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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이김 Apr 21. 2021

전화주셔서 감사해요


엄마아빠는 이제 나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하고, 동생은 취업으로 본인이 제일 힘들고, 친구들도 저마다 스케줄이 다른 데다 누구 하나 쉽게 사는 사람이 없다. 별 대안이 없어서 결국 동종업계 사람들끼리 헤쳐 모이는 것 같은데 그렇게 만나도 하나같이 모두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은 일을 겪고 있다.


오늘 내가 맡은 일이 공식적으로는 끝났는데 끝나고 나서 개운한 것이 아니라 나조차도 낯설정도로 부정적인 감정에 한동안 휩싸여 있었다. 직장 상사가 뭐라고 하든 애초에 타격이 그리 크지도 않은데 왜 그럴까, 이런 소리 한 두번 듣는 것도 아닌데 왜 이깟 소리에 마음이 심약해진 걸까 생각하다 이런 데 퇴근 후 시간을 또 낭비했다는 데서 또 한번 화가 난다.


내가 일이 끝났는데도 개운하지가 않고 이렇게 부정적 감정에 끝없이 빠질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고 말하자, 같은 일을 하는 친구가 그랬다. 개운할 수가 없지. 앞으로도 계속 이런 날들이 반복될 테니까.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이 다들 각자의 엿 같은 점을 안고 그렇게 오랫동안 일을 하며 살아왔는지 까마득해졌다. 지금이 너무 싫어서 이 상황을 개선하려면 무언가를 해야하는데, 무언가를 하기엔 직장에서 너무 많은 에너지를 빼앗긴다. 늘 그렇게 아무것도 못하고 지친 채로 잠드는 밤이 계속 반복되면 삶의 의미는 애저녁에 잃은 것 같고 남은 평생동안 이렇게 살게 될 것만 같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친구와 그런 메시지를 주고 받는데 갑자기 아는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왠일로, 하며 받으니 그 언니도 아니다다를까 직장에서 몹시 기분 상하는 일이 연이어 있었다. 생각해보면 자기 기쁜 일을 굳이 알리려고 전화를 거는 사람은 없다. 마음 속을 꽉 막고 있는 그 갑갑한 체기를 해소하려면 누구한테 무엇이든 말해야 하니까 곁에 누군가가 없으면 연락이라도 해야한다. 내가 친구와 메시지를 주고 받는 동안 바로 전화를 걸었던 언니의 심정은 더 절박했을 수도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앞으로 별 수 없이 이대로 살아야 한다는 현실 인식, 무언가를 한다고 해도 시간과 에너지가 충분하지 않다는 점, 그렇게 해도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 무엇보다도 더 나은 대안이 있기는 한 건지 알 수도 없는 점이 균열없는 뫼비우스를 만든다. 찾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출구가 있을 줄 알고 들어갔는데, 거기가 무한 반복의 루트라니.


밤 중에 오죽했으면 전화까지 한 그 심정이 내 마음과 하나도 다르지 않아서 기억에 남을 것 같은 밤이다. 항상 참고, 넘어가주어야만 하며, 그럼에도 일 더 하라는 소리를 듣는 당신의 전화를 내가 받을 수 있다면 전화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이런 날, 홀로 이런 기분으로 있는 이에게 누군가의 전화만큼 위로가 되는 것은 없다. 전화를 누가 먼저 걸었든 상관없이 다들 할 말이 많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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