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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I Jul 16. 2015

나홀로 31일 동남아 여행 - Day 14

@ Hsipaw, Myanmar (River Tour)

뭐지? 생각보다 어젯밤 잠을 잘 잤다. 악몽을 꾸거나, 찝찝해서 잠을 못 들 줄 알았는데, 나름 침대는 푹신했고 분위기는 아늑했다. 내가 이제 이런 수수함에 그만큼 익숙해진 건지, 아니면 이곳이 생각보다 괜찮았던 건지 모르겠다.

일어나니 6시다. 그래도 조금 늦잠을 잤네. 2주간의 여행 결과 몸이 적응해서 이 시간부터는 어차피 잠이 안 온다. 그냥 일어나는 게 상책이다. 어차피 아침도 먹어야 하고 동네도 돌아보면서 오늘 옮길 게스트하우스도 알아봐야 하니 지금부터 바삐 움직여야 한다.

대충 세수를 한다. 흠, 노여사 어떡하느냐. 2주가 지났는데 머리카락이 거의 안 자랐네. 그냥 적응해. 대신 수염은 꽤나 자랐어. 훌륭하지? 보다 보면 멋있어 보일 거야.

대충 옷을 갈아입고, 카메라와 지갑만 들고 길을 나선다. 항상 그랬듯이 하루지난 이곳의 아침은 어제 저녁과 다른 모습을 보여줄거다. 문을 잠그고 나오면서 홈매트를 끄는 것도 잊지 않는다.


큰 길로 나서니 길 건너편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다. 식당인가? 아침도 먹어야 하니 길을 건너서 한번 가본다. 그러고 보면 항상 게스트하우스에서 제공하는 조식을 먹었는지라 진정한 현지식 아침은 아직 안 먹어봤다.


인도 사람처럼 생긴 아버지와 딸이 운영하는 식당이다. 아버지는 소리를 시끄럽게 지르면서 요리를 부지런히 하고 계시고 딸은 정신없이 서빙을 하고 있다. 커다란 프라이팬에 있는 것이 물인지 기름인지 모르겠지만 터프하게 맨 바닥에 확 뿌리시고는 새로운 요리를 시작하신다. 길에 있는 식당이다 보니 아무래도 위생은 챙기기 힘들겠다. 허나 현지인들이 꽤나 많이 있는 것을 보아하니 나름 유명한 곳인가 보다. 생각해보니 어제 저녁에 귀가 할때도 이곳에 사람들이 상당히 모여있는 것을 본 것 같다.

일단 바깥 쪽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시포가 바간과 다르다고 느끼는 점이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외국인을 힐끔힐끔 쳐다본다. 덕분에 나도 아주 현지인처럼 생기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근데 메뉴판이 있을 거 같지는 않고, 뭘 시키지?


일단 옆에 사람들이 무슨 볶음밥에 계란 프라이 얹혀있는걸 먹고 있길래 서빙하는 딸에게 저거와 같은 거 달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알려준다. 딸이 다가오는데, 이 처자는 영어를 좀 한다. 인도계라 그런가? 대화가 되니 아예 커피까지 시킨다. 커피도 종류가 몇 가지 있길래 그냥 현지식으로 달라고 한다.

아버지는 또 소리를 지르시면서 요리를 시작하신다. 이분 스타일인가 보다. 주문한지 얼마 안 있어 볶음밥, 정체를 알 수 없는 양념, 그리고 계란 프라이가 얹힌 밥이 나온다. 백김치 같은 반찬 하나와 카레된장국 같은 애도 곁들여 나온다. 커피는 일단 사이드로 두고 밥부터 먹어본다.


그렇지, 볶음밥은 소금으로 간을 해야 제맛이지. 나쁘지 않다. 양념 같이 생긴 거는 약간 매콤해서 내 입맛에 맞고 국은 향신료가 다소 가미된 된장국의 느낌이다. 백김치스러운 반찬도 은근 이 한상에 어울린다. 맛있다고 엄지손가락을 척 펴서 아버지께 보여주고 계속 먹는다.

양이 생각보다 많다. 덕분에 든든한 아침을 먹었다. 이제 커피를 마셔볼까? 밥도 먹었겠다, 느긋하게 의자에 뒤로 기대 앉아서 아침 햇살을 맞으며 커피를 한 모금 넘겨본다. 달달하지만 우리나라 자판기 커피와는 다르게 약간의 향이 가미되어 있다. 역시 나쁘지 않다. 이곳 괜찮은데? 숙소만 이쪽이라면 아침마다 와야겠다.


미얀마에도 '단돈 2999키얏!'이 방송이 되고 있다. 홈쇼핑은 이 외진곳 까지도 침투했나 보다. 홈쇼핑이 무서운게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는데 나한테 필요 없는 것이 확실한 저놈들이 땡긴다. 이불 3개인가에 뭘 또 껴주면서 2999키얏이라니, 사야 하나?  쓸데없는 지름의 원흉이 홈쇼핑이지만 또 막상 알뜰살뜰 살림에도 도움이 된다. 그러고 보니 노여사가 저번에 무슨 최첨단초미세강력 '걸레' 세트를 8만 원인가에 주고 산 기억이 나는군. 걸레, 8만 원, 비성공적.

근데 여기 식사값은 얼마지? 딸한테 얼마냐고 물어보니 900키얏이란다. 캬, 아름다운 숫자이다. 아침 먹고 커피까지 해서 900키얏이라니, 어제 숙소에서 조식을 빼고 딜하기를 정말 잘했다. 딸한테 고향을 물어보니 인도는 아니고 네팔계인데,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단다. 그래서 그런지 식사도 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도식 짜파티 같은 것도 있다. 내일은 다른 걸 한번 먹어볼까?

자, 이제 배도 든든하게 채웠겠다, 숙소 찾아 삼만리를 떠나 봐야지. 이곳 지리를 잘 모르지만 일단 그냥 무작정 가본다. 지금 시각이 6시 50분이니 뭐 급할 거 전혀 없다. 게다가 오늘은 아직까지는 아무것도 스케줄을 정한 게 없다.


일단 어제 저녁을 먹었던 그 메인 도로를 가본다. 아직 여기저기 오픈 준비가 한창이다. 외국인은 시간이 일러서 그런지 하나도 안보이지만 현지인들은 꽤나 많이 나와있다. 은근히 사람들이 부지런하다.

큰 길 오른편에 왠 현대식 호텔이 보인다. 호, 깔끔한데? 들어가볼까, 말까. 어차피 비쌀 거 같고, 괜히 물어보고 표정 관리하면서 나오는 것도 피곤하다. 그래도 가격을 알면 레퍼런스로 삼을 만하겠지. 일단 한번 들어가본다.


미얀마 미녀 3인이 반겨준다. 혹시나 거지처럼 보여서 바로 쫓겨날까 싶어 들어가자마자 영어 발음을 최대한 굴려서 말을 하니 그래도 응대는 해준다. 물어보니 싱글룸 하룻밤에 22,000키얏이란다. 어, 생각보다 그리 나쁘지는 않다. 지금 비수기라 혹시나 싶어서 "디스카운트?"를 외쳐보지만 단호한 "노우"가 돌아온다. 나쁘지 않긴 한데 그렇다고 이곳에서 20달러짜리 방에 묵을 이유는 또 없다.


다시 길을 나선다. 근데 이 동네 진짜 게스트하우스가 거의 안 보인다. 영어 간판이 여기저기 있는 것을 보니 아주 관광객이 없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진짜 찰리와 릴리가 독점을 해서 그런가? 걔네도 그럼 한번 찾아가볼까 싶어서 주위를 둘러보지만 안 보인다. 한번 물어볼가 싶어서 길에 앉아있는 남자에게 다가가니, 나를 보더니 뒷걸음질을 한다. 그래, 영어 울렁증, 내 이해하지. 그래도 꿋꿋하게 다가가서 말을 거니, '왜 하필  나야'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옆에 친구한테 나를 떠넘긴다. 친구는 '얘는 또 왜 나한테 넘겨'라는 표정을 지으며 계속 손을 저으면서 "노노노노"만 외친다. 알았어, 고문 그만할게. 그냥 한번 되는데로 찾아봐야겠다.

한 30분을 돌아다녔는데 모르겠다. 스마트폰을 안 가지고 나와서 지도도 못 본다.  지리를 좀 파악한 후에 다시 나와야겠다 생각하며 일단 귀가를 결정한다.


돌아오는 길에 'Yeeshin Guesthouse'를 발견한다. 어제 검색할때 아고다에서 본 곳 같다. 한번 들어가본다. 물어보니 싱글룸이 조식 포함 6달러란다. 확실히 이 동네 가격이 바간보다는 저렴하다. 대신 화장실은 방에 없단다. 어제 숙소 생각이 나서 한번 보여달라고 한다.


방은 뭐, 감옥 같이 생겼다. 6달러에 많은 걸 기대하면 안되지. 화장실은 그래도 양변기가 있으니 나쁘지는 않다. 스태프들도 꽤나 친절하다. 하나 걸리는 건 여기가 메인도로인지라 왠지 저녁에 시끄럽지 않을까 우려된다. 빠이에서 밤새 시끄러웠던 마이네 게스트하우스의 악몽이 떠오른다. 그래도 일단 후보1!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더 이상 다른 게스트하우스는 안 보인다. 문을 열고 방에 들어오니, 한바퀴 둘러본 후에 달라진 내 눈에 의해 이곳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된다. 개인 화장실이 있고, 메인길과 약간 떨어져있어서 조용하며, 빠르지는 않지만 방까지 연결되는 와이파이도 있으면서, 넓은 침대, 그리고 이삼일 계약하면 8달러까지 가능할 거 같은 가격대까지, 다시 생각해보니 이곳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역시 첫날만의 인상은 믿으면 절대 안된다.

어쩔까? 일단 아직 8시니 좀 쉬어야겠다. 아고다로 검색을 살짝 해보니 반경 1킬로미터 안에 그래도 대여섯 개의 다른 게스트하우스들이 보인다. 아까 돌아다닐때는 그리 안보이더니 다들 꼭꼭 숨어있나 보다. 내가 찾아내주지! 아침 9시가 좀 지나면 나가서 하나하나 다시 탐방을 해봐야겠다.

시간이 되서 다시 나가니 아까와는 다르게 햇볕이 무기가 되어 나를 공격한다. 그래도 지금이 낫다. 오후가 되면 더 심해져서 정말 다니기 힘들 테니 빨리 움직여야겠다.


일단 바로 옆에 리조트가 하나 있기에 찾아가본다. 빠이에서 머물렀던 빠이린과 비슷한 방갈로다. 여기 좋은데, 비싸겠지? 그래도 비수기니까 한번 들어가서 물어본다. 40달러란다. 표정 관리! '지금 비수기인 거 안다, 빨리 진짜 가격을 진짜 얘기해라'라며 네고를 시작해본다. 얼마를 원하냐고 되묻기에 20달러를 부른다. 30달러, 이게 마지막이란다. 일단 알겠다고 하고 나온다. 아무리 그래도 30달러에 하룻밤을 머물는 것은 무섭다.


시간이 많지 않다. 자 다음 다음. 탑2인 릴리게스트하우스를 찾아간다. 시포에서 유명한 곳이다. 물어보니 에어컨 룸이 15달러다. 깎아보니 13달러까지만 가능하다. 일단 킾. 다음.


찰리 게스트하우스는 이름이 찰리가 아닌 촬스였다. 위치는 매우 안쪽에 있다. 그래도 한번 걸어가 봐야지. 이곳에서 제일 유명한 게스트하우스가 어떤지 구경이라도 해봐야겠다.


걸어가는데 어제 버스에서 만났던 프랑스인 두 명과 우연히 마주친다. 걔네는 날 못 봐서 내가 멀리서 아는척하며 부른다.


"Hey guys!"


내 소리를 듣고 내 쪽을 보더니 알아보고 반가워하며 다가온다. 지금 너희는 어디 있냐고 물으니 Red Dragon이라는 곳에 있단다. 팬 없고 화장실 별도에 7달러라는데, 뭐 나쁘진 않다. 한번 가봐야겠다고 얘기하고 인사를 한 후 헤어진다.


그 친구들이 알려준 길대로 가지만 결국 몇 번 길을 잘못 들어선다. 하지만 그래도 곧 발견한다. 보아하니 새로 지은 건물이고 촬스네 바로 건너편에 있다. 일단 레드드래곤, 붉은용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가본다.

이미 비수기인걸 자기들도 아는지라 처음부터 할인 금액으로 부른다. 그러면 거기서 더 할인을 하려 할 텐데, 아마추어들이군. 화장실 별도가 7달러, 같이 있는 방이 10달러다. 10달러는 침대가 두개이며, 에어컨을 쓰면 거기서 3달러가 추가된다. 저렴한 방을 가서 보니 화장실이 별도로 있는 게 좀 불편해보인다. 방은 2층인데 화장실은 지하에 있으니 영 불편할거 같고, 샤워실도 전체에 한 개다. 10달러짜리로 마음을 먹고 흥정을 시작해본다.

흥정에서 무조건 그냥 깎아달라고 하면 초보다. 설득력 있는 네고는 논리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조식이 포함되어 있길래 그러면 일단 조식을 빼고 대신에 에어컨을 포함시켜서 10달러로 하자고 제의해본다. 조식이 2달러이고 에어컨이 3달러니, 이리하면 대략 1달러 이득이다. 잠시 고민하더니 그리 하자고 한다. 오케이, 이 가격으로 또 다시 킾!


마지막으로 그 유명한 촬스네를 가본다. 여긴 뭐 완전 기업이다. 가장 싼 7달러짜리 도미토리부터 시작해서 10달러, 14달러, 25달러, 쭈욱 해서 80달러짜리 방까지 골고루 있다. 뭐 비싼 방들은 나랑은 큰 상관없는 놈들이고, 일단 7달러 도미토리와 10달러 개인방을 보여달라고 한다.


도미토리에 들어서는데 반가운 얼굴을 만난다. 이곳 도미토리는 바닥에 매트리스들만 쫙 깔려있는 형태인데, 그 중간에 어제 만달레이에서 헤어졌던 영국인 Huan이 누워있다가 나를 보고 반가워하며 다가온다. 이쪽으로 온다더니 결국 왔군! 잠시 여기 어떠냐고 물으면서 인사를 나눈다. 하지만 반갑긴 한데 여기에 머물 생각은 별로 안든다. 나는 대도시가 아니면 도미토리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혼자만의 독립적인 공간이 필요하다.

얘기를 좀 나눈 후 인사를 하고 일단 나온다. 시포에서 계속 머물 테니 인연 되면 또 만나겠지. 이제 촬스 게스트하우스의 1인실을 보여달라고 한다. 9달러짜리 방은 그냥 감옥의 독방이다. 창문도 없는 것이 고시원도 이거보단 낫겠다. 창가에 있는 방은 좋긴 한데 15달러다. 그래, 알았어. 그냥 갈게.

나와서 그 앞에 벤치에 잠시 앉아 지금까지의 옵션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여러가지 재보다가 결심한다. 붉은 용 10달러짜리 방으로 가야겠다. 대신 네고를 좀 더 해보자고 생각하고 다시 찾아간다.

다시 들어가니 스태프들이 웃으며 나를 반겨준다. 일단 에어컨은 뺀다. 생각해보니 무슨 에어컨이냐. 저녁에는 그다지 안 덥고 낮에 더울때도 화장실이 같이 있는 방 같은 경우에는 그냥 찬물로 샤워를 자주 하면 된다. 에어컨을 빼는 대신에 조식을 포함시킨다. 아무래도 오전에 옥상에서 여유 있게 먹는 조식은 있는 게 좋겠다.

마지막으로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이틀 있을 건데 9달러에 안될까' 라며 눈을 지긋이 쳐다본다. 남자 스태프, 살짝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보여서 더 빤히 그리고 더 슬프게 쳐다본다. 결국 9달러에 합의 본다. 화장실 없는 방이 7달러였으니 이 정도면 선방이다.

이때 아까 헤어졌던 프랑스인 두 명이 돌아온다. 땀에 흠뻑 젖어서 온 게 어딜 갔다 왔나 싶다. 이 친구들, 나를 보자마자 대뜸 자기들 저녁에 배 타는 투어를 할 건데 같이할 생각이 없냐고 물어본다. 들어보니 2명이든, 4명이든 가격이 같은 시스템이라 사람이 많을 수록 좋단다. 뭐 나도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지. 그러자고 한다. 근데 언제 에버그린 게스트하우스까지 가서 짐을 가지고 오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일단 한 시간 정도 후에 보자고 약속하고 길을 나선다. 아 덥다, 너무 덥다. 역시 10시를 넘기면 안되는 거였다. 올 때는 그냥 모토바이크 택시 타고 올까? 그건 짐들고 나와서 생각해봐야겠다.

숙소로 돌아와서 짐을 싸니 또 이곳도 짧게나마 정들었는지 살짝 아쉽다. 하지만 여기는 조식 제외하고 네고까지 격하게 해서 겨우 10달러에 들어왔다. 조식포함 9달러인 붉은용과는 비교가 안된다. 주인아저씨한테 미안하니 안계실때 스태프한테 방값을 넘기고 조용히 벗어나야겠다. 일단 너무 힘드니 선풍기를 틀고, 땀을 좀 닦은 후 글을 쓰면서 잠시 쉰다.


자, 이제 출발해보자. 지금이 11시이고 11시 반에 만나기로 했으니 30분 안에 걸어가야 한다. 7.5키로 가방을 어깨에 메고 길을 나선다. 날씨가 살인적이지만 익숙하다. 나는 할 수 있다. 여행자 주제에 택시를 타는 것은 사치다.


정말 꾸역 꾸역 한발 한발 내딛으며 한참을 걸어서 붉은용에 도착한다. 보통 풀군장으로 다니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이 한낮 내리쬐는 햇볕에 30분은 정말 아니다. 이제는 이곳에서 더 이상 옮기는 일은 없겠지. 제발.


프랑스 친구 두 명은 먼저 내려 와서 로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아 내가 좀 늦었나? 아무리 그래도 바로 일어나기는 쉽지 않아서 일단 잠시 숨을 돌린다. 어차피 가방도 방에 놓고 와야 해서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열쇠를 받아서 방으로 가본다.

역시 방은 아주 훌륭하다. 침대가 두개 있지만 어차피 그중에 한 개만 쓸 거니 나머지 하나는 사물함으로 써야겠다. 밑에 애들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 길게는 못 보고 슬쩍 보고 다시 나갈 준비를 한다. 어, 잠깐. 근데 왜 선풍기가 안보이지?

내려와서 물어보니 에어컨방이라 선풍기는 없단다. 아니 에어컨을 켜는 건 3달러라며... 그럼 선풍기도 없고 에어컨도 안 켜면 어쩌라는 거지. 무조건 에어컨을 켜라는건가. 이거 좀 애매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나중에 저녁에 돌아와서 다시 자세히 캐보기로 한다.

프랑스인 친구 한 명 이름은 '요한'이고 다른 하나는 이름이 '알봉'이다.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내 이름을 물어서 '경훈'이라고 하니까 '똥훈'이라고 발음한다. 똥은 아니 되.... 똥은 위험하다고 다시 잘 발음해보라고 해도 역시 못한다. 에잇, 이 정도면 나는 노력했다. 그냥 'Key'라고 부르라고 한다. 내 이름의 첫 글자다.

영어 이름을 별도로 갖는 것은 정말 싫어하지만 한글 이름을 처음부터 영어로 발음하기 좋은 것으로 짓는 것은 세계화 시대에서 좋다고 본다. 아버지, 경훈이 뭡니까. '경'은 진짜 발음하기 어렵다. 지훈, 영훈, 지우, 시우 등 영어로 발음하기 쉬운 이름이 수두룩한데 하필 경훈이라니. 결국 쿙훈 아니면 귱훈 식으로 불리게 된다.


점심은 이번에 데이투어를 할 그 곳에서 요한, 알봉과 같이 먹는다. 이곳에서 식당도 같이 하나보다. 미얀마 와서 처음으로 면요리를 시켜서 먹어본다. 미얀마에서는 음식이 나오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지금은 혼자가 아니고 어차피 대화할 사람도 있으니 시간이 좀 걸려도 괜찮다. 그러고 보니 다른 누군가와 이렇게 투어 같은 이벤트를 같이 하는 건 이번 여행에서 처음이다.

요한, 알봉은 둘이 친구인데 같이 1년을 여행 중이라고 한다. 한 친구는 팔이 어깨부터 절단되어 있어서 신경이 쓰이지만 이유는 굳이 물어보지 않는다. 다른 친구는 자세히 보니 오른쪽 발을 절뚝거린다. 역시 이유는 묻지 않는다. 그나저나 프랑스의 휴가 제도를 듣고 헉 소리가 난다.

둘 다 꽤 큰 은행에서 일을 한다는데, 몇 년을 일하면 1년에서 3년까지 무급휴가를 가질 수가 있단다. 무급이기에 선택적이지만 이렇게 장기 여행을 하고도 마음 편히 돌아올 직업이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의 퇴직을 하고 회사를 옮기거나 아니면 학교를 휴학하지 않으면 장기 여행을 떠날 수가 없다.  프랑스에서는 또 법적으로 일주일에 35시간 이상 근무를 못하게 되어 있고 그 이상 일하게 되면 휴가로 그 초과분을 추가로 줘야만 한단다. 휴가도 일 년에 법적으로 5주이다. 물론 대기업이라 그런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일주일 휴가도 눈치 보여서 제대로 못 쓰는 것을 생각하면 부러울 수 밖에 없다. 이런 게 선진국이다.

지난 사업을 운영할 때 비수기 무급 장기휴가 제도를 만들었었다. 여행을 다니기 좋아하는 나로서는 최소한 내가 운영하는 사업에서는 여행을 떠날 수 있게 한 달 이상의 휴가를 직원들에게 주고 싶었지만, 인건비의 비율이 높은 서비스업에서 이러한 이상적인 제도는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고민 결과, 겨울에 비수기를 이용해서 지원자들에게 한 달 혹은 그 이상의 휴가를 무급으로 제공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직원들은 본인이 원할 시 한 달 이상의 휴가를 직장 잃을 걱정 없이 다녀올 수 있어서 좋았고, 비즈니스적으로는 비수기의 인건비를 절약할 수 있어서 좋았다. 프랑스의 대기업에서 거의 똑같은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니 문득 우리나라 대기업에서도 충분히 도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헌데, 이거 진짜 그냥 내가 엄청 창의적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더니 다른곳에서도 많이 보인다. 역시 사람 생각은 정말 다 비슷한가 보다.


기다리니 면 요리가 나와서 한입 먹어본다. 생각보다 꽤나 괜찮다. 미얀마 음식은 태국이나 우리나라처럼 딱히 자기만의 개성이 강하지는 않지만 근처 나라들의 요리를 많이 도입했다. 그런 만큼 처음에는 맛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여기저기 다녀보니 꽤나 맛있게 하는 집들이 은근히 많다.

오늘 보트 투어는 한 명이 타나 5명이 타나 같은 35달러다. 그렇다면 사람을 더 넣는 게 좋지 않을까? 요한과 알봉한테 내가 아는 친구가 지금 도미토리에 혼자 있는데 한번 물어볼까라고 물어보니 당연히 좋다고 한다. 점심을 먹고 한번 가보기로 한다.

근데 아직 있을까? 오후 1시가 넘은 시간이니 왠지 어디든 나갔을 것도 같다. 큰 기대 안 하고 도미토리문을 열어보니 아까와 마찬가지로 홀로 외로이 누워서 론리플래닛을 보고 있다. 이놈, 버림받았구나. 내가 구제해줄게. 보트 투어에 대해 얘기하니 좋다고 따라붙는다. 수영을 할지도 모른다고 수영복을 입으라고 하니 앞에서 훌러덩 바지를 벗는다. 서양인들은 진짜 옷 벗는 거에 부끄러움이 없다.


식당으로 데리고 와서 요한과 알봉에게 유안을 소개해준다. 이제 다같이 출발해야 하는데 햇볕이 장난이 아니다. 그래도 4시간 투어이니 2시 전에는 출발해야 6시까지는 돌아올 수 있다.


우리를 이끌 식당의 여사장님한테 얘기를 한후 요한을 따라 강가로 간다. 거기서 배를 만나기로 했단다. 아 햇볕이 정말 장난 아니다. 배를 기다리면서 알봉이 꺼낸 선크림을 빌려서 얼굴과 목, 팔 등에 덕지덕지 바른다. 오늘은 선크림이 반드시 필요한 날이다.

조금 있으니 여사장님이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와 아들로 보이는 3살 정도 되는 꼬마를 데리고 온다. 배에 여유가 있어서 같이 돌아다닐 생각인가 보다. 그리고 커다랑 창이 달린 원피스에서 루피가 쓰고 다닐만한 모자도 사람수 만큼 가져온다. 잘됐다. 모자를 받아서 머리에 써보니 머리가 잘 안 들어간다. 아 이게 무슨 굴욕이냐. 근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자가 작게 만들어졌군. 머리에 얹듯이 올리고 끈을 목에 묶어서 안 떨어지게 한다.


길다란 배에 올라타니 배가 휘청휘청거린다. 폭이 얇고 길이가 긴 배인데, 이거 전복 안될는지 걱정된다. 전복이 되도 사실 다른 건 괜찮은데 사진기와 핸드폰이 문제다. 슬쩍 보니 여사장님도 핸드폰을 가지고 있어서 나름 안심을 해본다.


엔진에 시동이 걸리고 큰 소리와 함께 배가 출발한다. "솨아아아", 배가 물을 가르는 소리가 듣기 좋다. 이 강은 꽤나 넓고 생각보다 깨끗하다. 주변에 목욕하고 빨래하는 현지인들이 많이 보이는 게 인도 갠지스강과 비슷한 분위기다. 다만 갠지스강 보다는 정말 백배는 더 깨끗하다.


배가 지나가면 멀리서 수영하던 아이들이, 목욕하던 어른들이, 빨래하던 아낙내들이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우리를 향해 해맑게 웃으며 손을 마구 흔든다. 우리도 "밍글라바"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같이 손을 흔들어준다. 지나치며 만나는 미얀마 사람 중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다. 미얀마에서 뭐가 가장 좋았냐고 하면 두 번의 고민도 없이 바로 '어이없을 정도로 순수하고 착하고 친절한 사람들'이라고 대답할 거다. 이곳의 순수함이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몇 년 후에 돌아오면 이 사람들이 더 이상 이 사람들이 아니게 변해 있을까.


배를 타고 생각보다 오래간다. 밥도 먹었겠다, 식곤증이 나른하게 와서 꾸벅꾸벅 존다. 경치가 아무리 좋아도 뭐하나, 똑같은 광경이 지속되면 잠이 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거의 30분 넘게 달리던 배가 드디어 엔진을 끄고 속도를 줄인다. 선착장이 따로 없지만 오른쪽 나무 근처에 배를 대고 끈으로 묶어서 고정시킨다.

드디어 배에서 내린다. 첫 번째 탐방인가. 여사장님이 이것 저것 설명해주시는데 영어를 그다지 잘하시는건 아닌지라 사실 알아듣기 힘들다. 대충 이곳에 어떤 사원을 방문한다는 거 같다.


여사장님을 따라 올라가니 중간에 작은 집이 하나 보인다. 거기서 여사장님은 머물고, 따라온 젊은 가이드 하나와 우리끼리 길을 나선다. 여사장이 자기는 뚱뚱해서 못 올라간단다. 도대체 얼마나 올라가려고?

그 작은 집을 지나서 길을 나서는데 그 앞에 어떤 할머니가 지나가는 우리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주신다. 뭐지? 구걸하시는 건가? 여행 다니면서 생긴 의심병으로 조심스레 지켜보는데 그냥 웃으시면서 손만 한 명 한 명 잡고 보내주신다. 뭘까.

자, 이제 본격적으로 길을 나선다. 산 정상으로 나 있는 듯한 길을 따라 한발 한발 내딛는다. 바닥이 흙바닥인지라 쫄이를 신고 길을 오르기가 만만치 않다. 수영복 입으라는 얘기는 해줬으면서 왜 운동화 신으라는 얘기는 안 해준 걸까나. 아 그리고 우리 수영하러 온 거 아니었어? 갑자기 왠 산. 이거 언제까지 올라가는 거지.


하염없이 계속 올라간다. 이제 그만 정상이 나올 법 하구먼 끊임없이 오르기만 한다. 중간에 잠시 멈추길래 드디어 도착인가 싶었더니 이곳에서 쉬었다 간단다. 이거 트래킹이었나. 쪼리를 신고 무리하게 걸으니 발바닥에 상처가 생기기 시작한다. 내일 트래킹을 하려고 했는데 이거 좀 문제가 될 수도 있겠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영국의 이중 국적을 가지고 있는 유안은 체력을 보니 어린 게 확실하다. 올라오는 내내 한번도 안 뒤쳐지고 가이드 뒤에 바짝 붙어서 올라왔다. 궁금해서 슬쩍 나이를 물어본다.

"Yuan, how old are you?"
"19."

헐, 19살이라니. 십대였던 말인가. 내 나이가 서양식으로 36이니 이건 뭐 진짜 거의 내 나이의 반이다. 그런만큼 체력도 내 두배인가 보다. 진짜 여행하면서 말 그대로 'teenager'를 만난 건 처음이다.


내가 힘들건 말건, 또 다시 산행은 시작된다. 잔인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올라가면서 계속 여기가 무슨 밭이고 저기는 뭘 기르는지를 설명해주는데 뭐가 뭔지도 잘 모르겠거니와 사실 농업에는 큰 관심이 없어서 흘려 듣는다. 우리 근데 수영은 진짜 하긴 하는 거지?


한번 쉰 이후에도 한참을 더 올라가니 드디어 사원 같은 곳이 눈에 들어온다. 목적지다! 일행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서니 많은 개들이 일단 눈에 띈다. 동남아에서는 어디 가든 개들이 있다. 개 무서워하는 사람은 아무래도 동남아를 여행 다니기는 쉽지 않을거다. 우리나라에서 저렇게 개들이 있었으면 이미...

절 안으로 들어간다. 젊은 가이드를 따라 부처님 앞에서 절을 세 번 한다. 나는 무교이기에 이런 거에 아무런 거부감이 없다. 단순히 하나의 예절이라 생각한다. 헌데 다른 3명은 내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기만 하고 따라하지는 않는다. 다들 종교가 있나? 난 설사 종교가 있다 하더라도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의를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굉장히 낡은 절인데, 여긴 관광지가 아닌 실제 운영하는(?) 절의 느낌이 난다. 이불도 여기저기 쟁여져 있고 스님도 한분 한쪽에서 꾸벅꾸벅 졸고 계신다. 종교적인 장소는 어디를 가더라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곳도 마찬가지다. 날은 정말 덥지만 의자에 앉아서 다 같이 소곤소곤 조용히 말을 나누니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조금 있으니 아까 졸고 계시던 노스님이 차와 과자를 가지고 오신다. 또 의심병이 발동한다. 이건 얼마지? 돈은 나갈 때 내는 건가? 근데 그냥 다과를 주시고는 온화한 웃음을 지으시며 돌아서신다. 정말 그냥 주는 건가?


여행 다닐 때 너무 의심을 많이 하고 다녀서 그런지 미얀마는 뭔가 낯설다. 사람들이 이유 없이 순수한 호의를 베푸는걸 미얀마에서의 짧은 여행 기간동안 많이 겪어서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36년을 의심하고 살아왔는지라 댓가 없는 호의는 매번 볼 때마다 나를 당황시킨다. 차를 가져다주신 스님은 우리가 더워하며 손부채를 하고 있으니 어디선가 낡은 부채도 사람 수 만큼 찾아서 가져다 주신다.

종교를 수행하는 자는 자고로 저래야 한다. 감명받은 우리 네 명이서 앉아서 각 나라의 종교에 대한 얘기를 나눠본다. 우연찮게 다 무교이고 알봉만 천주교인이다. 나도 30년을 천주교인으로 살아왔기에, 예전에 신부님 옆에서 복사 서던 경험과 주일학교 선생님을 4년 했던 경험을 이들과 공유한다. 우리나라 기독교의 문제점도 얘기를 하며 같이 대화를 나눈다.

이제 일어서야지. 사실 여기를 도데체 왜 온 건지는 아직까지 미지수지만 막상 나쁘지 않았다. 진짜 절에 와서 잠시 힐링하고 가는 느낌이다. 나가면서 우리가 먹은 쓰레기를 치우고 노스님한테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스님은 온화한 미소로 한 명 한 명 인사를 받아주시며 배웅을 해주신다. 끝까지 돈에 대한 얘기는 없다.

항상 그러하듯이, 내려가는 길은 금방이다. 올라올 때는 그리 힘들더니 순식간에 내려간다. 그래도 발바닥에 난 상처가 계속 신경은 쓰인다.

아까 출발했던 그 오두막 같은 작은집으로 돌아왔다. 여사장님은 여기서 그 이상했던 할머니와 수다를 떨고 있다가 우리를 보더니 자리를 내주고 차를 내온다. 옆에서 유안이 이 차의 물은 분명 강물로 받았을 거라며 불안하다고 중얼거리지만 무시한다. 여행 다니면서 그런 거 일일이 생각하면 못 다녀, 이 티네이져야.

조금 쉴겸 앉아서 아까 그 할머니와 여사장님 그리고 여사장님 아들까지 다 같이 대화를 나눈다. 물론 현지어와 영어를 다 할 줄 아는 건 여사장님 뿐이라 통역을 통한 꽤나 어려운 대화이다. 그래도 인내를 가지면 의사소통은 느리지만 된다.

이 할머니, 여기 사시는 분이란다. 아들 하나에 딸 하나가 있는데 아들은 이전에 어떤 사고로 일찍 죽었고, 딸은 사위가 나쁜 놈이라 방문을 안 한단다. 어딜 가나 자식들이 문제다. 얘기를 듣고 이 할머니를 보니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우리 외할머니 생각이 갑자기 나면서 마음이 짠해진다. 그래도 참 곱게 늙으셨다. 내가 예쁘시다고 말씀드리니 소녀 같이 수줍은 웃음을 지으시면서 부끄럽다고 손을 절레절레 흔드시지만 막상 싫어하시지는 않는다. 자고로 여자는 3살부터 90살까지, 그 누구든 예쁘다고 얘기하면 절대로 싫어하지 않는다.

여사장님이 여기 올 때마다 할머니에게 2000키얏을 주셔서 우리 같은 여행자들이 오는 것을 반기신다고 한다. 2000키얏이면 2000원인데, 이걸로 생활이 되실까. 주변에 야채 이런 거 뜯어서 드시고 가끔 배로 물품을 전달받기도 하신단다. 근데 내가 보기에는 그런 2000키얏보다는 사람과의 정을 그리워하시는거 같다. 문득 아까 출발 전에 우리 손을 하나하나 잡아주시며 미소를 지으시던 생각이 난다.

원래 기념 사진을 안찍지만, 뭔가 마음이 동해서 사진 하나 같이 찍어도 되냐고 물은 후 내 선글라스를 씌워드리고 뒤에서 꼭 안아드린다. 나한테 숫자와 한글을 배우시고 소녀같이 좋아하시던 우리 외할머니, 지금은 좋은 곳에서 행복하시겠지.


여사장님 아들은 숫기가 너무 없다. 어떻게든 친해지려고 얘기를 걸어보지만 정말 요지불통이다. 여사장님이 자기 아들이 '오버간남'을 좋아한다고 갑자기 나한테 생뚱맞게 얘기하길래 오버간남이 뭔가 잠시 고민을 해본다. 먹는 건가?


여사장님, 내가 못 알아들으니 답답한지 춤을 춘다. 아! 오바간남이 아닌 '오빠 강남' 이었나 보다. 강남스타일은 정말 전 세계를 하나로 만들었구나. 대단하다. 이 꼬마는 한창 머리도 싸이 따라서 깎고 싸이 캐릭터 티셔츠만 입고 계속 그 말춤만 췄다고 한다. 내가 능숙한 한국어로 원래 버전을 조금 불러주니 모두들 엄청 즐거워한다. 그래도 나는 춤은 못 추겠다. 미안.

이제 떠날 시간이다. 할머니를 혼자 두고 떠날려니 갑자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돈다. 아 난 정말 울보가 맞나 보다. 그래도 여기서 눈물을 흘릴 수는 없지. 꾹 참고 할머니를 다시 한번 안아드리며 한국말로 "오래 오래 건강하세요."라고 말씀드린다. 한국말이지만 표정을 보니 분명히 알아들으신 거 같다. 우리가 배에 올라 사라질 때까지 할머니는 뒤에서 계속 손을 흔들어주신다. 이제 할머니는 다음 여행자가 올 때까지 이곳을 또 외로이 지키고 계시겠지.


또 배를 타고 나선다. 근데 진짜 우리 수영은 안 하나요. 물어보니 이제 드디어 수영하러 간단다. 아싸! 너무 덥다. 수영이 정말 절실하다.


다음 목적지에 금방 도착하고 한 곳에 배를 대고 다시 끈으로 고정시킨다. 다 같이 내리니 여사장님이 이곳을 기준으로 오른쪽에서 기념 사진을 찍은 후에 왼쪽에서 수영을 하면 된단다. 아니 뭔 기념 사진. 그래도 궁금해서 오른쪽으로 한번 가보니 나름 경치가 좋다. 갑자기 앞에서 풍덩 소리가 난다. 그쪽을 보니 계속 우리 배를 운전하시던 선장님(?)이 그새 옷을 다 벗고 물에 뛰어 들어가셨다.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다. 하긴 엄청 더우셨을거다.


기념 사진을 찍는 곳이라 했지만 그냥 사진 몇 장만 찍고 나도 바로 옷을 벗고 유안하고 선장님과 같이 물에 들어간다. 프랑스 친구들은 안 들어온다. 둘 다 몸이 좀 불편하더니 그래서 그런가.


강바닥의 미끌미끌한 느낌이 과히 좋지는 않다. 미역 같은 것이 깔려있다. 대신 물은 생각보다 깨끗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원해서 좋다. 아까까지 죽을 듯했던 더위가 한순간에 사라진다. 깊이가 생각보다 얕고 물살이 세서 수영을 하기는 좀 힘들지만 물속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이 좋다.


여사장님이 이제 반대편으로 가자며 일어나신다. 아니, 여기도 충분히 좋은데. 그래도 일단 나와서 반대편으로 따라간다. 그쪽을 들어서는 순간 경치에 탄성이 자아진다. 와, 여기는 무릉도원에 온 느낌이다. 경치가 너무 좋아서 물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앉아서 지켜본다.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자연스럽게 간지럽히고, 새들의 지저귐이 귀를 편안하게 한다. 자연이 주는 특유의 냄새가 마음을 편안하게 어루만져준다. 확실히 사람은 자연을 접할 때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흙을 밟고, 물을 만지며, 자연의 소리를 듣는 것 만큼 좋은 휴식은 없다.

다시 옷을 훌러덩, 이제 또 들어갈 시간이다. 여행 다닐 때는 창피하고 이런거 없다. 게다가 이번 여행에서는 희한하게 여자 일행이 한번도 안 생겨서 (...) 부끄러울 것도 없다. 아까는 안들어왔던 요한과 알봉도 이번에는 우리와 합류하여 같이 들어간다.

한 곳에 온천 같이 들어가기 좋게 되어 있길래 그쪽으로 다같이 향한다. 여사장님 남편도 따라오고 꼬마도 따라오지만, 꼬마는 여기까지 와서는 무섭다며 안들어간다고 엉엉 운다. 까칠해보이더니 이러는걸 보니 또 귀엽다. 여기 앉아있으니 확실히 아까 반대편보다 기분이 좋다. 이런 게 힐링이지. 이 보트 투어 따라오기 정말 잘했다.


젊은 가이드가 우리가 있는 곳 밑으로 폭포처럼 되어 있는 곳을  미끄럼틀처럼 타고 내려가 보란다. 너나 내려가, 난 저런 위험한 거 안 해. 그런데 요한이 이 말에 혹했다. 슬금슬금 가더니 조금씩 내려가 본다. "야, 그거  위험해"라며 만류해보지만 괜찮다며 계속 내려간다. 불안하게 지켜보는데 요한이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진다. 걱정돼서 재빨리 그쪽으로 가서 밑을 보니 물 아래에서 요한 얼굴이 떠오른다. 자기는 괜찮다고 손도 흔들어서 안심시켜준다.


괜찮은건가? 나도 한번 내려가 봐? 에이 싫다. 여기도 충분히 좋은데, 뭘 또 내려가냐. 그리고 생각해보니 내려가는 것 보다 올라오는 게 문제다. 요한, 너 이 가파른 곳을 어떻게 올라올래. 일단 난 신경 끄고 다시 누워서 지금의 이 순간을 즐긴다. 어떤 거금을 들여도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순간이기에, 여행에서는 현재에 존재하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다.


물이 좀 더 깊어서 다이빙도 할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꽃보다 청춘에서 갔던 라오스의 방비앙이 떠오른다. 경치는 여기도 좋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서 좋지만 다이빙이 조금 아쉽다. 라오스, 갈까 말까. 갈 수 있는 환경은 되는데 과연 전체 일정을 연장하고 갈만한 곳인지 고민이다. 6년 전에 인도에서도 원래의 한달 일정을 연장하고 네팔을 갈까 말까 고민하다 다음에 가야지 하고 돌아온 것이 지금까지 못 갔다. 그 생각을 하면 가는 게 맞지만, 노여사도 보고 싶고 우리 고양이들도 보고 싶다. 역시 이 생각은 며칠 뒤로 미루는 걸로.


한참을 그렇게 다 같이 물속에서 쉰다. 아쉽지만, 이제는 갈 시간이다. 요한은 어느새 사라지고, 여사장님은 사라진 요한을 찾아 나섰다. 내려간 곳으로는 못 올라오니 돌아서 올려나보다. 일단 옷을 챙겨 입고 요한의 옷과 가방도 챙겨서 떠날 준비를 한다.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곳을 한번 돌아본다. 내 평생 다시 이곳에 올 일은 없겠지. 한낮의 뜨거운 더위에 꿀맛 같은 휴식을 줘서 정말 고마워.


언덕을 올라가니 저기 멀리서 요한이 맨발로 조심스레 걸어오고 있다. 역시 따라 안 내려가길 잘했다. 발바닥 다칠까 봐 빨리 가서 신발을 건네준다. 역시 올라오는 길이 없어서 뒤로 한바퀴를 돌아서 왔단다. 뭐 나름 좋은 경험이었을 거다.


다시 배에 오르고 출발한다. 이제 5시가 넘었다. 슬슬 배도 고프고 이제 그만 돌아가고 싶다. 그런데 돌아갈 줄 알았던 배가 중간에 또 한번 멈춘다. 무슨 인당 만 원짜리 투어가 이리 알차다냐.


여기는 어떤 현지 부족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여사장님이 소개하여준다. 난 사실 사람이 사람을 구경한다는 개념을 좋아하지 않는다. 뭔가 우위에서 서서 지켜보는 거 같기도 하고 그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거 같아서 싫다. 그래도 일단 따라서 들어가본다.



조용한 마을이다. 소들이 꽤나 있는 것을 보니 농사를 지어서 생활하시나 보다. 가이드를 따라서 마을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여기저기 현지인들이 보이는데 의외로 모두 경계가 아닌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봐준다. "밍글라바"라고 인사하면 역시나 웃으면서 똑같이 대답해준다. 내가 생각했던 '사람관광'과는 느낌이 좀 다르다. 그냥 이들이 자연스럽게 생활하시는 곳에 우리가 손님으로 놀러 온 듯하다.



중간에 기차역도 있다. 문이 닫혀있는데 우리가 다가가니 어느 분이 오시더니 열어주신다. 철로가 있긴 한데 이거 기차가 다녀도 되는지 모르겠다. 물어보니 이 철로가 시포에서 만달레이까지 이어진단다. 내가 만달레이에서 기차를 탔으면 이곳을 지나갔겠다. 여기를 떠날 때 기차로 이동을 하려고 하니 여긴 한번 더 지나가겠구나.


이제 또 떠날 시간이다. 이제는 진짜 돌아간다. 배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 올때와 마찬가지로 또 강가에 있는 현지 사람들과 손을 흔들고 인사를 나눈다. 참 한결같이 손을 흔들어준다.


9천 원 정도의 투어임에도 정말 알찬 투어였다. 여사장님도 물론 돈을 받고 하시긴 했지만 그걸 떠나서 정말 적극적이고 친절하게 안내해주셔서 정말 너무 고맙다. 여기 있는 동안 이 여사장님 식당으로 계속 가야겠다. 9000키얏이라 잔돈이 좀 애매한데, 요한이나빼고 돈을 만원씩 걷어서 투어비를 내더니 나 보고는 내지 말고 맥주 한잔을 사라고 한다. 여기 끝나고 같이 저녁을 먹자고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한방에 해결됐다. 오늘 오랜만에 좀 달리려나?

일단 숙소로 돌아와서 간단히 샤워를 한 다음 다같이 이곳에서 다시 만나기로 한다. 유안은 숙소가 달라서 자기 숙소로 가고 우리는 각자 방으로 간다. 3명은 공용 샤워실을 이용해야 하지만, 난 오늘 돈을 좀 쓴 덕에 개인 샤워실이 있다. 역시 돈은 쓰면 좋긴 하다.

샤워를 간단히 하고 빨래도 좀 해놓는다. 어차피 얘네는 공용샤워실을 이용해야 하니 시간이 좀 걸릴 듯해서 느긋하게 정비를 한다. 발바닥을 보니 역시 상처가 나있다.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인다. 오늘 좀 무리했기에 아무래도 내일 하루는 그냥 푹 쉬어야 할거 같다.

로비로 내려가서 글을 좀 써볼까 하는데 유안이 왔다. 조금 있으니 요한과 알봉도 합류를 한다. 요한은 나를 위하여 강남스타일 티셔츠를 입고 왔다. 배 볼록하니 싸이를 닮은 것이 귀엽다. 자 이체 뒤풀이로 출발!


어디 갈가 하다가 내가 어제 생맥주 먹은 곳을 얘기했더니 다들 눈이 초롱초롱해진다. 조금 먼데 괜찮겠냐고 하니 걱정 말란다. 하긴 이런 하루를 보내고 생맥주 한잔을 한다면...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세명을 끌고 내가 길을 나서서 어제 고양이 두 마리가 있고 예쁜 종업원이 있던 그곳으로 향한다.

어제 그 살갑던 사장님은 역시 나를 바로 알아보신다. 자리에 앉아서 메뉴판을 보기 전에 일단 맥주 4잔을 빨리 달라고 하고 천천히 메뉴를 고른다. 각자 하나씩 고르니 생선, 치킨, 오리, 그리고 면요리까지 구색이 갖춰진다. 어제 오리 요리는 좀 별로였는데 오늘은 맛있으려나.


요리가 오기 전에 맥주 한잔을 다 같이 원샷 한다. 프랑스식 건배가 특이하다. 다 같이 건배하는 게 아니라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치면서 건배를 한다. 이거 묘한 매력이 있다. 나도 처음에는 주춤주춤 하다가 이들을 따라서 윙크까지 하며 프랑스식 건배를 해본다.


요리가 나왔다. 따로 덜어서 조금씩 먹어보니, 오 맛있다. 어제 오리가 별로였나 보다. 하긴 난 원래 오리요리를 맛있게 먹은 적이 없다. 오리는 그냥 내 취향이 아니었나 보다. 다들 엄청 배고팠는지 맛있다며 말 그대로 흡입을 한다. 하긴 오늘 하루 힘들었으니 뭔들 맛이 없으랴.

어쩌다 보니 술 경쟁이 붙는다. 내가 그래도 주량은 이들한테 안 밀릴 자신이 있다. 한 명이 원샷을 하면 모두가 따라서 잔을 비운다. 호주, 프랑스, 한국의 자존심이 걸린 싸움이다. 절대 질 수 없지!


여기는 맥주잔을 항상 새로 가져다준다. 왜 그러는지 궁금해서 물어보니 나중에 계산할 때 잔수를 보고 얼마나 마셨는지를 알기 때문이란다. 그런 이유로, 옆에 잔들이 하나하나 쌓여간다. 잔을 쌓는 것이 은근 중독성이 있다. 서로 맥이는 것은 아닌데 자연스레 같이 원샷을 한다. 이거 근데 속도가 꽤나 빠르다. 덩치가 큰놈들이라 주량도 센걸까. 질 수 없는데...


몇 잔을 마셨을까? 이제 은근 취하는데 사장님이 우리가 쌓아놓은 잔을 몇 개 가져가신다. 다같이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안돼요!" 사장님이 가게에 잔이 더 이상 없다며 이해해달란다. 우리가 이곳의 잔을 다 거덜 냈나 보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한잔씩 하며 각국의 술 마시는 게임에 대해서 얘기를 나눈다. 신기한 것이 나라마다 비슷한 점이 많다. 우리나라의 마피아 게임마저도 호주에서 똑같은 게임이 있다. 우리나라 것이 아니었다니. 아이 앰그라운드 이중모션은 우리나라것 맞나보다. 하지만 가르쳐줬더니 무슨 술 마시면서 그리 머리 쓰는 게임을 하냐며 구박만 받는다..

술 먹는 게임에도 약간의 문화 차이가 있는 게 다른 나라 게임들은 자기가 혼자 실수를 하면 마시는 스타일인데 반해, 한국은 남과 교류를 하면서 실수를 유발시키고 맥이는 게 많다. 이것도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문화 차이에서 오는 거겠지? 여행 다니면서 이런 얘기를 나누며 문화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참 좋다.

아 이제 좀 많이 취한다. 슬슬 영어가 힘들어진다. 취하니까 나도 모르게 한국말로 이 친구들에게 얘기를 하고 있다. 유안도 꽤나 취한 거 같은데, 프랑스 친구 이놈들은 진짜 아주 멀쩡하다. 대단한 놈들.


결국 내가 먼저 GG를 친다. 잔을 가져갔음에도 옆에는 잔이 산더미 처럼 쌓여있다. 그래, 너네가 이겼다! 하지만 내가 주량이 한국에서 아주 좋은 편은 아니야. 그러면서 속으로 다음부터 프랑스인이 술 내기하자고 하면 다시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어떻게 방에 돌아 왔을까. 비틀비틀거리며 걸어온 기억이 있긴 한데 매우 희미하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과음을 했다. 이때 한국에서 가져온 그 소주 4병이 있었으면 딱인데 정말 아쉽다. 좋은 사람들과 같이 다니고, 또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기쁜 마음으로 과음을 한 것이기에 선을 넘어선 것이 전혀 아깝지 않다. 술자리에서 나눈 얘기들도 정말 즐거웠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스펙터클한 하루가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내일 숙취는 꽤나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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