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된 뒤에 엄마에게 물었어. 그때 내가 어디까지 혼자 갔던 거냐고. 집 바로 옆 모퉁이 하나 돌아간 길에서 울고 있었대. 나는 분명히 오른쪽, 왼쪽, 오른쪽, 왼쪽 몇 번이나 돌며 꽤 먼 길을 걸어갔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어른이 되어 다시 그 동네에 가 봤어. 엄마 말이 맞았어. 내가 살던 집에서 1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파출소가 있더라. 이 세계의 경계인양 내가 온몸으로 부딪치며 울었던 의자가 있던 그 장소.
파출소는 주변 다른 건물에 비해서 작은 편이었고 두 짝 미닫이 유리문 안으로 보이는 공간도 그만큼 좁아 보였어. 데굴데굴 굴러도 끝에 닿을 수 없을 것 같았는데.
그날, 네 살짜리 아이가 걸은 길은 마을 하나를 지날 만큼 길었는데, 울다가 혼이 난 곳은 교실을 몇 개나 합친 것보다 컸는데, 어른이 되어 보니 우스울 정도로 짧고 좁았어. 몸집이 작은 아이가, 낮고 무지한 시선으로 본 세상은 실제 모습보다 더 괴물 같고 무서웠었어.
수능 다음 날의 울음들도 네 살 아이의 것과 뭐가 다를까. 우리가 울었던 이유. 수능을 잘못 본 후의 세상에 대한 두려움.
그런데 우리가 상상했던 그 무서운 세상은 실재하는 것이었을까.
우리는 수능 점수를 잘못 받은 것이 지난 노력을 수포로 만드는 것이고, 나아가 인생 전체를 힘들게 만든다고 믿었어. 고작 열아홉인 아이들이 뭘 알았겠어.
그때 어른들은 뭘 하고 있었지? 집과 학교만 다닌 애들이 세상에 대해 뭘 알았겠어. 파릇하게 돋아나아야 할 씨앗들이 흙 속에 코를 박고 울고 있으면 바깥세상을 먼저 경험한 어른들이 말해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수능 점수와 인생은 일 대 일로 대칭되는 게 아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누군가로부터 사랑받는 게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다, 그건 수능 점수와 상관없는 것이다,라고.
네 살 아이의 울음을 지나치지 않은 아주머니와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쪼그려 앉아준 경찰 아저씨처럼, 열아홉 살 눈높이에 맞춰 지나친 두려움을 상상하던 우리를 위로해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어른이 되어서 살아가는 세상엔 후끈한 열기를 뿜으며 나를 향해 달려오는 엄마 같은 존재는 없어. 울지 마라고 윽박지르던 경찰 아저씨 같은 사람만 있는 것 같아. 그런데 말이지. 어른이 되고 보니 소리 지르던 경찰 아저씨의 마음도 알 것 같아. 아저씨는 네 살 아이의 마음 따위 이해할 여유가 없었던 거야. 아저씨의 마음을 가득 채운 건 부족한 월급으로 갚아야 하는 빚, 집을 샀다는 친구를 향한 질투, 승진하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 따위였겠지. 아저씨에게 그날은 우는 아이 때문에 시끄러웠던 재수 없는 날, 딱 그 정도의 의미밖에 없었을 거야.
그런 어른은 아이를 위로하는 법을 몰라. 자신을 위로하는 법조차 모르니까. 자기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떻게 거기 있게 된 건지 모든 게 혼란스러울 뿐이거든. 우리가 만나 온 대부분의 어른들처럼.
어른다운 어른이 많아졌으면 좋겠어. 먼저 생을 산 사람들이 뒤따라 살아오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으면 좋겠어. 나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어.
네가 삶을 저버릴 만큼 힘들었던 이유를 나는 몰라. 아마 앞으로도 알 수 없겠지. 하지만 감히 생각해 봐. 20대에 세상을 떠난 네가 느꼈을 막막함이 너의 생을 멈출 만큼 실제로도 무시무시한 것이었을까.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면, 지금의 내가 그때의 너에게 갈 수 있다면, 네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해 주고 싶어.
희수야. 너의 이야기를 들려줘. 내가 듣고, 네가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 듣고, 그게 진짜 두려워할 만한 것인지 함께 생각해 줄게. 살아가는 게 후회될 만큼 거대한 일인지 말해줄게,라고.
나는 그게 어떤 이유였든 네가 가진 에너지가 더 컸으리라 생각해.
널 만나고 난 뒤에 여유가 있다면 20대의 나에게도 가고 싶어. 가서 말해주고 싶어.
너는 앞으로 힘든 일을 많이 겪게 될 거야. 죽음까지 생각할 거야. 하지만 그 일들을 통해 분명 너는 강해질 거야. 스스로 단단해져서 다른 이의 아픈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될 거야. 마음이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될 거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