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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Oct 03. 2024

권력의 단맛에 이끌린 악녀들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한번 권력의 단맛을 본 이는 꿀단지에 이끌린 파리처럼 권력을 향해 나아가는 법입니다. 그 종착점이 권력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권력의 장은 오랫동안 남성만이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권력을 갖기 위해 여성들은 우회적인 방법을 써왔습니다. 권력을 가진 남성을 유혹해 그를 통해 자기 뜻을 관철하는 방법입니다. 루이 15세의 첩이었던 퐁파두르 부인은 문화 예술, 학문의 후원자였으며, 프랑스 장식 미술사에도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퐁파두르 부인은 허울뿐인 자리에 머무르며 격무에 시달리다가 43세의 나이에 요절했습니다. 이처럼 권력의 말로는 언제나 무상한 법입니다.

     

권력자의 최측근이 되는 일에는 많은 위험성이 따릅니다. 권력자의 마음이 바뀌면 자리에서 물러나거나 때로 생명마저 잃습니다. 이럴 때 자주 등장하는 상황이 삼각관계입니다. 새로운 경쟁자는 최측근이 지닌 힘을 제어하고 균형을 잡는 역할을 했습니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은 그들 배후에 있던 세력 간의 암투에서 희생양이 되어야 했습니다. 대개 권력자는 남성이었지만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처럼 여성 군주도 있었습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대신들에게 추파를 던지며 그들 간의 경쟁을 부추겼습니다.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에서는 세 여성 사이에서 삼각관계가 발생합니다. 권력을 가진 이도, 그 권력을 나눠 가지려는 이도 모두 여성입니다. 여성끼리의 유혹과 질투, 시기, 권력 다툼은 더욱 복잡하고 미묘합니다.      

웅장한 궁정을 배경으로 영화는 시작됩니다. 화려하게 치장한 앤 여왕(올리비아 콜맨)은 말버리 공작부인 사라(레이첼 와이즈)에게 묻습니다. 자신이 연설 도중에 혀 짧은 소리를 내지 않았느냐고요. 사라가 그런 일은 없었다고 일축하자 앤 여왕의 표정이 밝아집니다. 이 장면은 두 사람의 관계성을 함축함과 동시에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의 성격을 암시합니다. 여왕이 사라에게 의존하는 관계이며 관계의 주도권을 쥔 사람은 사라입니다. 여왕을 정서적으로 안정시키고 국정을 돌보는 일이 사라의 직무입니다. “권력 게임이 불가피하다면, 그것을 거부하거나 서투르게 다루는 것보다는 게임의 달인이 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로버트 그린의 책 [권력의 법칙]에 나오는 말입니다. 사라는 로버트 그린이 책에서 묘사한 인물에 딱 들어맞는 여성입니다. 여왕을 살뜰히 보필하지만, 결코 여왕이 원하는 것을 전부 주는 법이 없습니다. 그럼으로써 여왕은 더욱 사라에게 의존하게 됩니다. 단호하고 엄격한 부모와 그런 부모에게 매달리는 자식 같은 관계라고나 할까요.


사라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부와 명예를 좋아하지만, 지나친 허영심은 없습니다. 남편인 말버리 공작 존 처칠과 휘그당을 위해 물밑 정치를 벌입니다. 사라 역시 많은 정치인이 그렇듯, 자신이 하는 일이 국익을 위한 일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그녀는 냉정하고 빈틈없고 결핍이라고는 모르는 인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앤과 사라의 오랜 의존관계에 서서히 균열이 발생합니다. 사건의 발단은 사라의 사촌 동생 에비게일(엠마 스톤)의 등장에서 시작됩니다. 고귀한 신분의 언니와는 달리 에비게일은 한 때 귀족 가문의 영애였으나, 지금은 오갈 데 없는 처지입니다. 아버지의 도박 빚 때문에 남자에게 팔려 간 아픈 기억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믿었던 사촌 언니는 냉정하기 짝이 없고, 궁정의 하녀 생활은 고달프기만 합니다.      

여기에서조차 내쫓기면 에비게일은 다시 밑바닥 인생으로 몰릴 판입니다. 에비게일의 역할 모델은 사촌 언니 사라입니다. 신분을 회복하고 걱정 없이 살려면 사라처럼 권력의 생리를 잘 알아야 합니다. 에비게일은 궁정 정원에서 약초를 캐서 여왕의 다리에 생긴 통풍을 치료합니다. 이를 계기로 앤 여왕, 사라, 에비게일 사이에는 삼각관계가 형성됩니다. 삼각형을 이루는 변 두 개가 같은 길이일 때에는 관계는 팽팽하게나마 유지됩니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삼각형의 한 꼭짓점과 가까워지는 다른 꼭짓점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에비게일은 사라와는 전혀 다른 자신의 매력을 활용합니다. 여왕이 애지중지 돌보는 토끼들에게 관심을 보입니다. 사라는 왠지 섬뜩하다면서 인사조차 건네지 않는 토끼들에게 말입니다. 사실 앤 여왕은 열일곱이나 되는 아이들을 잃은 마음의 상처가 있습니다. 여왕이 기르는 열일곱 마리의 토끼는 앤에게는 상실을 치유하는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이 일로 여왕은 냉정한 사라와는 달리 순수하고 따뜻한 에비게일을 가까이하기 시작합니다. 어느 밤, 에비게일은 사라의 권력의 원천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눈뜨고 맙니다. 앤 여왕과 사라의 관계는 정신적인 것 이상이었습니다. 서로를 탐하는 앤과 사라를 바라보는 에비게일의 눈동자가 반짝입니다.     


에비게일의 순진하고 착해 보이는 얼굴 뒤에 숨어있던 당돌한 악녀가 나타납니다. 에비게일은 젊음과 미모를 무기로 앤 여왕을 유혹합니다. 유혹은 성공합니다. 그러나 하룻밤 사랑으로 여왕의 마음을 붙들어 두기란 불가능합니다. 앤 여왕과 사라의 사이에는 오직 두 사람만이 공유하는 오랜 추억과 비밀이 존재합니다. 여왕이 사라에게 느끼는 질투와 집착마저도 그들 역사의 일부이지요. 게다가 비록 건강하지 못한 방식일지라도 두 사람은 공생관계에 가깝습니다. 서로가 없다면 그들은 똑바로 설 수 없습니다. 앤 여왕에게는 사라의 정치력과 강단이, 사라에게는 그녀를 후원하는 여왕이란 자리가 필요합니다. 그 견고한 사이에 에비게일이 끼어들 틈은 없어 보입니다. 그만큼 두 사람의 애착 관계는 깊습니다. 사라와 앤 사이에 있던 삼각형의 변은 어느새 다시 가까워집니다. 가만히 당하고 있을 에비게일은 아닙니다. 토리당의 당수 할리 경과 정치적 연합관계를 맺습니다.

더는 잃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두려운 것도 없는 법입니다. 에비게일은 사라에게 줄 차에 수면제를 넣었습니다. 차를 마시고 말에 오른 사라는 그만 실종되고 맙니다. 앤 여왕은 사라가 자신과 힘겨루기를 한다고 믿고 그녀를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곧 여왕은 패닉 상태에 빠져 사라를 찾아 헤맵니다. 사라를 해친 에비게일 역시 마음이 편하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이 사건을 계기로 ‘눈앞에 보이지 않는 적’이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도 에비게일은 사라가 없는 틈을 타서 자신의 지위를 강화합니다. 자신에게 관심이 있던 마샴 대령과 결혼해 귀족 신분을 되찾습니다. 상냥한 태도와 친절한 말로 애정 결핍에 시달리는 여왕을 구워삶습니다.       

사라가 눈을 뜬 곳은 어느 매음굴입니다. 하필 말에서 떨어진 그녀를 구한 여인은 그곳에서 일하는 여성이었습니다. 사라는 간신히 궁으로 돌아오지만, 얼굴에는 심한 흉터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잃고 말에게 끌려다니다 생긴 상처 때문이지요. 권력자란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존재일까요? 앤 여왕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사라가 흉한 몰골로 돌아오자 그녀에 대한 흥미를 잃습니다. 게다가 에비게일은 궁정에서 사라의 역할을 훌륭하게 대행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몰아붙이는 사라에게 에비게일이 대답합니다. “나도 내가 이토록 믿지 못할 인간인 줄 몰랐어요. 그러나 다 당신에게 배웠어요.” 르네 지라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타인을 따르는 욕망이란 예외 없이 타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다”다. 에비게일은 사라가 권력을 다루는 방식을 능숙하게 따랐을 뿐입니다. 물론 사라와는 다른 에비게일만의 스타일만으로 말이죠. “저는 여왕 님이 마음의 짐을 덜고 행복해지기를 바랄 뿐이에요.” 에비게일이 여왕에게 건넨 말은 우리 모두 누군가에게 듣고 싶던 속삭임이 아닐까요?

권력도 사랑도 전부 잃게 된 사라는 그만 ‘선을 넘고’ 맙니다. 사라가 그녀에게 받았던 연애편지를 공개하겠다고 앤 여왕을 협박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라가 간과한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사라에게 의지하는 것처럼 보여도 여왕은 제왕학을 공부하고 자란 지도자입니다. 사라와 에비게일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두 사람을 경쟁시킨 이도 여왕이었습니다. 애초에 사라와 에비게일은 여왕의 권력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허수아비일 뿐입니다. 사라가 실종된 기간에 앤 여왕 역시 조금씩 홀로서기를 준비했을지도 모릅니다.      

실존 인물인 앤 여왕은 18세기 영국이 발전해 나가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한 인물입니다.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에서 승리했고, 1707년 스코틀랜드를 통합했습니다. 또 앤 여왕의 치세 하에서 정당정치가 본격화되었습니다. 사라와 에비게일 사이에서 줄다리기하듯 휘그당과 토리당을 번갈아 등용합니다. 통치하지는 않지만 군림하는 여왕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한 셈입니다. 영화 속에서 보였던 나약하고 히스테릭한 면은 권력자가 지닌 여러 얼굴 중 하나일 뿐입니다.


궁 밖으로 쫓겨나는 사라는 앤 여왕의 침실 밖에서 마지막으로 읍소합니다. “왜 나를 애비게일처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지 않았던 거야?”라고 여왕이 묻습니다. “사랑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까요.” 두 사람의 대화는 절절한 사랑 고백에 가깝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라는 때로는 친구로서 때로는 연인으로서 언제나 앤의 곁에 남아있었습니다. “너와 나는 목적이 달라” 떠나는 그녀를 지켜보는 에비게일에게 사라가 남긴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하는 목적은 다르지 않습니다. 신분 회복과 물질적 풍요가 목적인 에비게일에 비해 사라의 목적이 더 대의에 가까워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권력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목적은 같습니다. 에비게일은 갑작스럽게 손에 쥔 권력에 전혀 훈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궁중의 향락에 빠져 여왕을 보필하기를 게을리합니다.      


급기야 여왕 곁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무심코 여왕이 기르는 토끼의 등 위에 발을 얹어놓고 맙니다. 압사당할 위기에 처한 토끼는 다행히 그녀의 발에서 벗어납니다. 그제서야 여왕은 에비게일의 위선과 그녀가 늘어놓는 이야기의 피상성에 대해 알아차립니다. 에비게일의 머리채를 쥔 여왕의 손은 그녀를 놓아줄 기색이 없습니다. 에비게일과 앤 여왕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화면 가득히 토끼들이 무한 증식합니다. 다산을 상징하는 토끼란 동물은 여왕에게는 잃어버린 자식에 대한 애도와 자기연민을 상징합니다. 에비게일에게는 없애도 없애도 계속 등장하는 정적, 그리고 끝없이 이어질 불안을 상징합니다.      

이 블랙 코미디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관습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토리당의 당수인 로버트 할리 경(니콜라스 홀트)은 신경질적이고 예민합니다. 이성적이고 냉정한 사라는 할리 경에게 화장이나 고치라고 조롱합니다. 마샬 대령은 곱게 차려입고 한밤중에 에비게일의 방을 찾습니다. 에비게일은 마샬 대령에게 이렇게 말하며 그의 짙은 화장을 손으로 벅벅 지웁니다. “화장 안 한 당신의 진정한 얼굴을 보고 싶어요.” 에비게일의 충고에 따라 가발을 벗은 채로 나온 마샬 대령을 보고 할리 경은 경악하며 말합니다. “남자는 예뻐야 해!” 이 유쾌한 성 역할의 전복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합니다. 18세기의 궁정에는 여성보다 화려하게 치장한 남성들로 가득했으니까요.      


세 악녀가 등장하는 삼각관계는 긴장감으로 가득한 동시에 여전히 로맨틱합니다. 사라가 떠난 뒤에도 앤 여왕과 사라는 여전히 애증이란 감정으로 엮여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다루지 않지만, 실존 인물 사라와 에비게일의 운명은 또다시 뒤바뀝니다. 여왕 사후에 복권된 사라는 이른바 남해회사 버블 사태 때 투자해 성공해서 거부가 됩니다. 에비게일은 여왕 사후에 낙향해서 조용히 여생을 마칩니다. 이 정도면 권력자의 말로치고는 그리 나쁘지 않다고요?      


애정 결핍과 신경증, 갖은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중요한 자리에서는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는 복잡한 여왕의 심경을 연기한 올리비에 콜먼은 2018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습니다. 다른 두 사람의 악녀들 역시 나란히 2018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립니다. 영화가 제작되기 20년 전에 완성된 이 영화의 각본은 오랜 시간 동안 제작사의 책상을 옮겨 다닙니다. 할리우드가 권력을 둘러싼 여성의 삼각관계에 대한 영화를 다룰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탓이겠지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몇 년 뒤 또 다른 악녀 ‘벨라’를 주인공으로 한 [가여운 것들]로 엠마 스톤과 다시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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