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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이김 Apr 29. 2021

선인장과 고슴도치


이하이의 ‘Rose’라는 노래엔 이런 가사가 나온다. 내 사랑은 새빨간 Rose, 지금은 아름답겠지만 날카로운 가시로 널 아프게 할 걸. 내 맘을 갖고 싶다면 내 아픔도 가져야만 해요. 언젠가 반드시 가시에 찔릴 테니까.


장미는 아름다워서 갖고 싶지만 아픔을 감수해야만 하는 대상으로 자주 인용된다. 화려한 색깔과 소유욕을 자극하는 모양으로 모두의 시선을 끌지만 가시 때문에 함부로 꺾을 수도 없는 꽃. 그 놈의 가시때문에 장미를 안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다. 문제의 가시에 관해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식물이 있는데, 그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식물이자 우리 엄마가 가장 싫어하는 식물이다.


- 장미는 예쁘기라도 하지, 도대체 선인장은 뭐 볼 게 있노?


꽃집에 가면 늘 선인장부터 먼저 돌아보는 나에게 엄마는 매번 저렇게 물었고, 엄마의 힐난조에도 나는 애수에 젖은 눈빛으로 대답한다. 척박한 황무지에서도 마침내 피어오르는 그 강인한 정신을 보세요, 엄마. 내가 아무리 낭만적으로 열변을 토해도 엄마는 이미 돈나무를 사면 정말 돈이 굴러 들어 올지, 꽃봉오리가 한창 무르익어 집에 가져가자마자 피어날 꽃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기 바쁘다. 엄마가 선인장을 싫어하는 이유는 황야에서 살아남는 꿋꿋한 정신이고 뭐고를 떠나서 식물이란 놈이 그렇게 가시투성이인 것이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 가시있는 것 좀 좋아하지 마라.


- 왜요?


- 가시있는 것들 치고 정상이 없다.



엄마딸도 정상은 아니잖아요, 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데 그 말을 그대로 했다간 등짝을 맞을 것 같아서 혀로 눌러 삼킨다. 가시 있는 것들이 정상이 아니란 말은 가시를 세운 그 행태가 예민하다거나 남과 쉽게 어울리지 못해서 그런 것 아니냐는 뉘앙스를 풍기는데, 나는 선인장의 대변인으로서 가시를 그렇게밖에 해석하지 못하는 인식에 가슴이 아플 뿐이다.


살아남기 힘든 환경에서 자기를 방어할 유일한 수단일 뿐인 가시가 왜 이런 오해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선인장에게도 원래 여느 식물이라면 다 갖고 있는 무성한 잎이 있었다. 하지만 살인적인 환경에서 수분 증발을 막기 위해 차츰 진화하여 지금의 가시가 되었다. 사막의 동물들이 물이 부족해 식물을 물어 뜯거나 식물을 아예 먹이로 삼도록 진화하기도 했으니 가시는 자신을 물어 뜯으려는 동물로부터의 방어구 역할도 톡톡히 하게 됐다. 선인장의 가시는 남들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전략일 뿐이다. 선인장의 가시에 손가락질을 하는 이는 분명 본인이 아무 잘못도 없는 선인장을 먼저 건드려 찔려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선인장이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다른 이를 찌르고 다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당신이 나를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나도 당신을 찌를 일이 없다.


하지만 엄마는 이런 가시의 미학(?)을 전혀 이해해보려는 의지조차도 없었고 그렇게 선인장에 대한 깊은 비호는 계속되었다. 엄마가 가시를 이해하게 된 것은 선인장은 아니지만 그와 유사하게 생긴 작은 손님이 우리집에 오면서 부터다.


갓난아기 시절에 영문도 모른채 김지영에 의해 우리집에 온 고슴도치는 첫 날부터 우리 가족들을 향해 킁, 킁, 거리며 그렇게 가시를 세워대었다. 고슴도치를 실제로 보고 만져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는데 정말 밤송이처럼 가시는 탱천하고 몸이 한껏 부풀어 있었다. 사실 그 때는 그게 몸을 일부러 부풀리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중에 우리가 서로에게 적응을 하고나니 알게 된 사실인데, 고슴도치는 자기 마음대로 가시를 세웠다가 내릴 수가 있다. 친밀감을 느끼는 대상에게는 만져도 아프지 않도록 가시를 착 다 내린다.


긴장감이 일체 없을 때 아기 고슴도치의 크기는 가시를 세우며 킁킁 거릴 때와 차이가 심했다. 우리 고슴도치는 원래부터 왜소한 체격이었고 심지어 배가 보이도록 몸을 뒤집어 보면 가시 없는 몸은 그렇게 말랑말랑할 수가 없었다. 고슴도치가 우리 가족 모두에게 가시를 세우지 않을 무렵이 되자 엄마는 고슴도치의 착 내려앉은 가시와 말랑한 뱃가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 그동안 뻥튀기 했네. 별 것도 없는 게.

 

엄마는 고슴도치에게 그렇게 한참을 찔린 후에야 가시있는 것들이 가시를 세우는 이유를 이해한 것이다.


- 니는 가시 없으면 이 험한 세상을 어찌 살아갈래?


엄마는 어느 날 고슴도치를 보고선 그렇게 물어보더니 가시말곤 통 가진 게 없으니 불쌍한 것이라는 말까지 했다. 가시마저 없다면 이렇게 연약하고 보드라운 게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겠냐며 말이다. 엄마의 말을 들으며 나는 엄마가 그동안 말은 하지 않았을 뿐, 내가 왜 선인장을 좋아하는지 실은 알고 있었던게 아닐까 싶었다.


황무지에서 피어난 강인한 정신? 물론 그것도 맞지만 내가 선인장과 나를 동일시하며 때로는 측은함을 느끼고 때로는 응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엄마는 분명 알았을 것이다. 내가 걸핏하면 선인장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은 홀로 상경해서 일하며 살기 시작한 이후였으니 엄마는 뜬금없는 선인장의 등장 이유를 어느 순간부터는 알았을 것이다. 얘가 아주 애쓰고 있구나.


그 날 고슴도치의 보들보들한 살결을 쓰다듬으며 엄마가 했던 말은 비록 심한 비유와 상징이 사용되었긴 하나 분명 나를 향한 응원의 말이라고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있다. 사실 별 것도 없어서 가시 아니고선 도무지 살아갈 수가 없는 연약한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황무지에서 꿋꿋이 살아가는 불굴의 의지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없는데 있는 척한다고 누군가 손가락질을 할 지라도 일단 그렇게 살아남고 버티다 보면 언젠가 선인장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왜, 선인장의 가시도 원래는 보드라운 잎이었다지 않나.



* 사진은 충동구매한 스타벅스 이번 시즌 MD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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