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겸손을 보편적인 미덕이라고 말합니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필요한 덕목처럼 가르치지요. 하지만 제가 느끼기에 겸손은 단순히 자신을 낮추는 태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시간이 흘러야만 비로소 알게 되는, 삶의 깊이가 담긴 하나의 ‘감정’에 가깝습니다. 저는 이제 제가 느낀 겸손이라는 감정에 대하여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제가 말하는 겸손은 ‘상실’에서 시작됩니다. 예전 같지 않음을 자각할 때, 더 이상 손에 쥘 수 없음을 마주할 때, 우리는 처음에는 상처와 실망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다른 감정이 찾아옵니다. 한때 내 곁에 머물렀던 것들의 소중함을 떠올리며, 그것이 존재했었음에 감사하게 되는 순간이 옵니다. 그때 비로소, 제가 생각하는 겸손이라는 감정이 조용히 싹틉니다. 그러므로 이 겸손은 자신을 억지로 낮추는 행위가 아니라, 상실과 성찰을 거쳐 감사로 숙성될 때 자연스레 배어 나오는 감정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 겸손을 단편적인 경험보다 ‘시간’에 연결합니다. 젊어서 큰 상실을 겪더라도, 그 경험이 즉시 겸손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충분한 시간이 지나 그 경험이 내 안에서 가라앉고 숙성될 때, 그제야 겸손은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저는 “겸손을 알게 되는 나이”라는 표현을 고집합니다. 이 말이야말로 시간의 무게가 어떻게 인간의 감정을 변화시키는지 가장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점은, 윗세대가 이 감정을 아직 시간이 무르익지 않은 아랫세대에 강요한다는 것입니다. 저를 포함한 윗세대는 상실과 두려움의 끝에서야 겸손을 알게 되었으면서도, 그것을 보편적 미덕인 양 어린 세대에게 요구합니다. 갓 이룬 성취에 기뻐하는 젊음에게 ‘항상 겸손하라’며 재를 뿌리거나, 당찬 포부를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오만’이라며 치부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젊은 시절이야 말로 오만과 저항, 도전과 부딪힘이 더 자연스러운 시기일지 모릅니다. 그 나이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히는 것은, 어쩌면 우리 세대의 연약함과 두려움을 전가하는 행위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말을 단순히 윗세대에 대한 비난으로만 남기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들 또한 상실을 겪었고, 그 때문에 사랑하는 이가 잘못되지 않을까 두려워했을 겁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 세대가 조금이라도 덜 다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서툰 방식으로 겸손을 강요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속에는 분명 서툰 방식의 사랑과 염려가 담겨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성숙하게 바라보며 각자의 자리를 존중하는 일일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겸손을 강요할 수 없는 ‘감정’이라 믿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삶의 흐름 속에서 각자가 스스로 도달해야 하는 목적지입니다. 젊은 세대는 자기 나이에 맞는 도전과 때로는 오만을 통해 삶을 배워야 하고, 나이 든 세대는 그 과정을 지켜보고 존중해야 합니다. 제가 아는 겸손은, 시간이 흐르면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게 찾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떠올리다 보면,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섣부른 판단 대신 서로의 시간을 온전히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젊음의 도전을 '오만'이라 이름 붙이기 전에, 윗세대의 조언을 '꼰대의 잔소리'로 치부하기 전에, 각자의 자리에서 홀로 감당하고 있을 삶의 무게를 먼저 헤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를 향한 너그러운 시선을 회복할 때, 저는 영화 <원더(Wonder)>의 마지막 메세지를 기억하게 됩니다.
“누구나 저마다 힘든 싸움을 치르고 있으니, 친절하라. 그리고 사람들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다면, 그저 바라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