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우 Dec 04. 2023

1999년 7월 어느 날의 편지

김주영 선생님께.

무더위의 계절 7월입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 가시며 수업을 하시던 선생님이 오늘따라 어찌나 보고 싶던지...

시간, 장소 가리지 않고 모래 마장 앞 벤치에 앉아 이렇게 선생님께 편지 한 통 올립니다.

경마장 안에서만 생활하다 보니 평소에 그냥 옆에만 있어주던 사람의 손길이 너무 그립습니다.

그런 그리움, 외로움을 달래고자, 또 여기서의 제 생활도 알리고자 선생님께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기 과천 '서울 경마공원' 뜨거운 모래 마장에서 오전엔 말을 타고 오후에는 고등학교 수업처럼 강의실에서 학과 수업을 받으며 열심히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론 수업을 받을 때면 선생님 생각, 친구들 생각, 고등학교 시절 추억들이 많이 떠오릅니다.

지난 6월 한 달 동안은 외출, 외박도 없이 단체로 야외수업을 나가는 것 외에는 경마장 속에서만 생활을 했습니다.

생전 해보지 못한 단체 생활, 꽉 짜인 일과 외부와 차단된 생활이 처음엔 무척 힘들었지만 지금은 적응을 잘해가고 있습니다.

그 달에는 정신교육도 무척 많이 받고 힘든 극기훈련도 하고 말과 처음 접해 보기도 하고 생소한 일을 많이 해봤습니다.

7월에 와서는 1주일에 한번 외박도 있고 여기 생활에도 익숙해지고, 개인적인 생활에 제약도 많이 받지 않아 상당히 생활하기가 수월해졌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밖에 나가서 생활하는 것이 더 낯설 정도로 여기에 적응이 되었습니다.

저는 새벽 5시에 일어납니다. 5시에 일어나서 6시까지는 세수하고 숙소 정리를 하고 6시가 되면 30분 동안 아침체조와 구보를 합니다.

그리고 6시 30분부터 8시까지는 마방 즉, 마구간 같은 곳에 가서 말밥 주고, 말 물도 주고 말 배설물도 치우고 짚을 깔아주고

마지막으로 마방 전체 구역 청소가 끝나면 아침 식사를 하러 갑니다.

9시까지는 좀 쉬다가 9시부터 9시 30분 까지는 말을 타고 나가기 위한 준비 작업을 하고

9시 30분이 되면 제가 타고 갈 말을 끌고 마장으로 나가 11시까지 기본 마술 수업을 받게 됩니다.

이 시간이 끝나면 하루 일과가 거의 끝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만큼 이 시간이 힘든 시간인데 무척 긴장을 하고 있어야 해서 말을 타고 내려오면

몸에 기 다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힘이 듭니다.

11시부터 12 시키지는 말 목욕을 시킵니다. 아침, 점심밥도 이 시간에 줍니다.

여기서는 사람보다 항상 말이 우선이기 때문에 말밥을 먼저 주고 제가 밥을 먹으러 갑니다.

점심을 먹고 2시까지는, 휴식 시간을 갖게 되는데 이 시간에 잠도 자고 책을 보기도 하고 이렇게 편지도 쓰곤 합니다.

휴식 시간이 끝나고 2시부터는 이론 수업을 받거나 체육 활동을 하게 됩니다

주된 학과 과목은 마학입문, 사양학, 영양학. 질병, 장제, 해부생리 영어, 윤리등 이러한 수업을 받고

체육활동으로는 낙법 교육, 수영교육을 주로 받고 때때로 스케이트 겨울엔 스키, 가끔은 볼링, 테니스 수업도 받습니다.

이렇게 5시까지 오후 수업을 마치고 6시까지는 말 저녁밥과 물을 주고 6시 15분까지 훈육 교관님과 종례를 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저녁식사를 하고 바로 숙소로 들어오게 됩니다.

숙소에 늘어와서 9시까지는 자유시간을 갖게 되는데 이 시간에는 개인적으로 휴식을 취하던지

헬스장 가서 운동을 하던지 당구장, 탁구장, 노래방, 음악 감상실 등 각자 취미생활을 합니다..

9시 30분이 되면 점오를 하고 10시쯤에 잠자리에 들게 되면 하루가 끝나는 것입니다.

그 옛날 고등학교 시절엔 그 생활이 저에겐 무척 힘들고 짜증스러웠는데

여기 와서 생활해 보니 그때 그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란 걸, 그리고 제일 편안했던 시절이 아니었던가도 싶습니다.

정말 힘들어 눈물이 날 지정에 이르러도 2년 동안 열심히 교육받고

2년 후에 정식 기수로 데뷔한 그런 멋진 저의 모습을 상상해 가며 하루하루 보람 되게 보내려고 무척 노력하고 있습니다.

처음 말을 타서부터 3주 정도는 엉덩이가 까져서 피가 나고

손가락에 물집이 생겨서 기본적인 움직임에도 불편을 느꼈었습니다.

허벅지에는 피멍이 들었는데 아직까지 낳을 조짐이 보이지 않습니다.

군살이 베긴 곳은 이제 포기를 하고 관리를 하지도 않습니다.

이 정도쯤이야 하고 그러려니 하고 넘겨 버립니다.

가끔은 말에 밟히거나 물려 상처를 입기도 하는데 어떤 동기생은 말에 밟혀 발톱이 빠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저는 아직 거기까지는 가 보지는 못했습니다. 다행히도..

말이라는 동물은 겁이 많은 동물이라 그만큼 자기 보호 본능도 강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뒷발질을 하는데 뒷발에 한번 채이면 사망 아니면 잘해야 중상입니다.

그래서 항시 말을 대할 땐 경계를 해 가면서 대합니다. 안 다치기 위해서.

그리고 말은 자기를 대개 예뻐해 주고 맛있는 각설탕이나 당근을 많이 줘도 개만큼 주인을 잘 알지 못합니다.

기억력도 무지 짧아서 자주자주 예뻐해 주고 애무해 줘야 그나마 얼굴을 알고 장난도 치고 그럽니다.

저에게도 애마가 한 마리 있습니다. 이름은 '더 루키' 입니다. 성별은 거세마고 뉴질랜드 출신입니다.

더루키는 각설탕을 무지 좋아하는데 제가 각설탕을 구하기 위해 식사 시간마다 식당 구석에 가서 각설탕을 훔쳐 오는 나쁜 버릇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불안함 긴장감을 안고 각설탕을 훔쳐 와서 더 루키에게 주면 주인의 수고는 십분 헤아리지는 못하고 먹고는 또 달라고 제 손을 툭툭치고 머리로 손을 계속 가리키고 그럽니다.

그런 모습을 보이면 뭐 이런 말이 다 있나 싶어도 왜 그리 귀엽게만 보이는지.

선생님에서는 이런 기분 모르시죠?

처음엔 말이 겁나기도 하고 거부감도 들었는데 애마가 생기다 보니 지금은 말이 제게 가장 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말을 타고 수업을 받을 땐 말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말이 말을 듣지 않아 무척 애를 먹기도 합니다.

그래도 그런 위험성과 두려움을 극복해야지만 훌륭한 기수가 될 수 있다 생각하고 스스로 과감해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이번 여성 기수후보생을 처음 뽑았다는 걸 알고 계시죠?

사실 경마 팬과 여기 관련된 관계자들은 무척 많은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과연 여자들이 잘 해낼 수 있을지.. 처음 시작하는 입장이 되다 보니 주위의 기제가 너무 큽니다.

그만큼 부담도 되고.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잘 해내야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정말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보겠다는 마음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전 자신합니다. 꼭 성공하리라고.

선생님, 저 성공하는 날까지 끝까지 지켜봐 주십시오.

실망시켜 드리지는 않을 자신 있습니다.

선생님께 이외에도 들려 드리고 싶은 얘기, 하고 싶은 얘기 너무 많은데 다음에 찾아봤고 더 많은 얘기 해 드리겠습니다.

혹시나 편지 내용이 너무 진부하진 않았는지..

7월 말이면 여름휴가가 주어집니다. 그때 꼭 찾아뵙겠습니다.

제자 신영이는 내일을 위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겠습니다.

다시 찾아뵙는 날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

1999. 7월 9일 금요일

제자 신영 올림

매거진의 이전글 잘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