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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여행] 1月의 호찌민은 꽤 적절하다

화려하지만 우아한, 복잡하지만 분주한, 하루종일 맑은 영감의 도시

by 금요일 오후반차

2024년 1월 1일 호찌민에 있었다. 카운트다운을 외치는 국적을 알 수 없는 인파 속에 섞여 마천루들이 펼쳐진 하늘에 형형색색 수놓아지는 폭죽소리를 들으며 새해를 맞이했다.


이탈리아어 베트남어 프랑스어들이 뒤섞여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여기가 어디인지 나는 누구인지 아득한 이곳에서는 내 입에서 어떤 언어가 나와도 놀라지 않고 내가 무엇을 전공했으며 뭘 하는 사람인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내가 나에게 온전히 더 집중할 수 있는 곳. 이곳에서 깨달은 몇 가지 사실은 나는 해 질 녘의 산책을 좋아하고,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메뉴를 탐색하기 좋아하고, 형광 색깔의 옷이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처음 호찌민을 방문했던 것도 1월이었다. 자정에 다다를 무렵 도착한 호찌민은 어둠이 잡아먹은 도시 같았다. 내가 탄 택시와 비슷한 몇몇의 택시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조명이 들어온 노트르담 대성당, 오페라하우스, 중간중간 보이는 공원들이 조용히 빛을 내며 호찌민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밤의 호찌민은 ‘미드나잇 인 파리’가 생각날 만큼 조용하고 낭만적이었다. 아무도 없는 이 거리를 혼자 걸어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걷다 보면 헤밍웨이나 달리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거리였다. 하지만 나 혼자는 무리라는 생각에 이내 포기하고 이른 아침 갓 세수한 맑은 호찌민의 얼굴을 기대하며 잠들었다.

호찌민은 세련된 도시미를 뽐내기 바쁜 다른 동남아 대도시들에 비해 확실히 독특한 분위기를 가졌다. 파리의 건축물들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성당, 우체국, 오페라하우스, 시청 등이 도심 곳곳에 있고 사이사이 화려하고 세련된 빌딩들이 섞여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실제로 호찌민은 프랑스 식민시절[1] 당시 프랑스인들이 자신들이 살던 동네를 그대로 재현한 새로운 도시였다고 한다.


프랑스인들은 이곳에서 예배를 드릴 성당이 필요했고, 향락을 즐길 오페라 하우스가 필요했으며, 도시를 정비할 시청이 필요했다. 매일 먹던 바게트와 아침이면 잠을 깨워줄 커피도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게 호찌민이 생겨났다. 파리에 있는 노트르담을 그대로 본떠 축소판인 노트르담 성당이 호찌민에 생겼고 인도차이나의 우편 전신시설인 중앙우체국[2] 이 생겼다. 밀이 나지 않는 베트남에서 쌀가루로 바게트를 만들기 시작했고 작은 커피 묘목들을 가져와 재배하였다.

1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베트남에는 프랑스 문화의 영향이 많이 남아있다.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을 때 지어졌던 건축물도 곳곳에 많이 남아 있으며 제도적인 것은 물론 식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베트남 정부나 국민들의 프랑스에 대한 감정이 마냥 적대적인 것만은 아니다. 베트남 정부에서도 "과거는 과거고 미래가 더 중요하다"라고 프랑스를 용서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베트남인들 사이에서도 프랑스 식민지 잔재 청산에 대한 이야기는 미미한 편이다.


호찌민은 프랑스 식민 지배의 역사가 문화의 일부로 자리 잡아 도시의 화려함 속에 담긴 고전적인 우아함이 더해져 특별하게 느껴진다. 동남아에 살짝 더해진 유럽 감성은 호치만의 큰 매력이다. 까라벨 호텔의 루프탑 바에서 반짝이는 호찌민의 도시를 바라보며 칵테일 한잔 하면 괜히 내가 고전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수도 있으니 주의하자. 현실은 케이줌마일 뿐이다.

“요즘은 어디가 여행하기 좋아요?” 여행사에 근무하면서 제일 많이 들었던 질문이다.


멋모르던 어린 시절엔 “요즘은 다낭이나 오사카 진짜 많이 가시고요. 부동의 허니문 1위는 10년째 푸껫이에요. 떠오르는 신규 여행지는 푸꾸옥이나 치앙마이 같은데도 있고요.” 이렇게 알고 있는 지식을 최대한 풀어내기 바빴다.


입사 10년이 지나고부터는 나의 대답도 조금씩 달라졌다. “글쎄요.. 저는 여행의 8할이 날씨인 것 같아요. 여행하시려는 시기에 날씨가 제일 좋은 지역을 가는 게 좋은 것 같아요. 누구랑 가시는지 뭘 하고 싶은지도 중요한 것 같고요.”라고 말한다.


아무리 멋진 곳에 가도 일정 내내 비 오고 흐리고 춥고 예쁜 사진 하나 못 건진 여행은 기억을 포장해 보려 애를 써도 “좋은 추억이었다” 말고는 표현할 말이 없다. “좋은 여행이었다”라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런 이유에서도 1월은 호찌민 여행에 가장 적합하다. 아침저녁으로는 시원하고 기온은 높지만 습도는 높지 않아 추운 겨울에 따듯한 동남아를 떠올렸을 때 우리가 상상하는 딱 바로 그 날씨다. 그래도 최고 기온이 30도에 육박하니 덥지 않은 건 아니다.


위아래로 긴 베트남은 북부와 남부의 날씨가 매우 다르다. 두 지역의 최저기온이 10도 이상 차이가 날 정도로 아예 다른 계절이다. 하노이는 겨울이면 꽤나 쌀쌀하고 초가을 날씨 정도라 얇은 니트를 걸쳐야 할 정도고, 중부에 있는 다낭 역시 겨울엔 선선해서 수영을 즐기기엔 무리가 있다. 반면 남부는 1년 365일 더운 날씨이다. 그나마 겨울이 조금 덜 덥고 건기라 여행하기 제일 좋은 계절이라고 볼 수 있다.


1월에는 제법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호찌민의 분주한 아침을 즐길 수 있다.

베트남은 인구가 1억 명인데 전체 평균 나이가 32세다. 학자들이 말하는 소위 ‘황금비율’인 셈이다. 경제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경제 인구가 탄탄하게 받쳐주며 부양해야 할 노인과 앞으로 경제 동력이 될 아이들이 적절하고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경제의 수요와 공급 측면에서 중장기적으로 전망이 매우 밝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호찌민은 부지런하다. 아침 일찍부터 열려 있는 카페도 많고, 점심 장사하려면 한참이나 멀었을 텐데 아침부터 식당 앞을 쓸고 닦는 사람들도 있고, 학교 문도 일찌감치 열려있고 호찌민의 아침은 서울의 아침보다 더 빠른 느낌이다. 아이를 앞뒤로 태우고 지나가는 스쿠터와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뭔가를 해야 할 것 같고 새로운 목표나 계획도 떠오르고 영감을 받기도 한다.


1월이면 몇 번 쓰지도 않을 거면서 괜히 새 다이어리를 사고 새 노트를 사고 새해에 이루고 싶은 목표나 계획을 끄적여 보기도 한다. 물론 나만 그럴 수도 있다. 적막한 카페에 들어가서 분주하고 바삐 움직이는 호찌민 사람들을 보며 생각을 가다듬어보자. 마치 화면 속 지나가는 장면들처럼 흘러가는 풍광을 보며 내 생각이나 사고가 유연하게 흘러가게 내버려 두자. 그러다 보면 기가 막히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고 이루지 못할 거 같은 원대한 목표가 가깝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1월엔 호찌민에 가자.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꿈틀거리는 욕망을 찾을 수 있는 곳. 1월의 호찌민은 꽤 적합하지 않은가?


[1] 서구 열강이 전 세계를 두고 장악하려던 시기 인도차이나로 진출을 원하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선교사 박해사건을 빌미로 1858년 베트남 중부지방을 시작으로 1859년엔 남부의 자딘 성을 함락하였고, 1867년에는 남부 지방 전부를 완전히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후 프랑스의 해군장교 앙리 리비에르가 응우옌 왕조 군대와 충돌하다 1883년 전사한 계기로 1883년 8월 프랑스와 베트남 사이에 맺어진 아르망(Harmand) 조약에 의해 베트남이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면서 모든 영토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2]1886년에 건설을 시작하여 1891년 당시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우편 · 전신 시설로 완성했다. 철골 설계는 귀스타브 에펠이 했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당시는 역사)을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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