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이란 이해가 아니라 감당이다.
1. 예감의 나비효과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단순한 기억의 소설이 아니라, 우리가 믿어온 ‘자기 인식’의 허상을 무너뜨리는 이야기다. 책장을 덮은 뒤에야 비로소 제목을 이해하게 되는 이 소설은, 끝에 다다를수록 예감은 단순한 직감이 아니라, 주인공 토니가 품었던 파국의 예감임을 보여준다. 토니는 여자친구 베로니카와 그녀의 가족에게 일종의 불길한 예감을 느꼈고, (혹은 겪었고) 에이드리언이 그녀의 가족을 만나면 '뭔가 일이 터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 예감을 '자신의 촉' 정도로 여겼지만, 그 예감은 나비효과가 되어 상상도 할 수 없는 비극의 시작이 되었다. 말 한마디, 편지 한 줄, 사소한 조롱이 어떻게 인생 전체를 바꿔놓는지 보여주는, 지극히 현실적인 나비효과의 이야기다.
2. 토니의 서술과 기억의 불완전함
이 소설의 교묘함은 토니의 1인칭 시점에 있다. 그는 자신을 언제나 조심스럽고, 상대적으로 무해한 사람으로 묘사한다. 처음엔 나도 그의 목소리를 신뢰했다. 그러나 편지의 진실이 드러나면서, 우리는 그의 기억이 얼마나 자기 자신을 위한 각색이었는지 깨닫는다.
토니는 베로니카와의 관계를 ‘이해받지 못했던 연애’로 묘사하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했지만 실제는 달랐다. 그는 의도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결과적으로 여러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일을 저질러 버렸다. 이 지점에서 묻고 싶다. 우리가 믿는 나의 기억, 나의 과거는 과연 진실일까? 아니면 가장 교묘한 자기방어일까? 어쩌면 에세이는 소설보다 더 소설일지도 모른다.
3. 베로니카의 성숙과 침묵의 무게
이해하기 어려운 ‘미스터리 한 여인’인 베로니카야말로 나는 이 소설 속에서 가장 성숙한 인물이라고 느꼈다. 그녀는 가족의 파괴, 사랑의 비극이라는 무거운 현실을 끝까지 떠안고 침묵했다. 엄마의 유산으로 사건의 실체가 드러날 절호의 순간에도 베로니카는 토니에게 원망하지도, 진실을 폭로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아직도 전혀 감을 못 잡는구나”라며 자신의 고통을 설명하지 않은 채 묵묵히 감내하며 생을 이어가는 쪽을 선택했다. 이 무언의 태도에서 나는 묘한 존엄을 보았다.
4. 에이드리언의 모순, 지성의 오만과 책임 회피
에이드리언은 작품 속에서 가장 이성적이고 철학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그렇기에 그의 죽음은 고결한 철학적인 선택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의 자살의 이면이 드러났을 때 그 선택은 철학적이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도덕 체계의 붕괴와 마주한 지성의 파탄, 오만의 파국으로 보인다. 끝내 자기 철학의 언어로 수습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결단한 에이드리언은 한낱 도망자에 불과한 나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에이드리언은 검시관에게 자살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해 놓았다.
“삶은 바란 적이 없음에도 받게 된 선물이며, 사유하는 자는 삶의 본질과 그 삶에 딸린 조건 모두를 시험할 철학적 의무가 있다. 만약 바란 적이 없는 그 선물을 포기하겠다고 결정했다면, 결정대로 행동을 취할 윤리적, 인간적 의무가 있다.
솔직히 이게 무슨 개소린가 싶다. 그 누구도 바란 적 없는 선물(자신의 여자친구의 엄마와의 불륜으로 태어난 아이)을 세상에 남겨두고 홀로 도망가는 인간이 윤리적, 인간적 의무를 운운한다니. 나 참.
그렇다면 지성인인 에이드리언은 왜 이런 비이성적인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을까? 내가 가장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이는 지성인들이 오히려 사이비 종교와 다단계에 더 쉽게 빠지게 되는 원리와 비슷한 것일까? 에이드리언의 철학적 이성이 왜 무너졌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 그는 이성적이지만 동시에 위험할 만큼 ‘사유’ 중심이었다.
그는 도덕적이기보다 모든 걸 사유와 논리의 문제로 판단한 인물로 ‘행동의 윤리가 아니라 존재의 의미를 묻는 사람’이었다. 이런 인물은 삶의 윤리보다 (현실 감각 없이) 자기 내면의 논리에 빠질 위험이 크며, 이러한 논리는 ‘나는 옳다’는 이상한 자기 확신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확신은 ‘나는 속지 않아’ ‘그 안에서 진실을 보고 있어’와 같은 사이비 종교에 빠진 지성인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2) 그의 철학적 성향에는 이해하고자, 구원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에이드리언의 철학적 성향은 누군가의 고통에서 구원하려는, 할 수 있다는 오만과 연민으로 흐를 수 있다.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일수록 타인의 고통에 뛰어들며 그것을 정의라고 착각한다. 이해할 수 없는 상대를 이해하고, 구원하고자 행한 이상이 비이성적인 경계를 오히려 더 쉽게 넘게 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사유의 비극 혹은 철학자들이 경계해야 할 오류가 아닐까.
에이드리언을 통해 지적 능력과 도덕적 성숙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5.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상상보다 더 잔혹했다.
토니는 어렴풋이 예감했다. 베로니카의 어머니와 에이드리언이 만나면, 무언가 자신이 겪은 것과 비슷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그리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상상했던 ‘사달’은 단순한 연애의 갈등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운명을 뒤틀어버리는 파국이었다. 예감은 맞았지만, 그 파국의 깊이를 이해할 정도로 그는 성숙하지 못했다.
결국, 제목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속 예감이란, “이 일이 잘못될 것 같다”라는 예언이 아니라 “나는 그 일이 벌어질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라는 고백이었다. 문제는 예감이 아니고, 그 예감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책임에 있다.
이 책은 ‘기억’의 이야기에서 ‘책임’의 이야기로 바뀐다. 그리고 우리에게 지나온 시간에 대한 잔혹한 성찰을 선사하며, 지금부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질문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