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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성욱 Aug 24. 2024

결승선이 눈앞에 있어

- 5

  다음 날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상을 받았어. 교장 선생님은 학교의 이름을 드높였다고 좋아했어. 나에게 이름이 적힌 종이 쪼가리 따위는 정말 필요 없는데. 교장 선생님과 악수를 했는데 손이 축축했어. 기분이 나빴지. 하지만 감독님이 뒤에서 웃고 있어서 손을 뺄 수 없었어. 교장 선생님은 모두에게 빨리 달리는 비결을 말해 주라고 했어. 나는 말했어. 너희들은 원하지 않기 때문에 빨리 달릴 수 없을 거야. 나는 지금 느리지만 앞으로 더 빨라질 거야. 교장 선생님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어. 감독님의 얼굴이 붉어졌지. 그날 나는 육 학년 언니들에게 끌려가서 맞았어. 건방진 년. 조금 빠르다고 눈에 뵈는 것도 없나 보지? 썅년아 넌 나보다 느렸잖아. 그런 욕을 하며 나를 때렸지. 그냥 맞아 줬어. 아프지 않았어. 어차피 도망가면 걔들은 나를 잡을 수 없을 테니까. 진짜 아플 때면 달리면 되는 거야. 아무도 날 잡을 수 없을 테니까. 감독님은 내 얼굴에 난 상처를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연습이 끝나고 그녀가 나에게 왔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지. 얘야, 세상에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는 거란다. 나는 그녀가 아침에 일어난 일 때문에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알아요. 달리고 싶어도 달리지 말아야 할 시간이 있죠. 감독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어. 이백 미터와 사백 미터도 해 보면 어떻겠니? 그건 인생에 도움이 된단다.

  그게 아니잖아! 그녀가 화를 냈어. 내가 넘어졌기 때문이야. 누구나 하는 실수가 아니었어. 오직 백 미터만이 직선으로 달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니? 감독님은 넘어진 나를 일으켜 세웠어. 얘야, 왜 말을 안 들어. 코너 구간에서는 속도를 줄여야 한다니까.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어. 그런 주문을 하는 감독님을 참을 수 없었어. 너무하세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그녀는 한껏 누그러진 표정을 지었어. 네가 다칠까 봐 그러는 거잖아. 이백 미터와 사백 미터는 코너 구간에서 얼마나 속도를 조금만 줄이느냐가 관건이란다. 거기에서 승패가 결정되는 거야.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어. 너 도대체 왜 그러니. 그녀가 팔짱을 끼고 나를 노려봤어. 감독님, 저는 속도를 줄이지 못해요. 그건 전력질주가 아니잖아요. 속도를 최대한 조금만 줄이라니 세상에 그런 비겁한 거짓말이 어디 있어요. 그런 건 달리기도 뭣도 아니에요. 그런 짓을 하면 수치심만 느껴져요. 그녀가 내 뺨을 때렸어. 얼굴이 달아올랐어. 내가 너를 잘못 봤구나.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니. 그럼 그 종목을 열심히 연습하는 친구들은 뭐가 되겠어. 어서 사과해. 감독님도 사백 미터 선수였던 거야. 나는 분했어. 사과할 수 없었어. 잘못하지 않았으니까. 걔들이 내 인생을 대신 살아 줄 것도 아니잖아요. 그녀는 수줍은 사람처럼 귀까지 빨갛게 물들였지. 그렇게 화가 난 얼굴은 난생처음이었어. 그렇다고 사과할 수는 없었어. 대신 벌을 받았어. 턴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운동장을 돌아야 했어. 팔꿈치가 까지고, 다리는 피투성이가 됐어. 그까짓 상처는 아프지 않아.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이 느려 터진 속도야. 절대로 속도를 줄일 수는 없어. 그건 거짓말이고 그래, 기만이야. 결국 감독님이 나를 말렸어. 내가 열일곱 번째 넘어졌을 때였어. 다시 일어나 달리려는 나를 일으켜 줬지.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어. 상처 난 다리에 연고를 발라 줬어. 연고가 닿을 때마다 상처에 불꽃이 내려앉은 것처럼 따끔거렸지. 아프니?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온화하게 돌아와 있었어. 나는 고개를 내저어. 너는 고집이 보통이 아니라 곱빼기구나. 얘야, 인생에는 말이야 속도를 줄여야 할 때도 있는 거란다. 그러지 않으면 튕겨 나가게 되는 거야. 그건 상처가 되지. 인생이라는 레이스에는 백 미터만 있는 것이 아니야. 오히려 마라톤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 너에게는 그걸 알려 주고 싶었단다. 나는 화끈거리는 통증을 느끼며 말했어. 그런 건 제 인생이 아니에요. 감독님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지. 창밖으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어.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어. 그래, 앞으로는 백 미터에 주력하자꾸나. 내가 너를 정말로 아껴서 그랬다는 걸 너는 이해해야 한단다.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어. 그녀가 말했어. 아가야 너는 나의 보물이란다. 누군가 그런 말을 해 준 것은 처음이었어. 아가라니. 연고를 바르지도 않았는데 눈가가 따끔거렸어. 이제는 알지. 나는 그때부터 그녀를 사랑한 거야.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이백 미터와 사백 미터를 뛰는 언니들에게 호되게 맞았어. 개 같은 년이라고 욕을 먹었지. 인생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했지. 괜찮아. 걔들이 사는 것도 인생이라면 나는 살지 않을 테니까. 그날부터 나는 백 미터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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