 노일환 (52)의 입술 오른쪽 상단 약 1cm 부위를 찌름. 노일환을 경상을 입어 인근 지혜병원에서 처치를 받고 입원하여 안정을 취하는 중임. 이진아는 노일환에게 상해를 입힌 이유와 목적 등에 대해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음. 다음은 참고 인 조사 속기록 중 주요 내용을 정리한 것임.
ㅇ 유명희(48), 세현 무역상사 총무팀 주임. 이진아와 같은 팀에서 1년 근무.
- 질문: 이진아와의 관계는 어땠나?
진아샘요? 글쎄... 제가 우리 팀장님이랑도 그렇고, 팀 사람들이랑 다 좋게 지내요. 제가 사람들이랑 맛있는 거 먹으면서 수다 떨고 그런 거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집에서 먹을 걸 자주 싸와요. 오늘도 챙겨 왔는데. 팀에 이런 일이 있고 해서...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겠어. 아휴, 우리 팀장님은 그런 일 당해 가지고 입원까지 하시고... 그래서 고구마 삶아왔잖아 내가. 삶아만 왔나? 생고구마도 다 씻어가지고 껍질 까고 해서 잘라오고. 생고구마 깎고 자르고 하는 게 손이 얼마나 많이 가는 일인지 아시죠? 근데 내가 아무리 그래도 진아샘은 늘 별 반응이 없어. 거들떠도 안 봐. 한 번을 안 먹더라고, 한 번을. 아니, 내가 나 좋으라고 이런 거 하나? 다 같이 좋자고 하는 거지. 그리고 안 먹더라도, 사람이 말로만이라도.... 고생했다, 손 많이 가는 일인데 참 대단하다.... 뭐 그런 말 한마디 정도 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내가 그런 말 듣자고 하는 건 아니지만.... 하여간 사람이 좀, 너무 차.
ㅇ 박종석(46), 세현 무역상사 총무팀 차장. 이진아와 같은 팀에서 2년 근무.
- 질문: 평소 이진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나?
이진아 씨요? 어차피 계약직이라 오래 있을 사람도 아니었는데요 뭐. 신경 안 써요. 근데 이번 일로 더 빨리 잘리게 생겼네, 어? 하하, 참. 하여간 계약직 애들은 속내가 무섭다니까. 은연중에 자격지심도 있고. 계약 연장하거나 정규직 전환돼야 하니까 평소에는 얌전히 있다가, 일이 자기 뜻대로 안 되면 확 돌변하고 그렇다니까요. 걔는 특히 초반부터 좀 애가 글러먹었었어. 아니, 내가 차장이잖아. 근데 딱 보니까 애가 일을 좀 배워야겠더라고. 그래서 내가 팀장한테도 몇 번 얘기를 했지. 이진아 씨 일하는 방식이 좀 아닌 것 같다, 일을 왜 저렇게 하냐. 응? 업체를 좀 휘두르는 맛이 있어야지 질질 끌려다니면서. 근데 이진아가 한 번 나한테 와서, 뭐라더라? 차장님은 왜 본인 업무는 그렇게 펑크 내시면서 맨날 남 평가를 그렇게 하세요? 그러더라고요. 그것도 웃으면서. 하, 참. 그 말하는 본새 좀 봐요. 아니 내가 펑크 몇 번 냈다고 해서, 어? 자기보다 직급이 한참 높은 사람한테 그렇게 대놓고, 어? 뭐, 그러라고 해. 어차피 이 회사에 내가 오래 있지 지가 오래 있나. 아니, 내가 그래도 명색이 차장인데, 계약직 직원이 응? 차장을 그렇게 대하는 게 맞아요? 응? 아 나 참 진짜 어디 싸가지 없이.
ㅇ 최하빈(45), 세현 무역상사 총무팀 차장. 이진아와 같은 팀에서 1년 근무.
- 질문: 평소 이진아와 노일환의 관계는 어땠나?
진아랑 일환? 글쎄요... 뭐, 별 거 없을걸요? 진아는 회사에 남자관계 그런 거 없어. 애가 평범하게 생겼잖아. 남자도 꼬일 사람한테 꼬이는 거지. 아, 남녀관계 물어본 게 아니라고요? 그럼 뭐 글쎄요. 모르겠네. 노일환이라면 나랑 과거가 좀 있지...
그게, 이런 말 제 입으로 직접 하기 좀 뭐 하지만, 그래도 조사에 참고하시라고 말씀드리면... 제가 한 인기 하거든요. 남자 한테고 여자 한테고. 이게 사람이 다 어쩔 수 없는 게, 미모가 되는 사람한테 끌리게 되어있나 봐. 근데 또 내가 미모가 된다고 해서 막 도도하게 굴거나 그렇지 않거든요. 오히려 털털하지. 그런 게 사람들한테 매력으로 다가가는 게 아닐까? 털털하게 딱, 어? 인간 대 인간으로. 그런 거 좋잖아요.
근데 진아 같은 경우는 뭐랄까... 사람이 벽이 있어. 내가 다른 사람한테 하듯 진아야, 진아야 하면서 다가가서 팔짱도 끼고, 어깨동무도 하고, 볼도 꼬집어주고 그래봤는데, 아니.... 너무 딱 싫어하더라고. 뭐라더라, 자기 몸 터치하지 말라던가....
근데 혹시, 진아 집안 좀 조사해 봤어요? 아니 사람 성격이라는 게, 어렸을 때 어떻게 자랐느냐에 영향을 많이 받잖아. 이게 사람 성격이 알고 보면 다 엄마가 어떻게 키웠느냐, 거기에 달린 거거든. 나야 뭐 어렸을 때부터 예쁘다 소리만 듣고 자랐지. 근데 진아는 평범하게 생겨서 애가 예쁨을 못 받고 자라서 저런가 싶기도 하고....
ㅇ 이승미(43), 세현 무역상사 총무팀 대리. 이진아와 같은 팀에서 1년 근무.
- 질문: 평소 이진아의 업무수행 능력은 어땠나?
진아샘 일 너무 잘하죠. 열심히 하고. 이 회사에서 잘 됐으면 싶었는데 이런 일이 생겨가지고...
아 근데... 이런 말 해도 되나? 뭐 사건이랑 관련 없을 수도 있는데 그냥 참고하시라고.... 아니 진아샘이, 가끔 땡땡이를 치더라고요. 어디서 그런 거를 배웠을까? 그런 건 안 좋은 건데...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보잖아요, 안 그래요? 맨날 앉아서 성실하게 일하는 나 같은 사람들이 전화도 받아줘야 되고 또.... 뭐 아무튼. 일주일에 한두 번? 한 시간 정도씩 어딘가로 사라져. 사건이 있었던 날이 월요일이었잖아요, 그렇죠? 그날도 한 5시쯤 어딘가로 사라지더라고요. 민정샘이랑 둘이 놀러 갔나 싶기도 하고.... 작년에는 민정샘, 진아샘, 저 이렇게 셋이 친해서 셋이 놀러 다녔었거든요? 근데 그게 좀 틀어져서.... 아니 뭐 별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민정샘이 자기가 나랑 안 맞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그러다 보니 진아샘도 덩달아 멀어졌죠 뭐.... 어쨌든 가끔 둘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 제가 기록을 남기고는 있는데.... 무슨 기록이냐고요? 아 뭐 그런 게 있어요. 진아샘한테는 말하지 마세요? 민정샘한테도. 이 조사 비공개죠?
ㅇ 서민정(43), 세현 무역상사 총무팀 대리. 이진아와 같은 팀에서 2년 근무.
- 질문: 평소 이진아와의 관계는 어땠나?
저랑 친해요. 진아샘은 뭐랄까... 약간 츤데레 같은 면이 있달까. 진아샘이 말도 별로 없고 잘 웃지도 않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 보기에는 좀 차갑게 느껴질 수 있는데, 친해지면 되게 웃기고 잘 웃기도 하고 그렇거든요. 진아샘이 박종석이랑 최하빈 흉내 낼 때 진짜 웃긴데.. 한때는 진아샘 덕분에 회사 다니는 게 재밌고 그랬는데....
근데 진아샘이 요새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서.... 지난달 회식 때 일이 좀 있었어요. 팀장 놈이 술 취해가지고, 미친 새끼가. 근데 그 새끼가 그때부터 진아를 막 못살게 구는 거야. 일 다 몰아주고. 맨날 진아샘 자리로 와서 무슨 빚쟁이처럼 “그 일 언제 되냐? 언제? 언제?" 이 지랄하고. '언제'라는 단어를 한 천만번은 했을 거야. 그런 뒤로는 진아샘이 말도 더 없어지고, 나한테도 말을 잘 안 하더라고요. 가끔 한참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오기도 하고. 제가 걱정돼서 일부러 말도 더 많이 걸고, 밥도 맨날 같이 먹자고 하고 그랬는데.... 뭔가 고장 난 사람처럼.... 제가 앞에서 떠들고 있으면 표정이 멍한 게 어디 다른 세상 가 있는 사람 같고.... 그게 사람이.... 어느 정도 무뎌야 사회생활이 되잖아요.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진아샘은 좀 예민한 면이 있거든요. 그게 자기한테 칼이 된 거지 뭐....
그날도.... 큰 소리가 나서 보니까 진아샘이 화장실 쪽으로 뛰쳐나가고 있더라고요. 따라가 보니 문 잠그고 막 통곡을 하고 있는 거야.... 그날은 말도 못 붙이고... 한참 뒤에야 물어봤어요, 그날 왜 그랬냐고. 그랬더니 대답을 안 해... 그냥 또 그 고장 난 것 같은 멍한 표정으로.... 뭐에 씐 사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