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렇게나 쓰는 소설
“이리 좀 나와봐.”
베란다와 방이 연결된 창문 사이로 정미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도현은 미동도 하지 않고 소파에 몸을 구기고 앉아 리모컨으로 텔레비전 채널을 계속 돌렸다. 드르륵. 활짝 연 창문 뒤로, 목이 늘어난 회색 티셔츠를 입은 정미의 상반신이 드러났다.
“야! 좀 나와 보라고!"
그제야 정미를 돌아보는 도현의 얼굴은 멍했다. 주말이 되면 꼭 저런 얼굴을 하고 있다고, 정미는 생각했다. 속 안에 든 무언가가 바짝 다 말라버린 눈빛으로, 수백 개의 채널 중 하나를 보듯 정미의 얼굴을 바라보는 도현. 정미는 그런 도현의 얼굴을 찰싹 때려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뭐?"
“아 몇 번을 말해? 주말마다 무슨 티브이 좀비야 뭐야? 베란다로 좀 나와보라고.”
“아 왜. 그냥 말로 해. 뭔데.”
“아 잔말 말고 그냥 나와!”
도현은 무거운 배낭이라도 멘 듯 제 몸을 질질 끌며 베란다로 나갔다. 강한 햇살이 도현의 몸을 덮쳤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있었다. 창 밖에서는 수개월 만에 봄 햇살을 받아 신이 난 아이들과 강아지들이 주차된 차들 사이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개나리 나무에는 벌써 꽃봉오리가 돋아나고 있는지 노란색 빛이 언뜻언뜻 비추는 듯했다. 활기차고 따뜻하고 긍정적인 봄기운에, 도현은 괜히 더욱 짜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저 테이블, 주워오게.”
정미가 주차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차들이 잔뜩 주차되어 있는 쓰레기장 한쪽에는 책장, 화장대, 소파 같은 것들이 널려있었다. 누가 이사를 나간 모양이었다. 요즘에는 부쩍 이사를 나가는 집들이 많았다. 도현과 정미가 사는 아파트의 재건축을 위한 철거가 멀지 않은 때문이었다. 도현과 정미도 1년, 늦어도 2년 안에는 어디론가 이사를 나가야 했다. 도현과 정미가 결혼하고 이 집으로 들어왔던 10년 전만 해도 재건축을 위한 조합이 설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지은 지 40년이 지난 아파트는 노후했지만, 그 덕에 주변 다른 아파트보다 전셋값이 저렴해서 이 집을 선택했다. 재건축을 앞두고 있어 언제 이사를 나가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정성이 있기는 했지만, 그제 막 조합이 설립된 단계였던 터라 실제 재건축이 되기까지는 10년은 더 걸릴 거라는, 주변 사람들의 조언이 있었다. 정미와 도현이 이사를 온 지 4년 후 사업시행 인가가 나고, 그 후 5년 후 관리처분 인가가 났다. 재건축을 위한 절차가 느리지만 차곡차곡 진행된 터에, 도현과 정미는 전셋값을 한 번도 올려주지 않고 10년간 이 집에 머무를 수 있었다. 재건축이 걸려있지 않았더라면 집주인이 다른 세입자를 구하는 게 어렵지 않으니 세를 올렸을 거고, 정미와 도현은 2년, 길게는 4년을 버티다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어야 했을 것이었다.
“뭔 개소리야. 곧 이사 가야 하는데 뭔 가구를 들여와.”
도현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니도 저런 테이블 있으면 좋겠다며?”
“내가 언제?”
“지가 한 말도 기억 못 하냐? 그리고 어차피 이삿짐센터 부를 건데 가구가 하나 더 있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다투는 사이 정미가 말하는 테이블을 찾아낸 도현의 눈이 조금 커졌다. 짙은 갈색에 윤이 나는, 커다란 마호가니 원목 책상이었다. 작은 방에 저 테이블 하나만 두고, 그 앞에 앉아 종일 그림을 그리는 제 모습을 상상하던 도현의 입가에서 침이 살짝 흘러나왔다. 상상 속에서 미래의 정미가 그 말도 안 되는 글 써야 한다며, 애초에 자기가 가지고 오자고 했던 테이블이니 자기 거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도현의 마음이 급해졌다. 도현이 주도적으로 들고 와야 한다. 정미가 본인만의 테이블이라고 주장하지 못하게.
도현은 옷걸이에서 외출할 때 입는 남방을 꺼내 걸쳤다. 도현이 신발장에 달린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지고 있는 사이 정미가 현관문을 열었다. 집에서 입고 있던 파자마와 반팔 차림에 운동화를 구겨 신은 채였다.
“내 머리 이상해?”
현관문을 닫으려는 정미의 뒤통수에 대고 도현이 물었다.
“아니 괜찮아.”
정미가 도현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하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도현은 짧은 한숨을 쉬며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며 위로 뻗친 머리를 꾹꾹 눌렀다. 복도에 나갔을 땐 아직 거기서 정미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두 사람은 말없이 천천히 7층으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의 숫자만 뚫어지게 올려다보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 하나가 광고 스크린에 나오는 번쩍번쩍한 광고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어깨를 좁히며 좁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일요일 오전 11시에 어울리는 청명한 날씨라고, 정미는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햇살에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정미와 도현이 사는 아파트에는 지하 주차장이 없었다. 그런 터에 위에서 보면 마치 중고차 거래소처럼 지상 주차장에 차들이 빈틈없이 들어선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주차장 한쪽에서는 다른 차 때문에 출구가 막힌 차 주인이 앞에 세워진 차를 제 몸으로 밀고 있었다. 앞 동의 한 집도 이사를 나가는지 커다란 이삿짐 차량이 삐, 삐, 소리를 내며 사다리를 길게 뻗고 있었다. 정미와 도현은 빽빽하게 주차된 자들 사이를 지나 쓰레기장으로 갔다. 그곳에서, 마호가니 테이블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에 널려있는, 만지면 병이 들 것만 같은 더럽고 흉측스러운 것들에 비해 월등히 훌륭하고 눈에 띄는 가구였다. 도현이 윤기가 나는 테이블 위를 손으로 한 번 쓱, 문질러봤다. 고풍스럽고 아름답다고, 도현은 생각했다. 오래되어 보이긴 했으나 그 오래됨 때문에 값이 더 나갈 것 같았다. 이 좋은 가구를 누가 왜 버렸을까? 생각하며, 도현이 테이블 한쪽을 들어 올렸다.
“와 씨, 무겁네.”
도현이 외쳤다. 정미가 반대편 끝으로 가 테이블을 들어 올려보았다. 잘 되자 않았다. 정미가 거친 숨을 씩씩 내뱉었다. 도현이 그런 정미를 짜증스럽게 바라봤다. 정미가 도현을 노려보더니 이를 악 물고 테이블을 땅바닥에서 1cm 정도 들어 올렸다. 두 발자국 가다가 내려두고, 두 발자국 가다가 다시 내려두고. 정미와 도현은 그렇게 말없이, 낑낑거리며 테이블을 아파트 건물 안으로 들어 옮겼다. 날이 춥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애매한 늦겨울의 일요일 오후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