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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이김 Apr 12. 2021

혹시 아빠도 꼰대가 아닐까


나는 대체로 부모님 말을 잘 들었다고 자부하는 편인데 엄마도 '비교적 키우기 쉬운 딸'으로 마치 동물 백과사전에 등재하듯이 인정을 해줬다(ㅋㅋ). 엄마와 딸은 서로 대화할 일이 많으니 그렇다 치고, 아빠와 딸 사이는 집집마다 좀 다르겠지만 아빠는 여태 나에게 별로 쓴 소리를 한 적이 없다. 이렇게 말하면 대화가 별로 없는 부녀지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난 내 이상형이 아빠라고 굳이 말하고 다니는 사람이다. '왜 이 세상엔 아빠같은 남자가 없는거야?'를 가족들 사이에서 외쳤다가 매번 우리집 여자들의 거센 반발을 사는 건 흠이지만.


아빠가 이상형까지나 된 데 ‘우리 아빠니까’와 같은 맹목적 이유를 빼면 가장 큰 하나가 남는다. 내가 아빠와 사이가 이만큼 좋은 건 아빠의 열린 사고방식 덕분이다. 아빠는 내가 무엇을 하든 지지하니까 남들 안 해본 것을 한다고 해도 그 시절도 한 순간이니 후회없이 살아야 한다며 해보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아빠는 젊은이들의 인생멘토가 따로 없는데 요즘 아빠와 내가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이 부딪쳤다. 사춘기도 훨씬 지난 이 나이에 아빠와 통화하면서 사춘기의 절정을 지나는 딸처럼 아빠에게 신경질을 많이 내서 그렇다. 다다다다 쏘아붙이고 나서 내가 좀 모자랐구나, 하고 금방 후회도 하지만 아빠한테 어떤 특정한 말을 들으면 뚜껑 딴 콜라처럼 쏟아올라오는 화를 참지 못하고 그렇게 말하고 마는 것이다.


이상형에게서 들어도 뚜껑 열리는 대화 주제로 정치, 종교 등이 있지만 이젠 한 가지 더 추가해야 한다. 바로 직장 내 갈등에 대처하는 태도다. 아시다시피 직장 내 갈등 중 가장 골치가 아픈 건 인간관계와 얽혀있다. 애시당초 내가 추진하고 내가 알아서 마무리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건 갈등 축에도 못 낀다. 내가 선택한 일도 아닌데 나에게 주어졌고 그렇다고 내 마음대로 처리할 수도 없는 일이라는 데서 이 모든 불화가 시작된다고나 할까? 직장 내 갈등에 대처하는 태도는 크게 반항하거나 순응하거나 둘 중 하나인데 대개 서로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반항자는 순응자를 정당한 요구조차도 못하는 겁쟁이라고 생각하며, 순응자는 반항자를 받아들이면 될 걸 굳이 피곤하게 사는 불평러라고 생각한다.


하라는 자와 하기 싫지만 해야하는 자의 줄다리기는 언제나 눈물겹고, 조직 사회에서 언제나 그 승부는 젊은이가 와르르 무너지면서 끝난다. 결국 내가 아무것도 바꿀 수 없고 난 그저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하는 것을 깨달을 때 내 억장도 같이 무너지면서. 왜 이렇게까지나 해야 하는지 모를 불필요한 서류와 보고가 너무 많다. 처음엔 내가 뭘 잘 몰라서 그런가 싶었지만 일한 지 5년이 되어가는 지금에선 진실을 알고 있다. '처음이라 네가 뭘 잘 몰라서'는 상사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생신입을 길들이기 위해 가장 먼저 행하는 가스라이팅이다.


여러 사례를 보면서 굳이 그렇게 복잡하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 가장 쉬운 방법을 알고 있고, 다른 대안을 알고 있으면서도 단지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의해 가장 멍청하고 오래 걸리는 방법으로 일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짜증 유발자들의 특징은 원래 메인 업무도 아니고 꼭 곁다리로 찾아와 별 것 아니니까 해달라는 식으로 얹어졌다가 귀찮게 되어 정작 중요한 일을 하는데 지장을 준다.


나는 인간관계가 넓지 못하고 소수의 친구들과 깊이 사귀는 편인데, 이를 좀 더 솔직한 언어로 표현하자면 나와 함께 갈 사람과 가지 않을 사람에 대한 구분이 확실하다는 뜻이다. 갈등을 안 만드는 정도를 넘어서서 갈등을 쉽게 빚을 것 같은 사람과 교류 자체를 잘 안 한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고, 변한다고 해도 그건 내 노력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사람을 바꾸려고 애쓰기 보다는 그냥 안 만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어디 직장 내 사람들이 안 만나고 싶다고 안 만날 수 있는 사람이던가? 이래서 다들 오늘도 욕만 늘어가고 로또에 당첨되기만을 빈다.


내가 화가 났던 그 날 밤, 나에게 다정하게 전화를 건 아빠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배신감이 들만큼 너무나도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 그런 것도 계속 해봐야 는다. 시간 지나면 괜찮아진다.


- 그런 게 사회 생활이다.


- 원래 직장이 그렇다.



그러니까 아빠의 요지는 그 모든 일들이 다 불필요하고 짜증나는 것이 맞음에도 불구하고 원래 직장이 그러니 네가 다 이해하고 받아들이라는 말이었다. (그 방식이 별로라는 것은 나도 알지만) 원래 그렇게 해야하는 건데, 그걸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은 내가 평소에 알던 다정한 아빠의 모습과는 너무 달라서 가히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우리 아빠 맞아요? 영원한 내 이상형 맞으시냐구요.


나는 아빠의 뻔뻔하기까지한 태도에 깊은 실망을 하여 전화를 그대로 끊어버릴 뻔 했으나 뒤늦게 상황을 알아챈 아빠의 부단한 노력으로 전화는 재개 되었다. 계속 이야기하다보니 알았는데 아빠는 내가 무언가를 건의하고 의문을 제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가 너무 당돌한 짓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에도 물론 그런 사람들이 조금은 있었겠지만 집단 내 반항자들의 비율은 그 때보다 지금이 더 높은 것 같다. 아빠 시절의 사람들은 워낙 경직된 문화 속에서 자라서 그런진 몰라도 그런 것을 감히 자신이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못한 것 같다.


늘 뭐든지 해보라는 아빠의 열린 태도에 나는 문제 제기를 하는 딸로 자라났으나 정작 아빠는 직장 내에서 반항자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그제서야 퍼뜩 들었다. 그동안 나는 당연히 아빠가 직장 내에서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인 줄만 알았다. 사실 진짜 어땠는지 진실은 모르겠지만 그렇게 전 직장생활 내내 반항자였다면 아마 피 말려서 회사를 그렇게 쉼없이 다니지 못했을 것 같다.


친구는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모 그룹에서 교육 자원봉사 중 인데, 자원봉사자에게 굳이 한 학생당 리포트를 한 개씩 개.별.적.으로 다 만들어오라고 했단다. 자원 봉사자라면 무릇 감사합니다하고 어떻게든 일을 편하게 만들어 줄 생각을 해야할 텐데 주최측은 그런 귀찮은 서류 작업을 꼼꼼히도 시켜서 자원봉사자들의 자발적 욕구를 심각하게 떨어뜨렸다. 웃긴 건 주최 측이 요즘 초등학생들도 그렇게는 안할 법한 조잡한 구글 기본 프레젠테이션 몇 장만 던져주고선 정작 봉사자들에겐 정성스런 결과 보고서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게 다 말이 자원봉사지 사실상 스펙 하나하나가 아쉬운 학생들을 철저히 이용하는 갑을 관계에서 일어난 일이라 그렇다. 그래 놓고선 조직 내의 혁신을 위해선 젊은이들이 적극 나서야 한다고 입이 마르고 닳도록 강조한다. 정작 혁신을 위해 개혁안을 내놓으면 번번이 좌절시키는데 이제 더이상 누가 나서겠는가? 우리 모두는 피곤스럽게 최치원이 되고 싶지 않다. 혁신은 무슨 혁신. 이런 쓸데 없는 걸 안하는 게 혁신이다.


아빠는 늘 내 영원한 이상형이었으니 나는 아빠같은 상사라면 모든 직원에게 대환영을 받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 날 전화를 끊으면서 그건 전적으로 콩깍지가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쓰라린 현실을 알았다. 나는 직장 생활이 원래 그렇다는 것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아빠도 어쩔 수 없는 꼰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분명 나와 같은 처지의 젊은 사원들에게 저렇게 말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닐 것이다. 덕분에 비운의 최치원은 되지 않아 가정은 잘 지킨 것 같은데 그것보다 내가 아빠를 직장 상사가 아니라 가족으로 만난 것이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크다. 아빠, 우리도 회사 생활에서 만났다면 서로 엄청 스트레스를 주고 받았겠죠?


그러고보니 전생에 우린 다들 무슨 악연으로 얽혔기에 이번 생에 직장에서 만나게 된걸까. 아빠, 다음 생에도 우리 절대 일로 만난 사이는 되지 말아요. 아빠를 꼰대라고 부르고 싶진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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