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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아군

# 같은 깃발은 아니라지만, 충분히 든든했다.

by 사랑의 생존자


엄마, 아빠, 오빠, 새언니, 그리고 나.


열한 평 남짓한 내 자취방 거실에 가족들이 모였다.

사실 모였다’기 보단 좁디좁은 공간에

다섯 명이 ‘낑겨 있었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아빠와 오빠가 있는 건 그렇다 쳐도,

새언니까지 와 있다는 건 좀 뜻밖이었다.

엄마가 새언니를 어려워하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서른 중반에 외국계 회사 임원 자리까지 오른 사람답게, 새언니는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남달랐다.

쭉 뻗은 큰 키와 매끈하게 각 잡힌 이목구비는 차가운 인상을 풍겼고, 하얗다 못해 창백해 보이는 피부는 어딘가 서늘해 보이기까지 했다.


평생 가정주부로 살아온 엄마에게 그런 언니는

처음부터 편히 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게다가 언니는 말수는 적어도, 할 말은 꼭 하는 편이었다. 엄마가 평생 꾹꾹 눌러 삼켜온 것들을 보란 듯이 뱉어내곤 했다.


그게 엄마를 더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좋은 일은 몰라도, 껄끄러운 일만큼은 새언니 앞에서 유독 감췄다.


그런 엄마가 새언니까지 불렀다는 건 이제는 더 숨길 것도 없단 뜻이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겠다는, 벼랑 끝 심정이었을 테다.


“내가 오늘 너희를 부른 건,

이 결혼을 우리 모두가 나서서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엄마는 그렇게 입을 뗐다.

그리고 내가 이 결혼을 하면 안 될 이유를

하나씩 늘어놓기 시작했다.


조목조목,

차분하게.

처음엔 그랬다.


하지만 곧, 목소리엔 분노가 스며들었고

결국 언성이 높아졌다.


“이게 협박 아니면 뭐야? 한 마디 상의도 없이! 혼인신고 못 해서 청약 놓치면, 또 그 원망은 나한테 할 거잖아?”

아빠는 한마디도 없이 그저 바닥만 보고 있었다.

새언니는 놀란 기색을 애써 지운 채 이 낯선 상황을 이해해 보려는 얼굴이었다.

오빠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


분위기를 더 험악하게 만들까 걱정됐지만,

그래도 나는 말해야 했다.

어차피 오늘은 그런 자리였다.


“저는… 엄마 아빠가 끝까지 허락 안 하시면, 혼인신고까진 안 할 거예요.”

네 사람의 시선이 한꺼번에 내게로 쏠렸다.

떨리는 속내를 들킬까, 애써 침착한 척하며 말을 이었다.

“청약은 그냥, 결혼에 필요한 현실적인 안전장치였을 뿐이에요. 하지만 H에 대한 제 마음은… 그건 정말 진짜예요. 반대하시더라도, H를 한 번이라도 보고 하시면 안 될까요?”


정말이었다.

엄마가 끝까지 반대한다면,

몰래 혼인신고할 생각은 없었다.

청약은 구실이었을 뿐, 포기해도 괜찮았다.

하지만,

반대에도 나름의 ‘최선’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결사적으로 반대할 거라면, 아무리 싫어도 H를 한 번 보고 아니라고 해줬으면 했다.


엄마는 내 말을 듣고 바로 코웃음을 쳤다.


“당연히 혼인신고는 하면 안 되는 거야. 그리고 그놈 얼굴을 내가 왜 봐야 하니? 평생 아무 상관도 없을 사람인데.”

가슴이 꽉 막힌듯 답답해졌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고,

그걸 본 엄마는 더 화가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


얼굴이 붉어지며, 급기야 익숙한 그 지뢰 같은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결국 엄마 입에서 또다시 ‘쓰레기’라는 말까지 나왔다.


몇 번이고 들은 말이었다.

이제 그건 엄마의 레퍼토리 같은 거였다.

더는 나를 다치게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날만큼은 이상하게 달랐다.

가슴이 쓰리도록 속상했다.


그 말들 때문도,

결혼을 반대해서도 아니었다.


나는 다만,

내 얘기를 들어주길 바랐다.


이번만큼은,

엄마가 속상했던 이야기 말고,

내 마음의 진짜 얘기를.

‘그래, 들어보니 나는 이해 못 하겠지만 너는 이런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그래도 나는 끝까지 반대야.’


어쩌면 나는 딱 그 정도만 해줬어도 깨끗이 포기했을지도 몰랐다.


내 이야기를 들어보지도 않고 엄마는 대체 무엇에 그렇게 반대하는 걸까.

세상 사람들의 눈길?

엄마의 묵은 상처?

아니면, 자존심?


왜 아무 상관도 없는 새언니까지 불러서

이 초라한 싸움을 목격하게 해야 했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울지 않겠다던 다짐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눈물이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우는 걸 들키기 싫어 숨을 죽이고 숙인 머리를 더 숙였다.


그때까지도 엄마는 멈추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쏟아내고 있었다.

“그만하세요, 어머니.”

엄마 말을 자른 건 오빠였다.

울음을 멈추고 오빠를 보니, 오른쪽 눈썹이 활처럼 아래로 휘어 있었다. 화가 날 때 오빠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자식이잖아요. 평생 안 볼 사람처럼 그렇게 상처 주시면 어쩌시려고요.”

“뭐?”

“반대하시는 거 이해해요. 저도 보여요, 고생할 거. 그런데…”


오빠는 짧게 숨을 삼켰다.


“얘를 그렇게 모르세요? 30년 넘게 본 딸이잖아요. 허튼짓 할 얘는 아니잖아요. 그러면 말은 한번 들어봐야죠. 어머니는 지금... 어머니 얘기만 하고 있잖아요.”


옆에 있던 새언니가 놀란 듯 오빠 손을 꾹 잡았다.


“얘가 얼마나 상처받고 있는지 안 보이세요? 반대하더라도 이렇게 난도질하듯 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오빠가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 수 있었다.

엄마가 내게 퍼부은 그 칼 같은 말들은 나만 향한 게 아니었다. 같은 집에서 나고 자란 오빠에게도

스치며 상흔을 내고 있었다.


아, 결국 나는 오빠에게도 상처를 주는구나.

죄책감과 미안함이 엉켜 가슴을 쑤셨다.


엄마는 오빠의 뜻밖의 말에 잠시 얼어붙은 듯했다. 그러다 정신을 붙잡으려는 듯 고개를 몇 번 흔들더니, 느닷없이 화살을 새언니에게 돌렸다.


“넌 어떻게 생각하니?”


언니는 놀란 얼굴로 머뭇거렸고, 그 모습을 본 오빠는 짜증스럽게 얼굴을 찌푸렸다.


“대답할 필요 없어. 가자.”


오빠가 언니를 손을 끌고 나가려는 차,


“저... 제 생각에는...”


언니는 오빠의 손을 살포시 뿌리치며 입을 열었다.


“이 정도로 반대하실 거면...

일단 한 번 만나보고 말씀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말투는 조심스러웠지만, 엄마를 똑바로 바라보는 언니의 눈빛은 오히려 더 또렷했다.


엄마는 한참 새언니를 보더니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흘렸다.


“니들이... 다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다들 자기 일 아니라고 저러는 거잖아.”


엄마는 그 말을 한 후,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다 소리 내어 흐느꼈다.

그제야 한마디도 않던 아빠가 낮게 말했다.


“그만들 해라. 당신도, 이제 그만해.”


아빠는 울고 있는 엄마를 부축해 현관 쪽으로 갔다.


“따로 연락하마.”


아빠는 그렇게 그 말만 남기고 나갔다.

곧이어 오빠와 새언니도 집을 나갔다.

거실엔 식어버린 커피잔 다섯 개만 남았다.

그리고 나 혼자였다.


각오는 했지만, 현실은 늘 상상보다 훨씬 더 가혹하다.


오빠에게까지 상처를 준 것 같아 가슴이 쓰렸다.

당황한 새언니 얼굴도 자꾸 떠올랐다.

엄마 비위 맞추느라 얼굴이 핼쑥해진 아빠도 눈에 밟혔다.


울지 않기로 했는데,

오늘만큼은 울어도 되는 날로 내가 마음대로 정했다.

실컷 울어야 또 어떻게든

앞으로 갈 수 있을 테니까.




다음 날,

거울에 비친 얼굴이 우스꽝스러웠다.

결국 퉁퉁 부은 눈으로 출근했다.

동료들에겐 어젯밤 라면을 먹고 잤다고 둘러댔다.

학교에서도 몇 번이나 눈물이 쏟아질 뻔한 걸 참느라 애를 먹었다.



퇴근길,

낯선 번호가 찍힌 전화를 받았다.

새언니였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언니는 나보다 여섯 살 많았지만 늘 ‘아가씨’라 불렀고, 깎듯이 존댓말을 했다.

우리는 편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렇게 개인적으로 전화를 해온 건 처음이었다.

어제 일이 아니면 달리 이유가 없었다.


“어제는 오빠가 조금 흥분했어요. 많이 놀라셨죠? 이제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언니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

일부러 전화를 해준 게 고맙기도 하고,

괜히 내 못난 구석을 들킨 것 같아서 민망하기도 했다. 괜찮다 인사하며 전화를 서둘러 끊으려는데,

언니가 조금 머뭇거리다 말했다.


“아가씨랑 어머님은… 보통 모녀 사이 같지가 않아요.”


언니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조용히 덧붙였다.


“꼭, 엄마랑 딸이 바뀐 것 같아요. 이상하게…”


“…네?”


“밥 잘 챙겨 드세요. 끊을게요.”


언니는 짧게 인사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휴대폰을 들고 그대로 서서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언니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엄마가 어린애 같이 굴었다는 건지,

내가 달래는 엄마 같았다는 건지.


그렇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했다.

언니는 나를 ‘응원’까지는 못 해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 정도면 내 편이라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

오빠에게도 문자가 왔다.


‘이 결혼이 좋다고는 못 하겠다.

그렇지만 부모님이 반대한다고

포기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사람은 생긴 대로 살아야 하니까.’

‘생긴 대로 살아야 하니까.’

그건, 내 뜻을 인정하겠다는 말이었다.


뜻밖에 언니와 오빠,

생각지도 못한 아군이 둘이나 생겼다.


사실 ‘아군’이라는 말은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언니와 오빠가 내 선택을 좋아해서 내 편을 드는 건 아니니까.


당연히 선택도, 책임도 오롯이 내 몫이었다. 그러니 가장 후회 없는 길로 가야 했다.


그런데도.

마음 한켠이 괜히 든든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같은 깃발을 든 건 아니라지만, 혼자만의 전쟁은 아닌 느낌이었다.



그날 밤, 아빠에게 연락이 왔다.


‘H를 한번 만나보고 싶구나.

엄마는 내가 설득해 보도록 하마.’


뭔가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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