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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나딘 Oct 03. 2020

엄마의 그림일기-등원 전쟁

한 살의 토리는 어느새 등원 전쟁의 참전용사로 성장했단다.

널 낳은 순간부터 "유명한 어린이집은 대기를 신청해야 한다"는 주변의 잔소리를 완전히 무시했던 나!

3살 9월부터 난 토리를 어린이집이라는 곳에 보내기로 결심했단다. 주변의 엄청난 추천에도 불구하고 난 무조건 나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곳을 찾아다녔단다. 첫째는 밥이 실하고 맛있는 곳, 그리고 철저한 안전 개념을 지닌 원장님과 선생님들이 계신 곳, 마지막으로 가식이 가장 적은 곳을 찾는 것이 바로 나의 조건이었단다.


와~ 세상에나...

그렇게 마음을 먹고 찾아보니 보낼 곳이 없더군.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사는 동네는 기본 20년 이상 살고 계신 어르신이나 근처 대학의 재학생들이 많다는 점 때문이었지. 그리고 나도 몰랐지만 내가 안전에 너무 예민하다는 점이 문제였단다.


한 곳은 원장님 책상에 바퀴벌레 약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바로 돌아왔어. 또 다른 곳은 가는 길에 원생들이 선생님과 함께 놀이터로 향하는 모습을 보고는 '탈락'을 외치기도 했지.

날개 잃은 이카루스처럼  몸과 마음이 탈탈 털리기 직전 마지막으로 향한 곳이 토리가 다니게 된 어린이집이야.

앙리 마티스, <이카루스>, 1946.

"원장님, 교실에 소화기 몇 대 있나요? 소방 대피 훈련하면 보통 몇 분만에 원생 전원이 다 나오나요?"

(교실과 교실 사이나 복도에 비치해둔 것이 아니라 각 교실마다 있기를 희망했었고, 전원 대피 시간을 계산할 정도로 형식이 아닌 실제 상황을 대비한 훈련을 하기를 희망했었단다.)


"응급상황 발생하면 전화로 먼저 알려주시지요?" (전화한다고 황금 타임 놓치는 일은 없어야지.)

"119 오면 병원은 보통 제가 서류에 지정한 곳으로 가시지요?"

(원장님의 대답은 부모가 기재한 곳으로 가는 것이 맞다고 했지.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응급실은 접수와 이후 처리가 빨라야 한다면서 내가 가진 생각과 동일하게 의견을 주셨단다.)


"부모가 교회에 회의적이어도 무관한가요? 종교적 강제성은 배제하고 인 위주의 말씀을 해주시나요?"

(목사님이 아이들에게 해주시는 말씀은 대부분 전래동화와 같이 인성을 강조하셨어. 물론 결론은 하느님에 대한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나중에 보니 너에게 많은 위로가 되었더구나.)


2년 하고도 6개월을 다닌 그곳에서 토리는 가장 밥을 잘 먹는 아이였단다. 늘 "더 주세요!"를 외쳤고, "어머님, 토리가 오늘은 국이 맛있었는지 세 번을 더 먹었어요."라는 말도 종종 들었지. 원장님도 나중에 말씀하셨는데 내가 처음 상담을 왔던 날 자신이 평생 원을 운영하면서 나 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을 처음 봤다고 하더라. 그래서 선생님들께 "저 엄마 보통 아니겠다. 안 오셨으면 좋겠다."라고 하셨단다. 물론 나중엔 이런 날 가장 잘 이해해주신 분이었단다.


그리고 너의 5세 겨울, 다시 시작된 신입생 신청 전쟁!

유치원이닷!

에두아르 뭉크, <멜랑콜리>, 1894-1896.

이게 무슨 일이니? 어린이집에 대한 만족도 최고였는데 다시 알아봐야 한다니 앞이 캄캄하더라. 무슨 대학 입시 같은 느낌으로 추첨을 하고, 내 번호가 적힌 공이 뽑히면 로또 된 것 마냥 다들 비명을 지르더라. 자신만만하던 엄마도 다 내려두고 산골로 들어가서 숲 속에 풀어놓고 마냥 뛰어놀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단다. 우울함과 좌절감에 이유를 모르겠는 그런 짜증이 매일매일 솟구쳤어.

난 영어 유치원은 절대 보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정말 미안하지만 엄마의 일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오후 5시까지 원에서 데리고 있어 주는 영어유치원을 보내기로 했단다.

물론 토리는 초등학교를 보내달라고 졸라댔지. 어이없게 귀여운데 5살부터 거의 매일 초등학교 넣어달라고 하길래 시험 봐야 한다고 거짓말해버렸어. (미안!)


하.......

폴 세잔, <세잔 부인의 초상>, 1883-1887.

내가 생각한 삶을 살 수 없다는 점은 너무 상실을 안겨주더라. 게다가 내가 너무 고립된 사고방식을 지녔었다는 어떤 생각의 틈은 거침없이 밝은 빛을 내 안으로 끌어들이는데 정신을 차릴 수가 없더구나.

도대체 왜 6살에 그런 어려운 영어책을.... 뭔 수학은 왜 스토리...

정말.... 모르고 초등학교에 가면 큰일 날까?

사립이든 국공립이든 유치원은 하원 이후 어쩔 수 없이 학원을 보내야 하는 이 갑갑함이란....


어쩌면 내가 이제야 진정한 한국사회로 연결되었나 싶기도 하더라. 아이가 성장하면서 사회에 발을 내딛는 단계마다 이렇게 혼란스러울 줄 누가 알았겠니? 당시 난 정말 저 그림의 부인이랑 아주 똑같은 표정으로 모니터를 매일매일 들여보고 있었던 것 같다. 온통 우리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했지.

당시에 엄마는 시간강사도 나가야 했고, 내 공부도 해야 하면서 살림도, 토리도....

아빠도 할머니도 도와주셨지만 엄만 이상하게 그럴수록 미안해서 부담이 더 커지더라.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러려고 내가 그렇게 지내왔나...... 내가 이러면 이 녀석은 어쩌나..."

폴 세잔, <벨뷔에서 본 생트 빅투아르 산>, 1885년경.

그런데 토리야, 있잖아~ 난 나도 그리고 너도 포기하지 않기로 했단다. 이유를 말하기 전에 우선 세잔 아저씨 얘기를 조금 해줄게. '현대미술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화가가 바로 폴 세잔이야. 이 작가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그림 그리는 방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단다. 물론 배우기는 했지. 그런데 늘 생각하고 고민했지. 세잔은 자연풍경을 그리는데 색이나 그림의 깊이감과 관련된 고민에 빠졌어. 실제 자연을 관찰했을 때 느껴지는 순간을 종이에 옮기고 싶은데 그렇게 하면 너무 산만하거나 그 밝은 색 때문에 실제 그 장소에서 작가가 느끼는 것과 같은 현실감을 잃게 되는 거지. 또는 깊이 있는 진짜처럼 풍경을 종이에 옮기려니 풍경을 작가가 가서 직접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훨씬 오래 전인 중세시대의 그림 같이 돼버리는 거야. 두 문제가 서로 해결할 수 없도록 서로 계속 부딪히고 조화롭게 작품이 완성되지 않았던 거지. 그런데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실험하고 노력할 결과 아주 단순하지만 명료하게, 밝은 색채를 사용하면서도 눈속임이 아닌 화면의 깊이감을 질서 있게 조율했단다. 그래서 현대미술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되었단다.

어떤 사상가는 보이는 세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의미를 담아낸 작가로 세잔을 설명했단다. 세상을 보면서 내가 무언가의 지식을 습득하게 되는 감각을 통해 나의 의식이 어떻게 세상으로 열리게 되는지 아주아주 어렵게 설명한 사람이 자신의 책에 그렇게 썼단다.


토리가 성장하는 과정에 내가 세잔 같은 실험을 할 수는 없을 거야. 그런데 어린이집과 유치원의 당황스러웠던 경험이 조금 더 주요한 시기에 나에게 그리고 너에게 교훈을 남겨줄 수는 있을 것 같아. 그래서 한 동안 엄마도 자포자기했던 연구자로서의 길을 다시 걸어가기로 했단다. 내가 많이 지칠 수 있겠지만 우린 100세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조금은 느리게 그래서 조금은 덜 예민할 수 있게 마음을 다지면서 가려고 해.

너 역시 나중에 스스로의 길을 포기하지 말라고. 내가 보여주고 싶어서 그래. 바로 이게 그 이유란다.


물론 지금도 갑갑하지. 아직도 시스템에 대한 불만은 가득하지.

그런데 내가 어떤 세상으로 내 의식을 열고 어떤 속도로 통로를 만드는지에 따라서 조금은 여유가 생기더구나. 메를로 퐁티가 이러라고 그 책을 쓰지는 않았겠지만 세계 '에로의to' 존재로 거듭하기 위해 둘 다 조율을 잘해보자.


후기로 말하자면 너의 유치원에 대한 나의 선택은 그다지 훌륭하지 못했단다. 그럼에도 토리가 매우 즐겁게 지내줘서 고마워. 밥순이 토리는 늘 점심이 너무 맛이 없다며 툴툴거리지만, 덕분에 내가 준 음식은 늘 싹싹 비워주니 난 고맙단다.

토리야, 난 방법을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방향도 헷갈리지만 그럼에도 이제는 너와 상의할 수 있어서 조금은 다행이라 생각해. 지금까지 잘 조율한 것처럼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문제들을 앞으로도 잘 풀어보자. 첫걸음마에서 지금 엄청 빠른 달리기 선수까지 온 것처럼 말이야.


그런데 토리야~ 두둥!!

이번에는 초등학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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