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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리 Dec 05. 2019

하노이는 똑같았고 나는 변했다

갑자기 베트남 출장기

 올해 여름휴가로 발리를 다녀온 뒤 나는 동남아 한 달 살기 프로젝트에 급격한 관심이 생겼었다. 초록과 파랑이 짙게 어우러진 그 섬은 매력이 가득해서 여행이 끝난 후에도 여운이 오래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동안 찾아본 콘텐츠도 치앙마이 한 달 살기, 발리 한 달 살기 등의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내 그렇게 하지 못하는 현실의 벽에 자꾸만 부딪혔고 그럴 때마다 다시 한번 퇴사를 계획하고 고민했다. 그러나 변한 계절에 발맞추듯 쌀쌀한 기운이 창문으로 새어오는 아침이 되면 나는 어김없이 일어나 출근했다. 변한 게 있다면 아이스커피 대신 따뜻한 티를 책상 위에 두고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던 지난 10월 말 정말 예상치 못한 출장이 결정됐다. 생애 첫 출장이었는데 베트남으로 무려 한 달을 다녀오라는 지시였다. 우리 회사는 베트남 소재의 공장이 있어서 직원들의 출장이 잦은 편이지만 그럼에도 이번 파견은 갑작스러웠다. 나는 이렇게 한 달 살기를 원한 게 아니었는데.. 좋든 싫든 가야 했으니 나의 ‘동남아 한 달 살기 프로젝트’는 이런 모양으로 갑자기 실현됐다.


 베트남이 처음은 아니다. 4년 전, 열흘 간 하노이와 호치민 등 베트남의 몇몇 도시들을 여행했다. 그때 나는 베트남 음식을 비롯한 이 나라의 모든 풍경과 사랑에 빠졌다. 아침부터 찌는 듯한 더위에 숙소를 나서며 제일 먼저 찾았던 연유 커피는 어찌나 녹진하고 달았던지. 노점에서 쭈그려 앉아 먹었던 분짜는 또 얼마나 맛있었는지. 쌀국수의 육수는 우리나라 순댓국에 버금갈 만큼 농도부터 남달랐고 저렴한 가격에 배 터지게 먹을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일정에 욕심을 부렸던 탓에 몸은 녹초가 되었지만 마치 새로운 세계로 온 듯한 풍경을 자랑하는 고산지역 사파, 아바타가 튀어나올 것 같은 하롱베이에서의 수영은 잊을 수 없다. 출장이 결정되니 자연스레 이 여행의 기억들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구글 지도를 펼쳐보고 어떤 곳을 갔었는지 회상했다. 그러면서 차츰 일하러 가는 것도 잊고 조금씩 설레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은 어디냐고? 나는 지금 베트남이다.   

 공장은 하노이 시내에서 약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평일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출장 온 첫 주말에는 시간이 나서 하노이 시내로 나가보았다. 그리고 4년 전 그때 그곳들을 다시 찾았다. 다시 찾은 하노이는 여전했다. 수많은 여행객이 몰려 활기로 가득 찬 곳이었다. 여행객으로 잠시 머물렀을 뿐인데, 그때의 기억이 나에게 익숙한 어떤 느낌이 들도록 도와줬다. 그런데 이상했다. 내가 다시 찾아 마지않았던 하노이 었는데, 나는 어쩐지 그때의 것과 다른 감흥을 느끼기 시작했다.  

 기억에 없었던 이 곳의 오토바이 소음과 매연들은 나를 너무도 메스껍게 했다. 그래서인지 쉽게 피로해졌고 머리가 아팠다. 지나다니며 노점에서 파는 음식을 보면서는 괜스레 위생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반미부터 쌀국수까지 하루에 다섯 끼 정도는 먹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했건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짧은 시간 안에 둘러보고 다시 회사로 복귀해야 한다는 것도 내심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다. 그러면서 차츰 깨달았다. 지금의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라는 것을. 사 년 전 그때보다 조금 더 늙고 예민해졌다는 것을. 나는 지금 여행 중이 아니고 출장 중이라는 것을.  

그랬다. 하노이는 똑같았는데 나는 변했다.


 여행과 출장은 너무도 다르다. 돈을 쓰는 것과 버는 것만큼의 온도 차라고 해야겠다. 어쩌면 일의 연결고리를 뚝 끊기 힘든 출장이라는 환경이 내가 온전히 즐기지 못하는 것의 원인일 테지만 어쩐지 관광지에서조차 즐겁지 않은 걸 보니 이 ‘일’이라는 것이 지금 나의 머릿속에서 정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딘가에서 ‘한 달 살기’가 기분전환이 되려면 이국적인 환경보단 내가 어떤 시기 속에서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꾸리고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나의 동남아 한 달 살기 프로젝트는 도피의 성격이 짙었다. 지금 하는 뭐든 다 때려치우고 그저 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출장을 나와 있는 이 시점에 다시금 드는 생각은 내가 나의 일상을 즐기지 못한다면, 세계 그 어느 곳을 가도 즐겁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한 달 살기’는 3~4일 좋은 것만 보고 먹는 여행이 아니다. 그것은 작은 버전의 일상이다. 그리고 이 것은 더 큰 버전 일상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한 달 살기 프로젝트는 도피일 수밖에 없고 다녀온 후 오히려 더 큰 슬럼프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큰 것이었다. 변화는 한국의 일상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하고 있는 무언가가 의미 있고 즐겁다면 나는 평생을 살아온 내 방구석에서도 행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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