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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밤 Apr 28. 2024

고3교실(1)



1999년 3월 2일.


고3의 첫날은 차분했어. 수능 D-day를 자연스레, 꼭 그래야하는 듯이 누군가 칠판 구석에 썼던 날. 나는 애써 긴장감을 감추고 있었어. 긴장하면 촌스러워 보일 것 같았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지는 것만 같았지.


이런 나와 다르게 너는 여유로워 보였어. 귀에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옆에 앉은 나와 아직은 인사할 때가 아니라는 듯, 어차피 말을 트고 지낼 사이니까 유예기간을 두어도 상관없다는 듯 하품을 하더니 엎드렸어. 난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앉아 곁눈질로 엎드린 너의 등을 바라보며 생각했어.

얘는 뭐가 이렇게 여유로울까. 우린 이제 고3인데.


선생님이 들어오시고 임시반장이 인사를 했어.

이제 너희들은 고3이다.

알아요.

수능까지 며칠 남았는지 이미 적어놨구나, 달려 보자.

달려야 하는 군요.

임시 반장은 번호 순으로 하겠다, 오늘 1번이 했으니 내일은 2번.

매년 똑같네요.

선생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불쑥 불쑥 올라오는 대답을 내가 애써 삼키는 동안, 너는 모든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듯 나른한 눈으로 앞만 바라봤어.

이어폰은 뺐구나.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지.


안녕, 잘 지내보자. 나는 권희수야.

드디어 인사를 할 시간이 되었다는 듯 네가 했어. 흔해 빠진 드라마의 한 장면같아서 나는 피식, 웃음이 났지. 권희수라는 세 글자가 찍힌 명찰이 눈에 들어왔어.

중성적인 이름이네. 나는 이소영이야. 너무 여성적이지. 엄마가 좀 더 강한 이름을 지어줬으면 좋았을 걸.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우리는 첫날을 맞이했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이 애를 어째서 이제서야 본 걸까. 지난 2년 간 한 번쯤은 복도에서 마주쳤을텐데.

나는 네가 우주에서 뚝 떨어진 외계인 같았어. 명문고로 소문이 난 우리 학교에서 저렇게 흐리멍덩한 눈을 하고 다녔다면 눈에 띄었을텐데 말이지. 뭐, 그래도 나쁘지 않았어. 적어도 성적으로 너와 경쟁할 일은 없을 것 같았으니까.


딱,

날아온 분필이 정확하게 네 정수리를 때리면 난 더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곤 했어. 덜 마른 머리를 하고 부스스 일어나는 너에게선 달큼한 샴푸향이 났어. 네가 머리를 슥슥 문지르는 동안 나는 한참이나 앞선 단원이 펼쳐진 네 교과서를 페이지를 맞게 펼쳐줬지.

밤에 뭘 하길래 이렇게 자냐.

속삭이듯 내가 물으면 오빠한테 편지 쓴다고 늦게 잤다며 넌 멋쩍은 듯 웃곤 했어.

대학생 오빠랑 사귄다는 너는 분명 그 오빠한테 상처받을 게 분명해 보였어. 나는 연애도 사랑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그 오빠란 놈이 나쁜 놈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지. 네가 아무리 새벽에 편지를 써서 줘도, 용돈을 모아 선물을 해도 사랑 근처에도 못 갈 사이가 될 걸 알았지만 굳이 너에게 말하지는 않았어. 너도 알고 있었으니까. 그 사랑 모양새를 한 것이 너에게 얼마나 소모적인 일인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네가 그 놈을 잊고 공부를 해서 나보다 성적이 잘 나와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네가 상처받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


나, 아빠 없다. 엄마랑만 살아.

천진난만하게 말하는 너에게 아빠가 있는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아빠가 있다고 특별히 더 행복하지도 않았던 나였으니까. 그러니까 너와 나는, 부모도 없이 태어난, 우주에서 자연 발생해서 지구로 떨어진 생명체처럼 지냈었어. 내 마음에 걸어둔 몇 백 개의 빗장을 열쇠도 없이 열고 들어와 가장 깊숙한 방 안에 쪼그리고 앉은 어린 아이를 손잡아 일으키는 사람이 너였어. 내 삶에서 수학의 정석과 성문 기본 영어를 빼고, 솔직함과 순수함을 더해 빚은 사람이 너였어. 해도 해도 끝도 없을 공부를 끝도 없이 해야할 것 같았던 야자 시간에 과감하게 문제집을 옆으로 물리고 수학 노트에 담임 선생님 캐리커처를 그리게 만들었던, 그런 사람이 너였어. 엄마에게 빼았겼던 만화 스케치 노트를 굳이 돌려받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지.

이렇게 재미있는데.

이렇게 다시 그릴 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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