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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밤 May 12. 2024

미아(1)


기억 속 어린 시절은 빛바랜 사진이 그대로 펼쳐진 듯 아늑하고 조용해. 사진 속 정지된 듯한 자동차나 사람들이 바랜 빛의 노란 필터를 입고 고요히 느린 속도로 움직이고 있어. 그 속에서 부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무럭무럭 잘 자랐을 나를 상상해. 흔한 아기처럼 울다, 흔한 아기처럼 옹알이를 하고, 다른 아이보다 조금 늦게 걸음마를 떼면서 삑삑 소리가 나는 공을 굴리며 다녔을 거야. 엄마가 장날에 사 준 빨간 벨벳 원피스를 입고 하얀 타이즈를 신고 빨간 구두를 신고 뛰다가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며 카메라에 찍히기도 했지.


비포장 도로를 쉼없이 걷던 두 발과 하얗게 일어나던 흙먼지. 내 첫 기억이야.

홀로 집을 나서던 오후. 늦여름을 떠올리게 하는 도톰한 햇살. 네 살 즈음이었던 것 같아.

갓 이사온 뒤라 엄마는 집을 정리하느라 바빠 보였어. 심심했던 나는 무작정 대문을 열고 나와 오른쪽을 향해 걸었어. 흙먼지가 일어 발이 뽀얗게 되어도 상관하지 않았지.

모퉁이가 나오면 오른쪽으로 돌고, 또 오른쪽으로 돌고. 왼쪽으로도 돌고. 한참을 가다 고개를 들었는데 못 보던 집과 나무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어.

어, 여기가 어디지.

엄마, 엄마.

아무리 엄마를 불러도 엄마가 나타나지 않았어.

무늬 없는 높고 새하얀 벽이 사방에서 날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어. 빠져나가기 힘든 미로 한 가운데 있는 것 같았지. 엄마를 부르면 위에서 손이 쑥 내려와 나를 꺼내줄 것 같았는데 아무리 불러도 엄마가 안 오니 큰 소리로 우는 수밖에.


한참을 엉엉 울었어.

그땐 잘도 울었어. 울음이 언어의 하나였던 시절이니까. 눈물 콧물 범벅이 된 나를 보고 마침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다가왔어.

얘야, 길을 잃었니.

대답 않는 날 보며 잠시 생각에 빠졌던 아주머니는 내 손을 잡고 어디론가 향했어.

엄마 어디있는데요? 지금 엄마 있는 데로 가는 거예요?

아주머니는 모르겠다고 답하며 계속 걸었어.

우리가 도착한 곳은 큰유리문이 정면에 있는 하얀색 건물이었어. 문을 밀고 들어가자 안에 앉아 있던 아저씨 두 명이 벌떡 일어나서는 무슨 일이십니까 하고 물었지. 아주머니가 날 의자에 앉히고 아저씨들과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나는 계속 울었어. 보다 못한 아저씨 중 하나가 소리쳤어.

야, 그만 좀 울어!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날 치던 천둥이 그만큼 무서웠을까. 모르는 어른이 나에게 저렇게나 화내는 걸 처음 봤기에 너무 놀라 울음이 뚝 하고 그쳤어. 그런데 이 울음이란 녀석이 뱃속에서 자꾸 밀고 올라오는 거야. 끅, 끅 소리를 내며 의자 가장자리를 손으로 꼭 쥐고 앉아 있으니까 이야기를 마친 아주머니가 다가왔어.

조금만 기다리면 엄마 올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마.


아주머니가 간 뒤로도 한참을 혼자 의자에 앉아 있었어. 울음도 지쳐 사그라들고, 주변의 소음도 가라앉더니 침묵이 공간을 채웠어. 사그락 사그락 종이에 뭔가를 쓰는 소리, 가끔씩 들리는 따르릉 전화벨 소리만 넓은 공간을 메우고 있었지. 눈을 이리 저리 굴리며 계속 앉아 있는데도 엄마가 오지를 않네. 엄마가 왜 안 오지. 엄마가 왜 안 오는 거지. 다시 울음이 스멀스멀 올라왔어. 으아앙.

다시 울 수밖에.

아까 소리 질렀던 아저씨 옆에 있던 조금 더 젊어 보이는 아저씨가 내 앞에 와서 쪼그려 앉더니 엄마 올거다 하고 말해주었어. 나도 엄마가 꼭 올거라고 믿고는 있었어. 너무 늦으니까 그게 서러웠던 거지.


얼마나 지났을까.

덜컹, 문이 열리고 땀 범벅 눈물 범벅이 된 엄마가 뛰어들어왔어. 재빨리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엄마는 나를 발견하고 쓰러지듯 내게 달려왔어.

엄마는 무릎을 꿇은 채 날 안고 한참을 울었어. 나는 엄마가 그렇게 우는 걸 처음 봤어. 엄마 볼에 흐르는 눈물을 처음 봤어. 벌겋게 상기된 볼에 생긴 몇 갈래의 눈물 자국을 보며 생각했어. 이 장면을 오래 기억하겠구나.

그래서 지금도 기억해. 오래 기억하리라 생각하던 내 마음도, 붉고 축축했던 엄마의 볼도. 오로지 나만을 위해 울었던 엄마의 모습은 흔치 않은 장면이었거든. 엄마는 나보다 당신 스스로를 위해 울 때가 많았으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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