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요리사 2

by Zero

남들 다 한 마디씩 얹기에 나도 편승해서 남기는 흑백요리사 시즌 2 후기


너무나 재미있게 보았다. 시즌 1이 워낙 크게 흥행했고 이런저런 논란도 있었지만 상당히 재미있게 보았던 터라 과연 시즌 1을 넘어서는 재미를 찾을 수 있을까 의심했는데 기우였다. 인물들의 서사와 캐릭터가 시즌 1을 한참은 뛰어넘었다고 생각한다.


역시 우승자 최강록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을 수 없다. 시즌 1에서도 가장 응원했는데 떨어져서 아쉬웠었다. <냉장고를 부탁해>에 나와서 15분 요리 대결을 하길래 어라 저 포맷은 최강록과는 안 맞을 텐데 싶었는데 역시나 초반 몇 회 나오고는 안 나오더라. 180분을 요리 하나 만드는 데 오롯이 써야 하는 요리사가 15분 요리 대결이 잘 맞을 리가. 넷플릭스 <주관식당>에도 나왔었는데 문상훈과 호흡도 별로였고 방송을 끌고 가기에는 최강록이 너무 밋밋한 느낌이라 개인적으로도 별로였다. 역시 최강록은 서바이벌에서 진가가 드러나는 듯하다.

마지막화는 감동이었다. 특히 '척하는 삶'이라는 워딩이 가슴에 와닿았다. 잘하는 척, 원래 그런 척. 다른 사람들이 '조림핑', '연쇄조림마'라는 별명을 붙여가며 조림의 왕으로 칭송할 때 정작 본인은 내가 정말 남들이 이야기하는 만큼 조림을 잘하는 것인지 의심해 가면서 다른 이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 것인가. 나는 특별하지 않다는, 그저 주방에서 열심히 요리하는 한 사람일 뿐이라는, 별 거 아닌 거 같으면서도 실은 정말로 가지기 어려운 겸손의 철학이 마음을 울렸다. 어느 분야든 성공하려면 나름의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했다.


요리괴물이 이렇다 저렇다 말이 많던데 (편집을 일부러 그렇게 했을 수도 있고 서바이벌이라 본인이 일부러 더 그랬을 수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다소 건방지고 과하게 자신감 있어 보이는 부분이 다수의 시청자들의 반감을 산 것 같더라만 나는 사실 요리괴물의 확실한 맺고 끊음이 좋아 보였다. 인물에 대한 호감과는 별개로, 누구와 같이 일을 하고 싶냐고 묻는다면 나는 요리괴물을 선택할 것이다. 같이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업무를 명확하게 나누고 자기 일만큼은 확실하게 해 주는 쪽이 제일 편하다. 수염은 깎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다.


가장 눈에 띈 인물은 사실 후덕죽이다. 가장 높은 연배에도 팀전에서 주연이 되기보다는 조연을 자청하여 재료를 다듬고 준비하는 겸손함, 항상 여유가 배어 있고 절제되어 있는 동작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요리에 대한 끝없는 탐구심까지, 한 분야의 대가가 되려면 가져야 하는 덕목들을 모두 보여준 것 같아 존경의 마음이 절로 들었다. 57년의 경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후배들과의 요리 대결에 참여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결정인가. 더 이상 얻을 것이 없을 것 같은 분이 대체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왜 나왔을까 의아했는데, 회차가 거듭될수록 이해가 되었다.


후덕죽 셰프를 보면서 김영진 교수님의 모습이 저절로 오버랩되었다. 외과 의사로서, 또 인생의 선배로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다. 김영진 교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어내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지난 2019년 교수님께서 정년퇴임하실 때 올렸던 편지글을 첨부하는 것으로 대신할까 한다.


생각난 김에 이따가 전화 한번 드려야겠다.




김영진 교수님께


교수님의 정년 퇴임이 눈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철부지 어린 시절에는 나이가 들어 그만두는 것이 무슨 축하할 일이냐고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 스스로가 교수라는 직함을 달고 나니 정년까지 교수직을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새삼 깨닫습니다. 제가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많은 교수님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마음속 깊이 존경하여 닮고 싶은 제 인생의 롤모델을 한 분만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김영진 교수님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의사로서, 교수로서, 인생 선배로서, 모든 면에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갓 발령을 받고 아직 모든 것이 서툴던 시절, 교수님께서는 든든한 나무처럼 신출내기 외과 의사의 뒤를 받쳐 주셨습니다. 설령 제가 수술 중 사고를 치더라도 수습을 해 주실 분이 언제든지 뒤에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실제로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몇 번이나 교수님께 도움을 요청했었지요. 교수님께서는 단 한 번의 거절도 없이 그 모든 상황을 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만들어 놓은 어려운 상황의 뒤치다꺼리를 부탁드려 송구스럽다는 말씀을 드리면 교수님께서는 늘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선배의 역할이다. 후배 교수가, 제자가 나를 필요로 하는데 내 능력이 닿는다면 마다할 이유가 있느냐. 전혀 부담스러워할 것 없다.” 덕분에 저는 경험이라는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고, 후배 외과의들을 위해 제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유난히 기억에 남는 하루가 있습니다. 횡격막과 종격동에 걸쳐 상복부 가장 깊은 곳에 재발한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다가 우심실 벽이 손상을 입은 적이 있었지요. 갑작스러운 대량 출혈로 심정지가 와서 가슴압박까지 해야 하는 매우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제1조수로 수술에 참여하고 있던 저는 이전에 한 번도 보지 못한, 그야말로 뿜어져 나오는 출혈에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로 당황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교수님께서는 일말의 당황한 모습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순식간에 복강 전체를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넘쳐흐르고 있는 피를 헤치고 오른손을 집어넣으시더니 이제 괜찮다며, 출혈 부위는 손으로 막았다며, 당황하지 말라고 오히려 저를 안심시키셨습니다. 어찌 당황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제가 여태껏 살면서 보았던, 가장 짧은 시간 동안의 가장 많은 출혈이었습니다. 제정신을 챙기지 못하고 있던 저와는 달리, 교수님께서는 얼굴 표정 하나 안 바뀌고 침착함을 유지하셨습니다. 사태가 진정이 되고 환자가 무사히 중환자실로 퇴실한 후, 후들거리는 다리로 주저앉아 생각했습니다. ‘아, 저분은 태산과도 같은 분이시다. 나는 태산을 모시고 일하는 행운을 누리고 있구나.’ 훗날 언젠가 말씀하셨지요. “집도의가 당황해서는 절대 안 된다. 위급한 상황일수록 냉정해져야 한다. 그래야만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수습할 수 있다.” 수술 중 어려운 상황에 부닥칠 때마다 수술대 위에서 가슴압박을 했던 그날 그 순간을 생각하며 심호흡을 합니다. 그리고 속으로 되뇌지요. ‘그래, 지금 상황은 그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만 냉정해지면 된다.’ 그러면 요동치던 심장이 거짓말처럼 가라앉고 평정을 되찾게 됩니다. 아마도 평생 기억하게 될 외과 의사의 덕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교수님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문구가 있습니다. 바로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입니다. 교수님을 곁에서 모시고 일하며 늘 생각했습니다. ‘나는 과연 저렇게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최신의 의학 지식과 새로운 수술법을 익히고 공부하며 스스로를 가다듬을 수 있을까?’ 대답은 항상 ‘아니오’였습니다. 교수님께서는 가장 활발히 수술하고 공부하며 연구해야 할 저희 젊은 후배 의사들보다도 항상 한 발짝 앞서 있으셨습니다. 대장암 분야의 최신 연구 경향에 대해서 저희보다 먼저 공부하여 알려주셨고, reduced-port laparoscopic surgery, transanal TME와 같은 minimally-invasive surgery는 물론이거니와 cytoreductive surgery with HIPEC과 같은 maximally-invasive surgery도 당신께서 먼저 시도를 하고 시행착오를 겪으신 후 얻게 된 노하우를 저희에게 전수해 주셨습니다. 저희는 그저 교수님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항상 새로울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 떠나시지 못하도록 붙잡고 싶은 마음이 솔직한 제 심정이지만 그럴 수는 없겠지요. 교수님께 배운 지식, 학문을 대하는 진지함과 열정, 수술장에서의 침착함과 담대함, 후배 교수들과 전공의를 존중하며 사랑하는 태도, 이 모든 것을 가슴에 품고 살겠습니다. 교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한다면 그만큼 더 나은 외과의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습니다.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여는 교수님의 정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가슴 깊이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강녕하십시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인공지능의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