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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니. 나는 옥상에 선 적이 있어. 내가 죽든 말든 하늘은 파랬어. 쨍하고 깨질 것 같았지. 새롭게 이사한 동네는 그런 식이었어. 도대체가 나 같은 애는 신경도 쓰지 않았지.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할 거야. 슬프지 않아. 후회하지 않아. 자, 하나 둘 셋 하면 뛰어내리는 거야. 마음먹은 순간에. 하나. 믿을 수 없어. 둘. 지나간 거야. 제트기가. 음속으로. 여지없이 땅이 흔들렸지. 그 순간 아빠를 봤어. 얘야, 죽음은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는단다. 너는 달려야 해. 하늘에 떠 있는 아빠는 거대했어. 온 힘을 다하는 듯한 모습이었지. 순식간이었어. 나는 이미 빈 하늘을 향해 손을 흔들었어. 눈물을 흘리며. 이번에도 모두 이미 지나간 뒤였지만 그래야만 했어. 결국 또다시 살아남았지. 셋. 결심했어. 그래, 달려야 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사라질 수 있도록. 그 순간부터 내 운명이 된 거야. 달리기는. 새로 전학한 학교에는 육상부가 있었어. 나는 친척 어른들에게 말했어. 운동을 하고 싶다고. 친척 어른들은 고개를 저었어. 운동에는 돈이 많이 든단다. 공부를 해 보는 건 어떻겠니. 하지만 공부로는 사라질 수 없는걸요. 어른들은 고개를 갸웃했지. 저는 달리기가 하고 싶어요. 어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지. 그래 달리기라면 돈이 덜 드니까.
그 길로 학교 육상부로 달려갔어. 나는 그날부터 어디든 뛰어다녔어. 육상부 감독님은 전국 체전 여자부 사백 미터에서 사 위를 했던 사람이야. 감독님에게 말했어. 저를 더 빠르게 해 주실 수 있나요. 그녀는 웃었어. 왜 육상을 하고 싶어 하냐고 물었지. 대답은, 사라지고 싶어서. 나는 그날로 육상부가 되었어. 얘야, 백 미터라는 거리는 허상이란다. 백 미터를 달리겠다는 나에게 감독님이 가장 먼저 가르쳐 준 원칙은 그거였어. 눈에 보인다고 모두 믿으면 안 되는 거야. 눈앞의 결승선에 현혹되면 안 돼. 항상 백이십 미터를 뛴다는 생각으로 온 힘을 다해서 뛰는 거야. 그게 바로 전력질주란다. 전, 력, 질, 주. 온 힘을 다해 뛴다는 그 말은 단단했어. 절대로 부서질 것 같지 않았지. 나에게 그런 말을 해 주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어.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진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감독님은 내 머리를 쓰다듬었어. 너는 아마 잘 달릴 수 있을 듯싶구나. 일단은 마음껏 달려 보렴. 나는 있는 힘껏 내달렸어.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 오자 아이들이 비웃었지. 너무나도 느렸어. 당황스러웠어. 비웃음을 사는 속도로는 사라질 수 없어. 깔딱깔딱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어. 부끄러워 죽고 싶은 심정이었지.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나에게 감독님이 말했어. 썩 빠르지는 않구나. 종목을 바꾸면 어떻겠니. 나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어. 안 돼요. 저는 더 빨라져야만 해요. 중학생 언니들까지 와아, 하고 나를 비웃었어. 생각했어. 그 누구도 비웃지 못할 정도로 빨라지겠다고. 차마 보이지도 않을 만큼.
나는 그 길로 미용실에 갔어. 어떻게 자르겠냐는 미용사 언니의 말에 앞으로는 스포츠를 할 거니까 스포츠로 잘라 달라고 했어. 사 년이 넘게 기른 머리였지. 미용사 언니는 고개를 내저었어. 정말 진심이니. 나는 언니에게 말했어. 저는 앞으로 빨라질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거예요. 이까짓 머리카락이 무슨 대수겠어요. 미용사 언니 역시 단호했어. 정말 후회할 수도 있으니 곰곰이 생각해 보라고 말했지. 요즘 같은 시대에 말이야. 우리는 결국 단발로 자르기로 타협했어. 가위가 싹둑거렸어. 귓불을 스치는 가윗날은 차가웠지. 내 등을 떠밀었지. 눈을 질끈 감았어. 미용사 언니가 속삭였어. 머리를 다 자르고 나면 너는 다른 사람이 될 거야. 그래, 나는 다른 사람이 되는 거야. 그제야 눈을 똑바로 뜰 수 있었어. 눈을 크게 뜨고 머리칼이 잘려 나가는 모습을 지켜봤어. 떨어지는 머리칼이 자꾸 눈을 찔렀지만 끝까지 보고 싶었어. 나는 변하기 시작한 거야. 머리를 감겨 준 뒤에 미용사 언니가 말했어. 얘, 너 그렇게 짧게 자르니 정말로 빨라 보인다. 고맙다고 인사했어. 그 말대로 거울에 비친 나는 빠를 것 같아 보였어. 이제 정말로 빨라지기만 하면 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