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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라작가 Sep 22. 2022

엄마, 내가 알아서 할게

이시하라 가즈코


다른 사람의 견해가 여러분 자신의 목소리를 가리는 

소음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라가는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


엄마와 딸: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애증의 끈


<서장>

착한 딸 코스프레를 멈춰라. 

'전 혼자 사는데 엄마가 너무 자주 집에 찾아와요. 그리고 

만날 때마다 힘들지,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돼. 

너무 무리하면 건강 해친다고 말씀하세요. 

평소에 고된 업무 떄문에 몹시 지쳐있던 그녀는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엄마의 조언대로 일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엄마는 겉보기에는 딸을 걱정하는 좋은 엄마로 보입니다. 

딸도 엄마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번번히 걱정을 핑계 삼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제동을 거는 엄마한테 짜증이 나고,

반발하고 싶을 때도 있다더군요. 

'왜 일을 그만둔 걸까'

다시 일을 하고 싶지만, 이제 와서 후회한들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죠.

그녀는 어느 새 산처럼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하지 못해 망연자실한 상태입니다. 


만약 자식이 엄마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생각대로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분명 실패도 했을 것입니다. 자식이 용기 내어 끝까지 밀고 나간 주장을

엄마들이 어느샌가 실패하는 쪽으로 끌고 가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물론 엄마는 자식을 위해서 조언을 합니다. 하지만 그 마음의 밑바탕에는

언제까지나 자식을 자신의 곁에 두고 싶다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식이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해 무의식 중에 자식의 자주성을 빼앗는 행동을 합니다. 

앞의 사례에서라면 엄마들은 자식이 실패하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거봐 엄마 말을 안 들으니까 그렇게 되는 거야. 처음부터 내 말대로 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엄마 말을 잘 듣는 '착한 딸'이 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엄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또는 그동안 신세를 졌으니까, 

딸은 자신이 원하는 걸 포기하고, 엄마의 의견에 순순히 따릅니다. 

그렇게 참고 살다가 어느 순간 폭발하여 결국 엄마와 딸 사이가 틀어지고 마는 거죠. 

하지만,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엄마와 딸 모두 자신들이 

무의식중에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는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죠. 

이처럼 자신의 진짜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타인의 의견을 기준으로 

판단과 결정을 하거나 타인이 하라는 대로 무조건 따르는 삶의 방식을

저는 타인 위주라고 부릅니다. 


그 무엇도 나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 

내가 소중해야 남도 소중하다. 

앞서 말한 타인 위주의 삶과는 반대로 자신의 기분이나 감정을 기준으로

판단과 결정을 하고, 자신을 소중히 하는 삶의 방식을 자기 위주라고 부릅니다. 

자기 위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자신을 중심으로 모든 일을 파악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앞의 사례처럼 엄마가 교묘한 말로 통제하려고 들 때도

'자기 위주'로 살아가는 딸이라면 이렇게 확실히 말합니다. 

"엄마 조언해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나는 내 힘으로 해보고 싶어요.

내가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해보고 싶어요"

또한 엄마가 딸의 실패를 딸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고 해도 

그 말에 넘어가지 않고 

"엄마 역시 해보길 잘한 것 같아요. 나는 후회하지 않아요"라고 단호히 말합니다.

이렇게 자기 위주로 생각해봐야 비로소 자신을 소중히 한다는 것,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자란 가정환경이 일반적인 가정환경과 극단적으로 다를 경우,

사람은 자기 가정에서 보고 들은 독자적인 상식을 삶의 잣대로 삼습니다. 

자신과 타인의 가정환경을 비교할 기회가 없다면

그 상식이 옳은지 그른지, 혹은 어떤 점이 이상한지 전혀 알 수가 없지요.

예를 들어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 자체는 쉽게 이해합니다. 하지만 개중에는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 실제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모가 교육을 핑계 삼아 자식을 억압하는 자식은 '억압받는 것'도 애정 표현의 하나라고

착각해버립니다. 

늘 가정에서 큰소리로 혼낸다면 그런 꾸지람도 애정 표현 중 하나로 여길 것입니다. 

"자신을 소중히 하세요"

이렇게 말해도, 부모에게 소중한 대접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릅니다.

제가 전하고자 하는 자신을 소중히 한다는 말뜻과 그들이 생각하는 말뜻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차이가 크면 클수록 그들은 제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죠. 

아무리 그 방법을 설명하려고 해도 말에는 한계가 있어서 때때로 상대방에게

완벽히 전달되지 않습니다. 


<1장>

엄마와 딸이 자신의 인생을 살기 위해서


동정심이란 이름에 지배당하지 마라. 

부모 자식 관계에서 가장 비통한 상황이 되기 쉬운 것을 저는 

동정심의 지배라고 부릅니다. 

부모님이 불쌍하다고 느끼고 있다면 당신은 사실 동정심이라는 이름으로

지배당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동정심이라는 이름으로 지배당할 때 가장 큰 문제점은 

상대의 말이나 행동, 주장 등을 거부하면 강한 죄책감에 휩싸인다는 것입니다. 

그 죄책감이 사랑에서 나온 것이라고 착각하고,

걸핏하면 휘둘리는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외동딸인 한 여자분은 결혼하고 나서도 친정부모를 심하게 걱정합니다.

특히 엄마는 자주 아프기 때문에 

옆에 있어주지 못하는 게 늘 마음에 걸립니다. 

"오늘 밖에 나가려고 하다가 현관에서 넘어졌지 뭐야. 

아파서 일어설 수도 없어. 오늘 먹을 저녁거리도 없는데, 

네 아버지가 대신 장 보러 가주면 좋으련만 그런 양반은 아니잖니. 

혼자서는 시장에 못 가니까 집에 좀 와줘."

엄마가 마치 죽기 일보 직전처럼 비통한 목소리로 전화해서 하소연합니다. 

그녀가 만사를 제쳐두고 서둘러 집에 찾아가보니,

엄마는 뭐가 그리 급하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맞으며 밝게 말합니다.

"어머 왔니"

그 순간 그녀는 귀신이 홀린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좀 전의 죽을 것 같던 목소리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다시 정신 차리고

"엄마 뭐야. 놀랐잖아. 그런 목소리를 들으면 안 놀랄 사람이 어디 있어"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되받아칩니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네가 안 오잖아"

그 말을 들은 순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맹렬한 분노가 끓어올랐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녀가 화를 내면, 또다시 싸움으로 번지고 맙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그런 싸움을 반복했습니다. 


엄마에게 꼭 헌신해야 하는 건 아니다. 

"저희 엄마는 아무리 신경써드려도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안 하세요"라고

호소하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며칠 전에도 허리가 아프다, 다리가 아프다고 하시길래, 마사지를 해드렸어요.

그래도 고맙다는 말 한 마디 못 들었어요. 

꽤 오랫동안 해서 '엄마, 이제 그만해도 되지?'라면서 끝내려고 하니까,

'아직도 아파.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어'라는 거예요. 정말 질려버리겠더라고요.

필사적으로 부모를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미안하지만,

부모가 그런 태도를 보이는 건 너무나 당연합니다. 왜일까요.

자식이 뭔가를 해주면 해줄수록, 엄마는 받는 것에 익숙해지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헌신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힘들게 가족을 돌봤다. 남편이 제멋대로 굴어도 참았고

확실히 체면도 세워주었다. 고생하면서 자식도 키웠다. 

그런데 나는 조금도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런 생각이 강한 엄마일수록 '고맙다'고 말할 수 있는 심경이 아닙니다. 

'남편을 포함해 어느 누구한테도 고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데,

왜 나만 고마워해야 하지? 나야말로 감사 인사를 받아야 하는데 말이야.'

참고 고생하며 살아온 엄마일수록 이렇게 생각합니다. 설사 그런 자각이 없더라도

'아무리 노력해도 보상받지 못했다'는 원통한 마음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동정심이라는 이름으로 자식을 지배하는 엄마가 고맙다는 말에 인색한 이유는

의식의 초점이 부정적인 감정에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감도도 높아질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응어리진 감정이 있으면 풀고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푸는 방법을 모릅니다.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충족되지 않은 마음을 품은 채, 내가 만족할 수 있게 해달라고 이제 와서야 

자식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식이 아무리 최선을 다한들 부모의 마음에는 불만이 생겨납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만족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아주 부족하거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식은 그런 불행의 연쇄를 멈출 필요가 있습니다. 

'아프다, 괴롭다, 고통스럽다'고 동정심을 호소하며 자식을 지배하려 드는

부모의 무의식의 책략을 깨닫고, 그것에 휘둘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 또한 부모와 같은 운명을 걸을 뿐 아니라 

자식에게도 똑같은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런 행동이 세대를 거쳐 

더욱 교묘해질수록 비극도 심해질 것입니다. 


엄마가 불행을 먹고 살게 내버려두지 마라

이 동정심이라는 이름의 지배는 부모 뿐만 아니라, 특히 자식에게도 해롭습니다. 

왜냐하면, 자식이 자신을 위해 살려고 할 때, 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몸이 안 좋거나 병을 핑계 삼아 기대기 시작하면

자식은 절대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부모가 죄책감이라는 무기를 휘두른다면 그것을 잘라내는 건 불가능합니다. 

자신을 위해 살려고 하면 할수록 불쌍한 부모를 버려둔다는 죄책감에 휩싸여

차마 거스르지 못합니다. 

자식이 자신을 위해 살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며,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원래 부모가 축복해줘야 하는 일입니다. 자식도 그런 자신에게 자긍심과 기쁨을

느끼는 게 당연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식이 행복해지는 것을 마음 속으로 빌고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거짓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정심이라는 이름의 지배는

그 바람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많은 엄마들이 무의식중에 자식이 자립하면 나는 버려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무의식의 공포가 자식이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을 뛰어넘을 때,

부모는 동정심이라는 이름으로 자식을 지배하고 맙니다. 

한편, 부모가 바라는 건, 자식의 행복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행복을

강요하는 엄마도 있습니다. 

이런 엄마들은 자식이 그 이상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일부러 자식에게

죄책감을 유발하는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죄책감을 심하게 느끼면, 무의식 중에 행복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죄책감이란 스스로를 벌하려는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해지면 자신에게 벌을 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죄의식을 안고 있는 상태와 행복한 상태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죄책감이 강한 살마은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을 허락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동정심이라는 이름의 지배가 정말 안 좋은 점은 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배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 만사가 순조롭게 풀리거나,

좋아지거나, 개선되면 곤란하다는 의식이 숨어있다는 점입니다. 

자신이 행복해지면 동정심을 끌어낼 수 없으므로, 지배를 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상대가 자립심이 생겨서 행복해지려고 하면

지배가 불가능해진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즉, 동정심을 이용한 지배가 습관이 되어버린 사람은, 눈앞의 만족감을 위해

자신과 상대방 모두 불행해지는 걸 무의식 중에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동정심을 이용해 딸을 지배하고 있는 엄마는 무의식 중에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불쌍해지면, 딸은 나와 어울려줄 뿐 아니라, 내 옆에 있어준다'

그렇게 믿으면, 그 다음에는 불평하기 위한 재료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바로 불평의 씨앗을 찾습니다. 그것이 심해지고 습관이 되면

불평의 씨앗을 많이 갖고 있는 불쌍한 인생이 되어 점점 더 불행한 길을 걷게 됩니다. 

계속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듯한 미로 속에 갇혀버리는 것이죠. 

불평이 습관이 된 엄마는 무의식 중에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면 곤란하다는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그런 엄마에게 딸이 지속적으로 맞장구만 쳐준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이러니하게도 불쌍한 엄마를 만드는 것은 바로 그 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늘 불평 듣는 건 더 이상 못 참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은 참고 불평을 들어줌으로써 딸은 효도하고 있다고 믿었을 테지만,

사실은 불효하고 있던 셈입니다. 당신도 동정심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지배하고 있지는 않은지 확실히 점검해보시길 바랍니다. 


미안하다 대신 고맙다 말하라. 

힘들게 부모를 돌보고 있는 여자분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돌봐드리고 손해 보는 역할만 제 몫인 거 있죠. 

너무나 싫지만 할 수 밖에 없어요"

그녀는 이런 부정적인 마음을 안고 있습니다. 마지못해

돌보고 있기 때문에 부모에게도 그 마음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하지만 부모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애정입니다. 어쩔 수 없이 하는 행위에는

애정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보살핌을 받고 있는 쪽은 당연히 만족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부모 자식 관계 뿐만이 아닙니다. 며느리로서, 연인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아무리 최선을 다한들 마지못해 하고 있다면

그 관계 속에는 애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 이미 충분하니까. 지금부터는 우리가 알아서 할게.

항상 도와줘서 정말로 고마워. 네 덕분에 힘이 났고 용기가 생겼어. 

네가 도와줘서 우리는 이렇게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거야. 

나도 언젠가 너한테 보답하고 싶을 만큼 건강해졌어. 

이렇게 보살핌을 받을 수 있어서 정말로 행복해. 정말 고마워"

당신은 엄마에게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아니면 이런 잔소리가

돌아오지 않나요?

"아직 부족해. 그 일은 했니? 이 일은 아직도 안 했니? 도대체 왜 안 하는 거야?

이 정도 일도 아직 못하다니... 나였으면 벌써 끝내고도 남았을 텐데.

그런 일쯤은 당연히 할 수 있어야지.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니까 

너 스스로도 할 줄 알아야지. 어차피 해야할 일이라면 그렇게 뚱한 표정으로

하지 말고 기분 좋게 하면 어떠니. 정말이지 너란 아이는 폐만 끼치는구나"


한 번 돌이켜보세요. 지금 당신이 딸에게 하고 있는 행동은 

예전에 당신이 부모에게 당했던 일 아닌가요?

당신의 부모는 불평불만을 품은 채 혹은 참으면서 당신을 키우지 않았나요.

"아니요. 우리 엄마는 불평 같은 건 전혀 하지 않으셨어요"

이렇게 반론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일절 불평이 없던

엄마가 당신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나요.

'엄마 고마워. 항상 참아줘서 정말로 고맙고 행복했어. 

엄마가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아서 우리집은 평화로웠고, 

따뜻하고 즐거웠어"

엄마를 보면 이런 기분이 드나요? 아니면, 우리 엄마는 정말 불쌍해.

그런 일도 참아내고 불평 한 마디 하지 않다니.

나는 평생 엄마한테 잘해드릴 거야. 내가 지켜드려야지. 라는 

기분이 드나요?

당신이 만약 후자와 같은 시각을 갖고 있다면 당신 또한 

엄마처럼 '참고 인내하며 우는 소리 한 번 하지 않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엄마를 지켜주지 않으면 안 된다, 보살펴드려야 한다'고

믿으며 살아갈 테지요.

어느 쪽이든, 당신은 힘들게 부모를 보살피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고마워"

"미안해"

이 둘의 차이는 소리 내서 읽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미안해'가 습관이 되어버리면 인생 그 자체가 

미안한 비굴한 인생이 됩니다.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 상대방도 자신의 성의나 선의에 대한

보답을 받았다고는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기분 좋게 들리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고마워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 또한 고마운 인생이 됩니다. 

그 말은 자신의 내면에 감사하는 마음과 행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고마워라는 말을 듣는 쪽도 기쁘다고 느낍니다. 

딸의 눈에 엄마의 표정이 누그러진 것처럼 보인 까닭은 

엄마가 지금까지의 비굴하고 미안한 인생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해방된 순간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제 그만

우리는 사람으로서 존중받아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이 존중이라는 것은 이를 테면 마음의 영역을 침범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단으로 자식의 아파트에 들어가거나, 아무 때나 불러내거나

그런 식으로 자식의 마음에 함부로 뛰어들거나

제멋대로 침입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 자식 간이라 하더라도 마음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상대의 영역에 들어가려면, 우선 서로의 동의와 허가가 필요합니다. 

마음의 영역을 확보할 수 있고, 안전을 침범당하지 않는다는 안도감이

있어야 비로소 사람은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욕구나 기분을 소중히 할 수 없는 사람들은

나와 상대의 경계선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영역을 확보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불만이나 불안을 안은 채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무감을 갖고 살아갑니다. 

여성이라면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딸로서, 엄마로서,

남성이라면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들로서, 아버지로서, 그래야만 한다고

믿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에 반대로, 상대의 자유를 인정하지 못하거나

상대의 마음의 영역을 침범해서라도 자신을 따를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상대에게 헌신하는 행위는 얼핏 상대를 존중하는 듯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것일 뿐입니다. 

무의식의 시점에서 보면 상대에게 헌신하는 행위를 통해 상대보다

우위에 서는 것이 목표인 경우가 많습니다. 

애초에 헌신하는 사람과 보살핌을 받는 사람의 관계는 

의존 관계로 성립되어 있습니다. 

보살핌을 받는 사람이 헌신하는 사람에게 의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헌신하는 사람도 혼자서는 외로워서 살아갈 수 없다고 강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옆에 있어줄 사람을 절실히 원합니다. 

그리고 헌신이라는 방법을 통해 보살핌을 받는 사람에게 의존하려고 합니다. 

상대가 자신에게 의존하면 자신이 버림받을 일은 없습니다. 

그런 무의식의 목표가 있기 때문에 헌신이라는 방법으로 상대를 

자신의 손 안에 넣어두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보살핌을 받던 사람이

자립하게 되면 헌신하던 사람 곁을 떠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헌신하는 사람은 그렇다고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헌신하는 사람은 보살핌을 받던 사람이 자립하면 곤란합니다. 

즉 자신이 힘들게 헌신한다는 행위는 

동시에 상대의 능력과 자신감을 뺏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상대에게 헌신하고 있으면

자신의 기분이나 욕구, 감정을 누르기 위해서

그만큼의 불평불만을 마음 속에 쌓아두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헌신하는 사람 뿐만이 아닙니다. 

보살핌을 받는 사람도 자신의 능력을 뺏기고, 점점 더 무력해진다는

불만을 갖게 됩니다. 

보살핌을 받는 사람은 사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뭔가를 빼앗겼다고 느끼며 왠지 화가 치민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담을 할 때, 이런 부모 쪽의 잘못을 지적하면 

'나도 가족을 위해서 평생 열심히 일했다'는 생각에 감정적이 되어

화를 내는 아버지들이 적지 않습니다. 

왜 화를 내는 걸까요.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인내하며 살면서

무력한 자신, 좌절할 것만 같은 자신과 필사적으로 싸웠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인내하는 사람은 결국

불만을 안은 채 상대방을 보살피게 마련입니다. 

화를 냈던 아버지도 그런 마음으로 가정에 충실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큰 기쁨은 없습니다.  

자식들도 무의식 중에 아버지의 우위에 서고 싶다는 

진짜 목표를 느끼게 되므로 보살핌을 받을수록

자신감을 잃어버립니다. 

그 결과 고마움보다는 분노나 한탄과 같이 부정적인 감정이

북받쳐오르게 됩니다. 

헌신하는 사람과 보살핌을 받는 사람, 양쪽 모두의 마음 속에

기쁨이나 만족감이 채워지는 경우는 결코 없습니다. 


아무리 자식을 걱정하고 자식을 위해 노력하여 

출세했다 하더라도 상대의 마음이란 영역에 무단으로 

침범한다는 이 단 하나의 행위 때문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나쁜 상황을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나는 너무 무력해. 

'만약 당신이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부모 자식 관계가 헌신과 보살핌이라는 

의존 관계였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식으로 다시 한 번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것은

앞으로의 부모 자식 관계를 구축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마라.

자기 위주로 살아야 비로소 만족을 느낄 수 있다. 

자기 위주로 살 것인가, 타인 위주로 살 것인가. 그 답은 일상의 작은 일에서

비롯 됩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상대방을 통해 만족감을 얻고자 하는 

타인 위주의 발상을 하면, 서로가 상대의 인생에 무리하게 개입하려 듭니다. 

이것은 두 사람이 동시에 상대의 손으로 밥을 먹으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와 자식처럼 밀접한 관계일수록, 곳곳에서 불합리한 일이나 갈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위해 행동하는 자기 위주의 발상에서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상대에게 협력하는 이유는 내가 상대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한 집착이나 속박이 아니라,

하고 싶다는 자기 자신의 욕구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협력하는데 만족과 기쁨을 느낍니다. 만족과 기쁨을 느끼기 때문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당신이 엄마에게 부탁을 받았다고 칩시다. 

"컴퓨터 다루는 게 어려워서 그러는데 좀 알려줄래?"

이때 당신에게는 받아들일 자유도, 거절할 자유도 있습니다. 

당신의 기분이나 욕구, 감정에 따르면 됩니다. 

아무런 죄책감 없이 거절할 자유가 있습니다. 


자기 위주의 사고방식과 자세를 갖추고 있다면,

스트레스 없는 대화를 할 수 있다면

다른 많은 상황에서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언뜻 들으면 쉬울 것 같지만 서로 마음의 자유를 인정한 관계가 아니라면

이렇게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는 대화를 주고 받는 건 

꽤 어렵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안심감이 있어야 

이런 대화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서로가 자유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비로소 나와 상대가 

함께 하는 시간, 또는 상대가 나를 도와주는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나와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기분을 우선시하자. 

참으면서 엄마에게 맞추지 말고 피곤하다면 우선 쉰다. 

자기 위주의 행동이 결국은 상대를 존중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엄마와 딸이 협력하거나 돕는 목적은 

상대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려는 것도, 지배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상대가 자립해서 살아가도록 손을 빌려주는 것 뿐입니다. 

엄마가 딸 대신 인생을 살아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딸 또한 엄마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나요.

하지만 실제로 지금 가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이유는 이런 기본적인 생각조차 공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특히 엄마는 딸의 인생을 대신 떠맡으려는 말과 행동을 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자식에게 자신의 인생을 

떠맡기려는 심리가 깔려있는 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벌어지는 이런 문제는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으로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또한 마음으로 이해했다고 할지라도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서로를 인정하는 삶은 배울 수 없습니다. 

자식이 자신의 인생을 위해 배우고 싶은 것이 있는 것처럼

부모, 그리고 부모의 부모도 또한 자신의 인생을 위해

배우고 싶고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자신의 힘으로 획득해야 합니다. 

당신에게 자각이 없다 하더라도 당신의 무의식이 그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당신의 눈앞에 가족이 있는 것입니다. 



<2장>

당신의 인간관계는 엄마로부터 시작되었다. 


지금의 나를 더 알고 싶다면 어린 시절을 돌아보라. 

지금까지의 인생을 한 번 돌아보세요. 가정에서 경험한 일

그 중에서도 괴로웠거나 외로웠거나 무서웠던 일은 

마음 속 깊이 남아있을 뿐더러 자신의 말과 행동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저는 자신이 과거에 경험한 일이 현재 안고 있는 문제나

상황 속에서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을 상담할 때마다

확인했습니다. 

어린시절, 응석 부리고 싶었던 당신은 엄마를 부르며

엄마 등에 매달렸습니다. 

엄마가 다정하게 대답하며 안아줄 거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기대와 달리 엄마는 등을 보인 채 짜증 섞인 말투로 외쳤습니다. 

상처받은 당신은 밥이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그 모습에 짜증이 났는지 

"안 먹을 거면 치운다"고 또 다시 차가운 말을 던졌습니다.  

당신은 슬픔을 감추면서 밥을 억지로 밀어 넣었습니다. 


어렸을 때 이런 경험을 반복적으로 했다면 당신의 마음 속에

슬프다는 감정과 함께 그때의 광경이 강하게 남아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당신이 부정적인 감정을 경험했다는 점입니다. 

그 경험 때문에 당신은 애정이란 아무리 원해도 얻을 수 없는 것

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고, 내가 엄마한테 사랑받기 위한 행동을 하면

애정을 얻기는 커녕 오히려 거부당하고 혼난다고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상처를 받아 내가 먼저 애정을 갈구하는 행동은 하지 말자고

마음 먹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결심을 하면 누군가가 애정 표현해주는 것을 기다리기는 해도

자신이 먼저 하지는 않습니다. 

이처럼 살면서 여러 국면을 맞을 때마다 자신이 느끼고 생각한 것,

그리고 결심에 이르기까지 했던 경험이 습관의 원형이 됩니다. 


강한 감정을 동반한 경험은 마음 속에 깊이 새겨집니다. 

충격이 크면 클수록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는 것이죠. 

너무나 괴로울 때는 자기 마음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그 기억을 지워버리기도 합니다. 

"트라우마가 될 만한 일은 없었어요. 부당한 대우나 학대를

받은 적도 없고요. 우리 집은 굉장히 평범했고, 

오히려 저는 사랑을 받고 자란 편이었죠"

일반 가정에서 일어난 사건은 트라우마로 남을 만큼

심한 상처가 되기보다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일상의 작은 일들이 축적된 것입니다. 

'엄마에게 매달렸는데 거부당했다'는 경험은 아이에게는

오랫동안 마음의 상처로 남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는 그저 바빠서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고 

인식할 뿐입니다. 때떄로 그런 일이 있었어? 라며

기억하지 못할 만큼, 큰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 부모도 꽤 있습니다. 


아이가 먼저 다가갔는데 거부당했다는 경험은

다양한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이가 그림책 같이 읽고 싶다고 말했는데 

엄마가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하자고 딱 잘라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나중에 하자는 말을 믿고 계속 기다려보지만,

그 나중에 결국 오지 않으면

아이는 점점 부모의 말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또 그런 경험이 계속 반복되면 아이는 엄마가 바빠 보일 때는

먼저 말을 걸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말을 거는 것 자체에 죄책감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결국에는 나는 부모님한테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아이인가봐라고

착각하고 마는 것이죠.


타인 위주의 삶을 벗어던져라.

일상의 작은 사건들이 쌓이고 쌓여 인격을 만듭니다. 

그것은 긍정적인 경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들 중에는 아이가 응석을 부리며 매달릴 때

왜 그러냐고 부드럽게 대답하며 안아주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엄마라면, 아이가 "그림책 같이 읽어요"라고 말했을 때,

"어머나 멋진 그림책이네. 엄마도 같이 읽고 싶은데

그럼 20분 정도만 기다려줄래? 지금은 이걸 하고 있거든. 

대신 빨리 끝낼게"라고 말해줄 것입니다. 

딱 잘라 거절하지 않고, 엄마의 지금 상황을 확실히 설명하면서

아이의 희망 사항을 들어줄 것을 약속합니다. 

엄마가 이렇게 말하면 아이는 자신의 마음이 받아들여졌다고 느낍니다. 

엄마가 실제로 20분 후에 약속을 지킨다면

아이는 기다린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고,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는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게다가 엄마가 "기다려줘서 고마워. 덕분에 일을 잘 끝냈어"

라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 아이는 부모를 도와줬다는 자부심도 갖게 될 것입니다. 

물론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도 있겠지요. 


이런 경험을 계속하면 아이는 자신의 욕구나 희망을 생각한

그대로 표현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주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배웁니다. 

그렇게 긍정적인 경험을 수없이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아이는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상황이 좋아지는가를 학습합니다. 

가령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바로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갖고 그 시련을 뛰어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일상의 사소한 일이라도 대처방법에 따라 이후의 

인생이 크게 달라집니다. 

얼핏 보면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죠. 하지만

우리는 그 차이를 깨닫지 못한 채 언제나 같은 생각과 행동을

반복할 뿐입니다. 

물론 상대방도 마찬가지요. 


타인 위주의 삶을 살면, 자신의 기분이나 감정을 

방치하게 될 뿐더러

자신의 욕구나 희망조차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자신을 소중히 하지 않기 때문에 인생이 괴로워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한편 자신의 욕구나 희망을 생각한 그대로 표현하는 삶의 

방식을 자기 위주라고 부릅니다. 

자기 위주의 삶은 타인보다도 자신의 기분이나 감정을

소중히 합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늘 제멋대로 구는 자기중심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 분들도

있을 텐데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타인을 배려하지 못하는 사람

자기 주장을 일방적으로 내세우는 사람, 싸워서라도 자기 주장을 

관철하려는 사람이야말로 제멋대로라고 할 수 있죠.

그들은 자신을 소중히 하지 못하는 타인 위주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어린 시절에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존중 받지 못하고

거부당했거나, 자신의 욕구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경험을 수없이 반복했기 때문에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지 못하는 것이죠. 


타인 위주의 삶을 사는 사람은 남과 싸우거나 무언가를

빼앗지 않으면 자신의 바람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자기 위주로 살아가는 사람은 남의 것을 빼앗지 않아도

자신이 스스로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상대와 싸우지 않아도 자기 주장을 강요하지 않아도

사람은 자신의 기분이나 생각을 소중히 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부정하거나 거부하더라도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의 말과 행동보다는 자신을 믿으려고 합니다. 

지금까지의 성장 환경에서 자신을 소중히 하는 방ㅂ버을 익혔기

때문에 타인이 아닌 자신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가정에서 귀한 대접을 받고 자란 사람일수록

타인을 소중히 대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기분을 신경쓰는 타인 위주의 인생에서 벗어나자. 

부모의 말과 행동에 사로잡히면 나 자신을 돌볼 수가 없다. 

나를 소중히 하는 순간 인생이 행복해진다. 


최근에는 맞벌이하는 부모가 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린아이를 어린이집이나 유치원과 같은 시설에

맡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는 물론, 엄마조차 없는 

부모 부재의 시대가 되고 있는 듯합니다. 


요즘에는 타인과 함께 있는 것 자체를 고통으로 느끼는

사람도 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행동을 하면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말을 하면 바보 취급하지 않을까. 

이런 짓을 하면 싫어하겠지. 

아무래도 신경을 쓰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장시간 함께 있으면 즐겁다기보다 거북하다거나 괴롭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마음 속에는 나답게 있고 싶다. 자유롭게 있고 싶다는 욕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 사람들은

나답게 행동하거나 자유를 추구하거나 자신을 소중히 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낍니다. 또한 그런 행동에 두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다가 상대에게 거부당하고

힘으로 억압당한 경험이 공포심을 동반한 고통으로

되살아난 탓일 것입니다. 

그런 과거의 다양한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자기 위주의 사고법을 익히는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부모와의 관계를 비롯하여 가정환경에서 

자신을 소중히 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막연하고 만성적인 고민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것은 형상화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타인 위주의 사고법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철들었을 때는 이미 타인 위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타인 위주로 살아왔고 그런 사고방식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과거를 되돌아보고 출발점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깨닫지 않는 한,

그들은 그 고통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함께 있어서 즐겁다, 가족과 소통하는 시간이 즐겁다는 모습을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상대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상대의 삶을 인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무관심한 채로 서로 접촉 없이 살아가는 듯한 

가족의 무습이 떠오를 뿐이죠. 사랑의 온정이 결핍된 가정입니다. 


고생해서 나를 키워주셨으니까 감사해야 한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애쓰면

괴로워질 뿐입니다. 

이처럼 부모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가슴속 응어리로 맺혀있는 한,

아무리 부모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들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끼지는 못합니다. 


자신을 소중히 하는 건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나의 무의식에 귀를 기울여라. 


<3장>

부모 자식 간이니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다. 


사랑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심리적으로 독립하라.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엄마한테 말해도 그런 건 무리다. 

어차피 계속 못할 거다. 지난 번에도 똑같은 얘기했잖니.

그런데 아직도 그 얘기를 하는 거니. 하고 늘 반대만 하신다니까요.

그들은 엄마와 대화하면서 특별히 자신에게 상처가 되고

마음에 남았던 말들을 대충 뭉뚱그려 대답하기 십상입니다. 


"그때도 거절당했어요. 그전에도 그랬고, 그보다 더 어릴 때도 그랬어요.

엄마는 항상 제가 뭔가를 하려고만 하면 반대하세요"

이런 식으로 과거의 여러 상황에서 반대당하고 상처 입은 감정을

하나로 뭉뚱그려 말합니다. 그때마다 상처 받았다는 과거의 감정을 안은 채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는 거예요. 라고 엄마에게 하소연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외쳐도, 기분은 풀리지 않습니다. 

그 결과 자신이 만족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직면하고

그때마다 실망하는 것이죠. 설령 엄마가 사태를 깨닫고

열심히 속죄하려고 한들 엄마 또한 절대 만족하지 못하는 자식의

모습을 보면서 어찌할 바를 모를 것입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과거를 되돌릴 수도 없잖니.

엄마 입장에서는 이렇게 소리치고 싶지 않을까요. 확실이 그런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합니다. 


엄마와 딸 모두 근본적인 해결 방법을 모른 채 서로 괴로워할 뿐이죠.

결국에는 엄마 쪽이 도리어 화를 내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서로 이해하는 단계는 이미 지났다고 말할 만큼

상처받고 엄마를 미워하는 딸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경우에 속한다면 엄마로부터 심리적으로 독립해야 합니다.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말이죠. 

서로를 인정한다는 것은 바로 심리적으로 독립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심리적 독립이 가능해지면, 가령 지금 엄마를 미워하고 있다고 해도

그런 감정에서 차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적당한 거리를 두면 서로가 편해진다. 

끝이 없어 보이는 싸움을 계속하기보다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자.

그러면 관계가 편안해진다. 이것도 자기 위주의 사고방식이다. 


부정하는 습관을 버려라.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기 마련이죠. 아무리 부모가 스스로를 옳다고 믿고

자기 주장이 정당하다고 확신해도 그것이 아이에게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진다면

이는 부모에게서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나의 감정을 일순위로 삼아라. 

진심을 담아 맞아요라고 말하라. 


<4장>

싸우는 것도 습관이다. 

감정이 아닌 정보로 이해하기

싸우는 습관 버리기

대화다운 대화가 아니라면 차라리 침묵해라. 


<5장>

인정받고 싶다면 먼저 인정해줘라. 


서로 별개의 인격임을 인정하라. 

각자의 상처를 인정하라. 

내 맘을 알아줄 거라 기대하지 마라. 

차라리 남이라고 생각하고 예의를 갖춰라. 

그게 아니라로는 자신을 지킬 수 없다. 


<6장>

멀어질수록 관계는 가까워진다. 


비난받고 있다는 의식에서 벗어나라. 

반대하는 것도 습관이다. 

공감으로 소통하라. 

자신의 느낌을 믿어라. 

연락없이 불쑥 찾아가지 마라. 

솔직한 마음을 전달하라. 


<7장>

행복해지려면 거절할 줄 알아야 한다. 

서로의 생각에 주의를 기울여라. 

서로의 자유를 인정하라. 

잘못을 지적하는 습관을 버려라. 

엄마의 잔소린관심 가져달라는 신호다. 

죄책감을 버려라. 

나를 칭찬하는 건 나 자신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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