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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펜타프리즘
by 루시아 Jul 01. 2018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권위에 중독된 사람들


서로의 나이를 갈망하는 사람들


당신은 어느 사교 모임에 처음 참석했다. 당신을 제외한 사람들은 이미 모임에 나온 지 꽤 되어서 도란도란 수다를 떨고 있다. 모임 시작 시각이 되자 모임장이 당신을 소개한다. 당신은 쭈뼛쭈뼛 인사를 하고, 이어 사람들이 당신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한다. 무슨 일을 하는지, 어디에 사는지, 학교는 어딜 나왔고 전공은 뭔지, 모임엔 어떻게 오게 됐는지 등등. 피곤한 질문 세례에 부지런히 대답해주던 당신에게 질문 하나가 더 날아든다.


“근데 ○○ 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첫 만남에서 이런 대화가 오가는 건 그다지 낯선 풍경이 아니다. 적어도 이 나라에서는. 살면서 다들 한 번 이상은, 아니 수십 수백 번은 겪었을 거다. 질문 이후의 상황도 자연스레 그려질 거다. 서로의 나이를 확인하고, 호칭을 정리한다. 붙임성이 좋은 사람이라면 곧장 말을 놓자고 할 수도 있다. ‘형/오빠라고 불러(요)!’ 하면서.


우리는 왜 서로의 나이를 궁금해할까? 단순히 첫 만남에서의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서? 그런 거라면 나이 말고도 물어볼 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텐데. 취미를 공유할 수도 있고 얼마 전에 본 영화 얘기를 꺼낼 수도 있고 즐겨 듣는 음악이 뭔지 궁금해할 수도 있을 텐데.


답은 대화 속에 들어 있다. 나이를 알아야만 결정할 수 있는 ‘호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자신을 ○○라고 부르게 만들기 위해, 혹은 상대방을 ○○라고 부르기 위해. 바꿔 말하면 누가 누구를 형/오빠/언니/누나라고 부를지 결정한다는 얘기다(아저씨나 할머니 같은 말들은 논외다. 그렇게 부를 정도라면 굳이 나이를 묻지 않아도……). 이 단어들은 기본적으로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상대를 부를 때 쓰이지만, 한국에서는 특유의 언어문화 탓에 좀 더 깊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존비어의 늪: 권위 중독


한국인의 대화 속 언어 체계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존댓말-반말의 존비어 체계와 상호 존댓말 혹은 상호 반말의 친소어 체계다. 존비어 체계에서는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일방적으로 반말을 사용하며, 반대쪽에서는 존댓말만을 사용한다. 친소어 체계에서는 서로가 함께 존댓말 혹은 반말을 사용한다. 한눈에 봐도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을 거다. 존비어는 상호 비대칭적이고, 친소어는 대칭적이다. 그렇다면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


존비어 체계에서는 누가 존댓말을 쓰고 반말을 쓰는지를 결정하는 일이 상당히 중요하고, 그 기준도 나름대로 명확해야 한다. 군대를 예로 들면 직급이 기준이 될 거다. 회사 내 직급이 기준이 될 수도 있을 거다. 이때 직급은 권위를 증명하는 수단이 된다. 즉 존비어 체계에서 반말을 사용하는 쪽은 존댓말을 사용하는 쪽보다 더 높은 권위(내지 직급)를 가진 셈이다.


그런데 존비어 체계는 그런 조직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일상 속에도 깊숙이 침투해 있다. 조직 생활에서만 존비어를 쓰고 일상으로 돌아와서는 모든 지인과 친소어에 기반을 둬 서로 존대하거나 반말을 하는 한국인은, 모르긴 몰라도 전국팔도를 다 뒤져야 찾을까 말까 한 수준일 거다. 그렇다면 일상에서는 뭘 권위의 증명으로 삼을 수 있을까? 이때 필요해지는 게 바로 ‘나이’다. 직급 대용으로 쓰기 가장 적당하다고 여겨지는.


나이가 많은 쪽은 자연스럽게 권위를 획득한다. 상대방에게 형, 오빠, 언니, 누나라고 불림으로써, 혹은 단순히 상대보다 나이가 훨씬 많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부터.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은 곧 이 권위가 어느 쪽에게 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인 셈이다. 이 권위의 정당성은 한국의 존비어 체계 자체가 보장한다. 상대에게 반말할 수 있는 쪽은 그렇지 못한 쪽보다 훨씬 자유롭게 하고 싶은 말들을 쏟아낼 수 있고, 때에 따라서는 훈계도 가능하며, 상대방의 예의(조금 나쁘게 말하면 싸가지) 없음에 분노하고 화를 낼 수도 있다.


이럴 때 나이가 어린 쪽, 존댓말을 해야 하는 쪽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반항하거나 순종하거나. 반항이 성공적으로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국의 존비어 체계에서 권위 없는 자가 권위 있는 자의 말을 부정하는 일은 금기시된다. 당신이 나이 많은 사람의 비합리적인 의견에 반박하면 아마 이런 말들이 돌아올 거다.


“아니, 근데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이, 어디서 따박따박 말대꾸야?”


“형이 말하면 좀 들어라, 싸가지 없는 새끼야.”


물론 이런 말들도 비합리적이긴 마찬가지지만 존비어는 말의 합리성을 따져 묻는 체계가 아니다. 단지 누구에게 더 권위가 있느냐를 따질 뿐이고, 한국에서는 나이가 그 기준이 될 뿐이다. 우리는 모두 같은 속도로 나이를 먹고 있으므로 나이 어린 쪽이 이런 식의 논쟁에서 승리할 방법은 없다(말을 해도 듣질 않는데 어떻게 이기나?).

수직적 위계질서를 전제하는 존비어는 때에 따라 얼마든지 순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군대가 대표적인 예시다. 그곳은 이미 수직적 위계질서에 의해 굴러가는 조직이다. 언어 체계가 그를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조직이 혼란에 빠질 수 있다(물론 군대 조직에 혁신이 일어난다면 얘기가 좀 다를 수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그렇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얘기가 다르다. 한쪽이 강력한 권위를 획득하고 수직적 위계 속에서 대화할 때 얻을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합리적일지 모르는 의견을 나이를 앞세워 간단하게 묵살해 버릴 수 있을 때, 맘에 들지 않는 상대에게 나이를 앞세워 인신공격을 퍼붓고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 때, 사람들은 오히려 멍청해질 수밖에 없다. 논리에 따라 대화하고 자기 생각에서 결함을 찾아내고 그걸 고쳐 발전할 기회를 잃어버린다. 권위에 중독되어 이성을 잃어버리는 셈이다.


흔히 나이 어린 사람에게 던져지는 ‘싸가지’라는 굴레를 떠올려 보자. 숱한 나이 많은 자들이 나이 어린 자의 의견을 묵살하기 위해 사용해 온 무기다. 싸가지 없다는 말 한마디면 승자는 정해진다. 싸가지 없다는 말이 나이 많은 자에게 던져지는 모습을 우리는 본 적이 없다.


나이를 왜 권위로 삼을까


나이를 권위로 삼는 일이 비합리적이라는 건 굳이 힘들여 설명하지 않아도 될 거다. 저 옛날 농경사회에서야 나이 많은 자들의 경험이 곧 생존을 위한 보주 취급을 받았겠지만, 지금은 2018년이다. 그런데 왜 한국 사회에는 여전히 나이를 곧 권위로 삼는 사람들이 남아 있을까.


단순히는 ‘오래 산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이 시발점이 된다고 볼 수도 있다. 이른바 ‘장유유서’를 끌고 와 유교적 가치를 부르짖는 셈인데, 안타깝게도 이 사고방식은 장유유서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서 비롯된다. 장유유서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상호 존중을 기본으로 한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권위를 획득하는 행태는 이 유교적 가치를 완전히 깨뜨리는 셈이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살아온 시간이 그 자체로 권위를 보증한다고 믿는 경우도 있다. ‘내가 이만큼 살았으니 이만큼의 지혜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그걸 존중해야 한다’는 식이다. 그러나 21세기 정보사회에서 누군가의 경험이나 지식의 총량이 나이에 정비례할 거로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개인 역량에 따라 같은 시간을 가지고도 천차만별의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 나이는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경험을 했는지를 보증해주지 않는다. 그저 무언가를 경험할 기회가 얼마나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지표일 뿐이다(아마 나잇값이란 표현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리라). 이 간단한 원리를 무시하고 나이 어린 자들을 미숙아 취급한다면 그건 오히려 본인이 미숙하다는 방증에 불과하다. 당신은 그녀/그가 살면서 어떤 일들을 겪었을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알고 있을지 나이만 가지고는 절대 알 수 없으니까.


나이 어린 자들이 나이를 권위로 삼아 내세우는 자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나이 많은 자들이 어떤 삶을 살았을지 전혀 알 수가 없는데, 막무가내로 권위를 세워 달라고 요구한다면 누가 쉽게 수용할 수 있을까.


권위는 스스로 세우는 게 아니다. 권위를 세워줄 만한 사람은 본인이 가만히 있어도 주변이 알아서 권위를 인정해 준다. 나이 따위를 들이밀며 지질하게 굴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친소어라는 대안을 위해


존비어의 병폐를 없애기 위한 대안으로 친소어가 제시되곤 한다. 서로 존대하거나 반말을 하는 친소어에서, 존댓말과 반말을 가르는 기준은 대화 주체들이 서로 얼마나 친한지다. 아직 그렇게 친하지 않을 땐 서로 존대하고, 친해졌다 싶으면 반말을 한다.


이미 대부분의 한국인은 동갑인 상대방에게 철저히 친소어를 사용해왔다. 최근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나이 차이가 조금 나는 경우까지도 친소어에 기반을 둔 대화를 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기도 하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더라도 이름만을 사용해 상대방을 부르는 모습도 이따금 볼 수 있다. 존비어적 사고방식이 스며든 말들, 즉 앞서 이야기했던 형/오빠/언니/누나의 사용을 피하기 위해서다.


존비어와 대비되는 친소어의 최대 장점은 대화 주체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다. A가 B에게 하지 못할 말은 B도 A에게 하지 못한다. 의견을 나누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상대방의 말을 묵살할 가능성이 극히 낮아지는 셈이다.


존비어의 대안으로 친소어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그동안 존비어 체계에서 권위자로 군림하던 이들(곧 나이 많은 이들)이 권위 중독에서 벗어나야 한다. 권위에 중독된 사람들이 친소어에 적응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저놈은 왜 나보다 어리면서 내 이름을 찍찍 불러대고 말을 놓으려 하나!’ 따위의 생각들이 모락모락 피어오를 테니까. 한평생 써 온 언어와 의식을 고치는 건 절대 쉽지 않다. 논리적 반박 대신 싸가지론을 들이밀며 논쟁에서 승리해 온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변신할 수 있을 리가.


분명한 건 존비어 체계가 한국인들의 속을 갉아먹으면 갉아먹었지, 결코 양식이 되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나이라는 가짜 권위가 나이 많은 자들의 창이 되어 나이 어린 자들을 찌를 때, 사회 진보를 향한 발걸음은 더뎌질 수밖에 없다.


나이를 몰라도 우리는 친해질 수 있다


서로의 나이를 몰라도 대화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걸 기억하자. 형, 오빠, 언니, 누나 하는 호칭이 없어도 서로를 부를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이 호칭들은 서로 좀 친해지고 나서 쓰기 시작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오히려 그러는 편이 수직적 위계가 만들어지는 걸 방지해줄 거다.


혹자는 이렇게 반박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나이를 물어보고 호칭을 결정하는 건 그런 수직적 위계를 만들고 존비어 체계를 재생산할 의도가 아니라고, 단지 그게 좀 더 친근하게 느껴져서 그런 것뿐이라고. 그런 목적이라면 첫 만남에서부터 나이를 물을 이유가 더욱 없다. 첫 만남에서부터 나이를 묻는 상대방의 의중을 모두가 저렇게 생각해줄 리가 없으니까. 이미 나이와 호칭에 존비어적 기의가 스며든 상황에서, 그건 그저 기존 질서를 재생산하는 기제로 작용할 뿐이다.


나이는 그만 물어보자. 당신은 상대방의 취미가 뭔지 오면서 들은 음악은 뭔지 최근에 본 인상적인 영화나 책은 뭐였는지 좋아하는 음식은 뭔지 운동은 즐기는지 물을 수 있다. 나이를 물어보는 것보다 친해지는 데 훨씬 도움이 되는 질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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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글을 씁니다. 사회와 인권에 관심이 많습니다. / luciaecri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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