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읽고 싶다는 마음은 죄가 아니었다.
아직 일교차가 크지만, 해가 있는 낮에는 포근함이 느껴지는 요즘이다. 계절을 가장 빨리 전달하는 곳은 패션업계라고 하던데, 쇼핑몰 건물 밖 매대에는 가볍고 화사한 옷들이 봄 마중 나와 있었다.
봄이 오는구나~라는 것을 느끼며 교보문고로 향했다.
나는 매주 특별히 책을 구매하지 않아도 교보문고에 방문한다. 어릴 때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어느새 나의 주말 루틴이 되어 버렸다.
책도 꽃처럼, 향기와 색을 가졌다.
나에게 교보문고는 언제나 봄 같다.
교보문고만의 서비스 철학(?)을 가장 잘 반영한 곳, 원하는 책을 원하는 만큼 읽을 수 있게 마련한 공간이 보면 그렇다. 다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동네 교문 고는 베스트셀러 존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소파, 매트리스) 색이 개나리를 닮아 그런지 볼 때마다 봄을 마주한 듯 늘 설레고 기분 좋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책장에 기대 바닥에 앉아 보곤 했는데 말이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우리 가족은 청계천이 고가 도로 아래로 숨죽여 흐르던 인근 동네에서 살았었다.
한 평 남짓한 여인숙 달방엔 우리 세 가족(아빠, 오빠, 나) 보다 가난이 먼저 와서 자리 잡고 있었다.
내 삶에서 가장 어둡고 적막했던 시절이었다.
배고픔과 가난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그 시절, 그 시간을 조용히 견디게 해 준 것은 책이었다.
책을 펼치면 종이 위에 인쇄된 문장들은 이상하게도 나를 덜 초라하게 만들었다.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만큼은 배고픔도, 주머니 속 빈자리도, 이유 없이 작아지던 마음도 잠시 제자리를 잃었다.
나는 그때 알았다. 읽는 동안의 나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을.
배고프지 않은 사람,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 무엇이 없어도 괜찮다고 믿는 사람.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하천이 흐르던 위로 헌책방이 즐비해 있었고 몇 백 원만 주면 중고 책을 사서 읽을 수 있었다. 다만 새로 나온 책은 구할 수 없다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내 나이 이제 반 백 살.
조금 부끄럽지만 고백처럼 중학교 때 교보문고에서 있었던 일을 펼쳐보려고 한다.
토요일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는 어김없이 시청역 교보문고로 향했다. 신간 코너를 둘러보다 눈길을 사로잡았던 책 <앵무새 죽이기>를 본 순간! '펼쳐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교보문고 서비스 정신을 알기 전까지) 나는 책을 구매한 자만이 읽을 권한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뭐라는 사람 없는데 눈치 보며 페이지를 넘기며 읽었다. 한 번 펼친 책을 다시 덮고 내려놓을 수 없었다.
자꾸만 다음 문장이 다음 이야기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책을 훔쳐야겠다고 결심했다.
옷 안으로 책을 품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출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나는 직원에서 붙잡혔다.
나를 붙잡은 직원은 분명 저 멀리서 책 정리를 하고 있었는데, 언제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현행범으로 체포된 나는 직원에게 끌려 어느 사무실에 도착했다. 강제로 앉혀진 의자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였다. 반팔 와이셔츠에 하늘색 줄무늬 넥타이를 맨 중년의 아저씨가 다가왔다. 아저씨는 내 앞에 앉으며 물었다.
"이놈아! 이거 도둑질인 거 알아 몰라?"
"......."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내가 훔치려고 했던 책을 휘리릭 넘기고 있는 아저씨 옆에서 나는 반성문을 썼다. 그때 내가 쓴 반성문의 내용이 다 기억나지 않지만 그저 책이 읽고 싶었다는 마음을 적었던 것 같다. 아저씨가 반성문을 읽는 동안 나는 이제 내가 받게 될 처벌이 무엇일지 상상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반성문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아저씨는 나를 봤다.
"책을 좀 읽는 녀석이구나."
"???"
"이 책이 그렇게 읽고 싶었니?"
"... 네."
"읽어도 된다."
"네?"
"여기 있는 책 얼마든지 읽어도 된다고."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안 사도요?"
"그래!"
"왜요?"
"여기 사장님이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까?"
"...... 아저씨가 여기 사장이에요?"
"인마! 나도 내가 사장이면 좋겠다! 어떤 책이든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읽어도 돼. 하지만, 집에 갖고 가려면 돈을 주고 사는 거야. 알겠냐?"
그 말은 단순히 서비스 철학도, 용서도 아니었다. 내겐 닫혀 있던 세계(문학)의 문을 열어주는 일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서점 한편에 앉아 <앵무새 죽이기>를 마저 읽었다. 그리고 읽고 싶어도 읽지 못하고 눈길로만 훔쳐보던 책들을 책장에서 꺼내 넘치게 읽었다. 눈치 보지 않고.
그리고, 결국, 내가 훔치려던 책을 나는 다음 해에 돈을 주고 샀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비를 아껴서(지금 그 책은 내 책장 '명예의 전당'에 꽂혀 있다)
시간이 흘렀고 나는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결국 글을 읽고 쓰는 사람이 되었다.
교보문고를 갈 때마다 나는 구석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단발머리 중학생 소녀를 회상한다.
생각해 보면, 사람을 바꾸는 것은 거창한 기회나 대단한 재능이 아니라 이렇게 작고 따뜻한 이해일지도 모른다. “읽어도 된다”는 허락. 그날 서점에서 열렸던 것은 단지 책 한 권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이었을 것이다.
나무에겐 미안하지만, 종이책이 절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