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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이김 Jun 06. 2021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안하던 짓을 했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꼭 일이 생긴다. 그렇지만 그 일이라는게 반드시 안 좋은 것만 있는 건 아니다. 20살까지, 그러니까 초, 중, 고교 과정을 모두 제도권 내에서 이수하고 대학 입학까지 마친 나는 단 한번도 부모 말을 어겨본 적 없는 순한 딸이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정말 순해서가 아니라 이 대한민국 사회에선, 아니 어느 사회에서든 '표준'으로 규정되어 있는 교육 과정을 밟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는 계산에서였다. 무엇을 향한 가장 빠른 길이냐면,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이다. 예전에 가수 박정현이 그랬던가? 집에서의 탈출을 늘 꿈꾸며 대학에 들어가자 마자 독립을 하기 위해 그 전까지 내내 공부를 열심히 했었다고. 가수 헤이즈도 부모님이 음악하는 것을 워낙 반대해서 우선 공부부터 했다고 한다.


공부 잘해서 손해볼 것 하나도 없는 사회에서 다행스럽게 공부머리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 방법을 택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수도 있다. 취업이 보장되는 대학교에 날 밀어넣으면서 우리 부모님은 아주 만족스러워 했다. 내가 대단한 고소득 전문직이 되길 바라는 분들도 아니시고, 이제 이 대학에 왔으니 취업은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고 어쩌면 20-30대 때 가장 골치가 아픈 문제를 20살에 한방에 다 해치운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부모님 입장에선 기쁠 수 밖에.


하지만 거기서부터 나는 안하던 짓을 하기 시작했다. 자타공인 부모 치마폭 없인  살았던 마마걸이지만 갑자기 혼자서 유럽을 한달  여행하더니 (우리 부모님은 아직도 내가 혼자 여행한  모른다.) 대학 생활 그냥 즐기면서 놀라는 부모의 말을 무시하고,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공부를 시작했다. 음악과 무용을 배우고, 영어 실력을 늘리면서 대학생활 3년을 보내니 4학년이 되어 취업 시험을 쳐야할 때가 왔다.


이미 지난 3년간 사소하게 안하던 짓을 하는데 단련이 된 나는 취업을 할 지역 결정을 놓고 부모의 조언을 무시하고 서울로 가는데 한번만에 성공했다. 엄마가 한번 떨어지면 이젠 다시 기회는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경제적 독립을 빌미로 한층 더 자유를 찾은 나는 그 이후로도 해외에 홀로 여행을 다녔다. 그것도 계속 하다보니 이젠 별로 겁도 없어졌는지 2019년에는 아예 아프리카 남쪽의 한 나라에 가서 1년 동안 살다가 왔다. '아프리카'라는 단어를 듣고 아빠는 눈을 질끈 감았고, 엄마는 당장 취소하라며 소리를 질렀다.


꿈꿔온 대로 20살 이후 안하던 짓을 계속 했지만,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짓은 따로 있었다. 하지만 차마 대놓고 그 짓을 하진 못했는데 그건 내가 아직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정면으로 도전하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소한 것부터 큰 것까지 내가 했던 모든 안하던 짓들은 최종적으로 이 짓을 위한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글을 쓰고 싶었고, 정확히는 내가 문학이라는 예술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글쓰는 사람에게는 이런 인정 욕구가 다들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글을 쓰기만 하는 것과 재능을 인정받는 것은 천지 차이다. 한 때 이 짓에 정정당당하게 도전하지 못했을 땐 글을 쓰기만 하는 걸로도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가끔 해서 마음을 정리하고 정화하는 효과를 주는 건실한 취미 생활로서의 글쓰기랄까.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부터 글을 취미이자 특기로 기재해왔던 나로선 취미와 특기라는 꼬리표를 이제 그만 떼어버리고 싶었다. 성인이 되었으니 취미와 특기를 적을 일도 없는데, 지금까지도 이 짓을 한다면 이젠 '재능'이라는 단어가 더 걸맞지 않나 싶었고.


2019년, 아프리카에서의 1년은 여러 방면에서 나에게 큰 전환점이 되었다. 그 1년은 내가 저지른 안하던 짓 중 가장 스케일이 컸고 그 규모에 걸맞게 귀국 후 나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년 동안 나는 고독한 수행자처럼 별로 좋지도 않은 여건에서 글을 썼지만 그 해 글을 가장 많이 썼다. 한국 땅을 밟기 직전 마지막 비행에서 내가 했던 생각은 1년동안의 낭만어린 반추가 아니라 당장 2020년이 되어 있을 고국에서 가장 먼저 무슨 짓을 할 것인가였다. 별 짓을 다 했지만 나란 사람에게선 결국 이 짓을 빼놓을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는 글을 그저 쓰는 것을 넘어서서 어떤 인정을 받아 가시적인 성과를 내보자고 마음 먹었다.






그로부터 1년 6개월이 흘렀고, 어제 나는 친구와 함께 광화문 교보문고에 갔다. 광화문 교보문고에 갈 때마다 설레고 기분 전환이 되는건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서점인데다 서울의 중심에 있어서인지 아니면 그 속의 탐독하는 사람들이 멋진 분위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인지 궁금해하면서 늘 감상자 혹은 구매자로 갔었다. 하지만 어제 교보문고 방문에서 내 위상(?)은 좀 달라졌다. 친구가 그 교보문고에 단 한 권 있는 나의 앤솔로지 시집을 사겠다고 했고, 나는 광화문 교보문고에 감상이나 구매를 하러 간 것이 아니라 작가로서 사인을 해주러 동행했다.



귀국 비행기에서 앞으로 할 안하던 짓을 계획하던 나는 정말 그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의구심없이 그 짓을 했다. 글쓰기에 취미와 특기라는 꼬리표를 뜯어버리고 재능이라는 귀한 라벨을 붙이기 위해 글을 새로이 썼고 여태 미완성 상태로 있던 메모를 한 편의 완결된 작품으로 세상에 내보냈다. 비록 이 시집은 내 단독 저작물은 아니지만 그런 것은 우리에게 중요치 않았다. 취미 수준으로 끄적여 놓았던 조잡했던 메모가 수 년후 다시 이를 갈고 덤벼든 나에 의해 새로이 탄생되었고, 그것이 에디터의 선택을 받아 책으로 출간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내가 생각하는 내 취미와 특기 말고, 다른 사람에 의해 인정과 선택을 받아 몇 안되는 나만의 활자들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이 시집은 독립출판물이라 그 곳엔 1권 밖에 없지만 사실 나와 친구는 교보문고에 내 책이 들어간 것부터가 신기했기에 그마저도 영광스러웠다. 광활한 교보문고 속 드넓은 서가 속에서 유일한 책을 내 친구는 금방 찾아냈고, 나에게 사인을 부탁했다. 우리는 그 순간을 모두 사진으로 남겼고, 친구는 곧 사인을 해달라고 했다. 나는 그런 부탁을 받을 것이라고까진 생각을 안해서 꺄르르 웃다가 사인이 없다고 좀 수줍어했다. 하지만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사인하는 영광을 마다할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수줍어도 할 건 해야한다.


나보다 더 자랑스러워 하는 친구 덕분에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안하던 짓을 할 수 있었던 나는 사인을 하면서 이 영광에 대한 보답으로 몸값을 있는 힘껏 더 올려보겠다고 했다. 광화문 교보문고에서도 안하던 짓을 했는데, 이제 나는 더 큰 곳에서 더 생각지도 못한 안하던 짓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참, 그러고보니 얼마 전에 다른 시가 다음편 앤솔로지 시집에 당선되었다는 메일을 받았다. 곧 교보문고에 다시 올 수 있게 되면 그 기념으로 어떤 안하던 짓을 해볼 지 즐겁게 상상하면서 오늘을 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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