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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씨 Feb 26. 2023

뉴요커는 아무나 하나 1

나는 멀미가 심하다. 장거리 비행을 그렇게 여러 번 했는데, 적응은 무슨. 비행기는 타면 탈 수록 힘들어 죽겠다.


비록 지금은 인천에서 직항이 없는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에 살지만, 2017년부터 대학 입학부터 2021년까지 졸업까지 나는 뉴욕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인천공항에서 뉴욕 JFK공항까지는 직항으로 14시간이 걸린다. 내가 이 비행을 매번 버텼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 왕복 백만 원이 훌쩍 넘는 티켓을 방학 때마다 툭툭 잘도 사서는, 멀미약 삼켜가며 꾸역꾸역 미국과 한국을 오갔다.


뉴욕대학교 신입생(프레시맨, Freshman) 신분으로 처음 JFK공항에 착륙한 순간은 아직도 생생하다. 비행시간 내내 잔뜩 긴장해서 울렁울렁하다가, 랜딩 하자마자 화장실 변기에다 격렬하게 인사를 박았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비행기에선 웰컴송으로 프랭크 시나트라의 New York, New York이 흘러나왔다. '뉴욕이 최고야, 거기서 살고 싶어!' 하는 뉴욕 찬가의 힘찬 브라스에 맞춰 구토를 하고 있었단 게 블랙 코미디가 따로 없다.


아니나 다를까 뉴욕은 적응하기 쉬운 도시가 아니었다. 난생처음 맡아본 큼큼한 마리화나 냄새가 거리마다 진동했고, 길가엔 쓰레기가 이리저리 널려 있었다. 지하철은 악취가 심했고, 열차 안엔 '피하는 게 상책이다'싶은 이상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뜬금없이 열차 안 기둥을 이용해 폴댄스 하는 것도 봤다. 재밌는 경우가 간혹 있긴 하다.) 마트 카트에 짐을 싸서 이동 중이던 노숙자에게 인종차별적 코멘트와 함께 신체적 위협을 받기도 했다. 나를 향한 무분별한 '니하오'는 약과였다.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 자라 한식이 아니면 입맛이 까다로운 나에게 뉴욕은 미식의 도시가 아니었다. 학교 식당에서는 밥 대신 스파게티가, 반찬 대신 피자가 종류별로 나왔다. 괜찮은 한식당을 찾아다니다가 가격과 음식 간 때문에 포기하고, 케이타운에 있는 한인마트에서 재료를 사서 생존을 위한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제대로 요리를 시작한 건 2학년(소포모어, Sophomore) 때부터다. 1학년 땐 기숙사 방 하나에 세 명이 묵는 트리플 룸에 살았고, 반지층에 위치한 공용 주방에서는 요리를 하기가 쉽지 않았다.


비록 3대가 같이 사는 대가족 출신이지만, 나는 항상 나만의 공간이 있었다. 내 방이 없었던 적이 없다. 기본적으로 내향적인 사람인 데다, 소리와 냄새에 굉장히 민감해 공간분리가 전혀 없는 트리플 룸에 살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미국 서부 출신의 백인 여자애 한 명, 이민 2세대의 중국계 미국인 여자애 한 명과 함께 살았는데, 컬처쇼크랄 건 딱히 없었다. 나도 할리우드 영화랑 미국 드라마 보고 자랐거든. 그래도 '이건 좀 막 나가는 거 아닌가?' 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이를테면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남자친구와 한 침대에서 껴안고 자고 있는 자유로운 아메리칸 걸을 발견하는 순간이랄지. 방 안만 요지경이 아니었다. 언젠가는 마리화나 냄새와 소음이 너무 심해 나가 봤더니, 듀랙을 한 흑인 남자애가 라틴계 여자애랑 복도에서 뒹굴고 있었다. 지구촌 뉴욕시 한마을에 위치한 신입생 기숙사에서는 참 많은 일이 발생했다.


2학년때는 기다렸다는 듯이 스튜디오, 한국으로 치면 원룸을 찾아 독립했다. 2학년 기숙사로 옮기는 친구들도 꽤 있었지만, 나는 그 돈을 주고 또 다른 이들과 같이 사느니 최대한 싼 곳을 찾아 혼자 살겠다는 마음이었다. 뉴욕은 한국처럼 보증금을 왕창 내고 월세를 몇십만 원대로 내는 게 아니라, 보증금이나 수수료는 한 달 월세정도로 주고 월세를 거의 이삼백만 원씩 주면서 사는 식이다. 나는 운이 좋게 맨해튼 이스트빌리지 끝에 위치한 알파벳 시티에 나쁘지 않은 원룸을 구했다. 월세는 1675불. 방의 크기와 상태로 볼 때 '싼 편'이었다. 


당연히 부촌은 아니었다. 사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위험한 동네, '후드'로 취급을 받았다고 하는데, 나는 그걸 입주하고 알았다. 입주 당일 밤에는 악명 높은 뉴욕 바퀴벌레들과도 조우했다. 방 안을 유독한 연기로 가득 채우는 해충제을 설치해 놓고 나와서, 브로드웨이 끝자락에 있는 저렴한 호스텔 방을 잡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던 기억이 난다. 정말 다행인 건 울먹이며 부둥켜안을 엄마가 옆에 있었다는 거. 내 생애 첫 자취방 계약과 이사를 위해 엄마가 와줬었다. 그런 엄마한테 ‘나 집에 갈래’라고 찡찡거렸을 때, 엄마는 무슨 기분이었을까.


바퀴벌레 문제를 해결한 뒤로는 모든 게 평화로웠다. 물론 밤길만 조심하면 말이다. 내가 사는 건물 1층에는 펍이 있었는데, 덕분에 가끔씩 방 안에서 공짜로 솔로클러빙을 즐겼다. 방음은 부자들의 상식이었던 것을 내가 몰랐다. 세탁기가 없는 건물이라 집에서 한 블록 걸어가면 있는 코인런드리를 일주일에 한 번씩 들렀다. 동전을 넣고 빙빙 돌아가는 세탁기 앞에서 일명 '세탁멍'을 때리기도 하고, 커피를 한잔 들고 가 폼을 잔뜩 잡고 학교 과제를 하기도 했다. 가끔 뉴욕대 후드티를 걸쳐주기도 하고. 생활밀착형 뉴요커가 된 것 같았달까. 


길 건너편 슈퍼마켓에서 장 보고, 내 입맛대로 요리하고, 개운하게 설거지하는 재미를 느낄 수도 있었다. 손이 큰 엄마를 닮아 장을 넘치게 본 날에는 이 망할 놈의 건물에는 왜 엘리베이터가 없나 투덜대며 4층까지 등반하기도 했다. (입주할 때 짐이랑 가구를 어떻게 옮겼는지 이미 기억에서 지웠으니 묻지 마시라.) 시험기간에는 우버이츠나 도어대시 같은 배달앱을 끼고 살 수밖에 없었다. 배달수수료에 팁까지 더하면 살인적인 지출이긴 했지만.


대학에서 사귄 몇 없는 친구, 뉴욕에 들린 고등학교 동창들, 금 같은 군대 휴가를 동생 보러 오는데 써준 오빠. 그렇게 그 집에 1년 좀 안 되게 살면서 총 여섯 명 정도 초대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아쉽다. 더 부를 수 있었을 텐데. 방 안에 콕 박혀 영화와 드라마를 정주행 하고, 청소도 제대로 하지 않고, 몸에 안 좋은 음식만 골라먹으며 그 공간을 낭비한 시간들이 아깝다. 그래도 좋은 기억이 더 많아 다행이다. 무려 맨해튼에서 자취하며 집에 온 친구한테 요리를 해준다던가, 집 앞에 있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드라이브를 따라 이스트 리버 뷰를 보며 산책을 한다던가, 인테리어랍시고 이것저것 사서 꾸며본다던가, 싸구려 턴테이블을 사서 바이닐을 모은다던가, 프로젝터 하나 놓고 울퉁불퉁한 흰 벽을 나만의 영화관으로 만든다던가 했던 것들이 모두 기분 좋은 추억이다.


4학년(시니어, Senior) 때는 저지시티 뉴포트에 살았다. 뉴저지 주에 위치했지만 허드슨 강변에 있어 패스(PATH)를 타면 오분 이내로 맨해튼에 도착하는 곳이다. 온라인 한인커뮤니티 '헤이코리안'에 뉴포트 아파트 건물 꼭대기층 넓은 방이 매물로 나와있어서 냉큼 연락했었다. 스튜디오가 아니라 투 베드룸 아파트에 룸메 한 명과 같이 사는 조건이었지만, 말로만 듣던 펜트하우스 아닌가. 그렇게 집주인과 흡사 면접 같은 것을 보고 입주하게 됐다. 


그럴 만도 했던 것이 허드슨 강의 리버뷰, 맨해튼의 낭만적인 야경 시티뷰, 스카이라인을 배경으로 일출과 일몰의 장관이 펼쳐지는 통유리창이 있는 방이었다. 맨해튼 한 복판에 있는 록펠러 센터 전망대 '탑 오브 더 락'에서 보는 뷰 보다, 내 방에서 보는 그 뷰가 훨씬 아름다웠다. 월세는 1300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옆 방에는 파슨스 패션스쿨에서 MFA를 하고 있는 언니가 살았다. 스케줄을 정해 같이 청소하고 항상 깨끗하게 관리하면서 쾌적한 룸메 생활을 했다. 진로에 대한 고민을 늘어놓으며 인생 선배의 말을 귀 기울여 들을 수 있는 시간도 많았다. 참 고마운 인연이다.


그렇게 행복하게 저지시티에 살고 있던 2020년 3월. 코로나가 뉴욕을 덮쳤다. 사상 초유의 바이러스라며 연일 기사가 보도됐고, 룸메 언니와 나는 하루하루 치솟는 확진자 수치를 확인하며 어떻게 해야 하나 불안에 떨었다. 그때 미국이 국경을 봉쇄하기 전 일단 한국으로 돌아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락다운의 공포가 커지고 있는 시점이었다. 비행기 티켓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으며 항공편 자체가 하나 둘 취소되고 있었다. 사실 그 당시엔 한국이 코로나 상황이 더 심했다. 특히 대구 지역이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있었다. 그래도 온 가족이 입을 모아 뉴욕 같은 대도시는 코로나 상황이 더 빨리 심각해질 것이고, 미국 의료체계와 내 신분을 생각했을 때 한국에 오는 게 맞다고 얘기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현명한 판단이기도, 야속한 결정이기도 했다.


2020년 3월. 나는 한국으로 돌아갔다. 줌 수업 열심히 듣고, 늘 그렇듯 끝까지 미룬 과제에 치이며 겨우 학기를 마쳤다. 14시간 시차 때문에 쉽지 않았다. 학기를 마치고는 휴학을 결정하게 됐다. 게으른 거 치고는 가만히 못 있는 성격이라 바로 아르바이트를 구했는데, 그게 씨네21이었다. 영화진흥위원회의 데이터베이스를 관리하는 일을 했는데, 정작 씨네21의 콘텐츠에는 관여할 수 없어 아쉬웠다. 매주 목요일 마감을 맞추기 위해 사무실에 얼굴을 비추는 유명한 기자들을 보며 신기해하고 그랬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그렇게 한국에서 일하는 건 쉽지 않구나 깨달은 꽤 뜻깊은 휴학 생활을 보낸 후 2021년 2월, 대학에서의 마지막 학기를 마치려 복학했다.


그때서야 알았다.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두고 휴학했기 때문에 OPT(Optional Practical Training, 미국 학위 취득 유학생 대상 취업허가제도)를 신청할 자격이 사라지게 됐다는 것을. 나처럼 OPT를 신경조차 안 썼던 미국 유학생이 있을까? 'H1-B 같은 워킹비자든 그린카드든 받기가 그렇게 어렵다더라.' '다 추첨제라더라.' '미국 남자애랑 결혼하는 게 빠르다.' '결국 트럼프가 OPT 없앤다더라.' 그런 얘기들은 다 나랑은 상관없는 얘기인 줄 알았다. 복학하기 전까지는. 나는 바로 대학원을 가려고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휴학하고 일을 해보며 업계에서 경험을 쌓는 것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 더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또 코로나 때문에 모든 수업이 줌으로 진행되는 시기에 대학원을 입학하는 것은 꺼려졌다. 그렇게 졸업 후 취업이라는 중대한 과제를 아무런 준비 없이 맞닥뜨리게 됐는데, 나에겐 OPT 신청 자격이 없었다. 한 마디로, 길이 없었다.


나는 내가 모르는 사이 내게 있는지도 몰랐던 아메리칸드림과 멀어지고 있었던 거다. 뉴욕대학교 영화학과에서 졸업한다고 뉴욕에 일자리가 떡 하니 생길 줄 알았던 걸까? 그것도 영화업계 일자리가? 뉴요커는 참, 아무나 하는 게 아닌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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