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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루시아 Sep 21. 2023

어쩌다 정리

정리는 미련 없이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아이가 노트북을 쓰는 시간과 내 시간이 겹치면서 내 것을 방해받는 시간이 늘었다. 노트북을 남편과 아이가 쓰기로 하고 나는 미니를 쓰기로 했다. 남편은 노트북에 있는 파일들은 그대로 두라고 했지만 나는 부득이 우겨 너와 내 파일은 분리하겠다고 했다. 오래된 것들까지 내 파일들은 모두 옮겨 더 큰 화면에서 편하게 컴퓨터 작업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거실에 내놓기 좋도록 주문한 화이트 모니터가 도착하고 파일을 옮기는 작업도 시작되었다. 




한글 파일과 이미지 파일, 주일학교 자료들을 모두 넘기고 필요 없는 자료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딱 거기까지가 좋았다. 진짜 중요한 파일들은 다른 폴더에 담아두거나 최종 확인을 했어야 했는데, 생각 없이 휴지통 비우기를 먼저 눌러버린 것이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정신없이 ‘맥 휴지통 비우기 한 파일 복구’를 검색하다가 번뜩 이번이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찬찬히 생각해 보니 비운 휴지통에 담겼던 것들은 내가 쓴 글, 수업 자료, 센터 문서, 주일학교 문서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내가 쓴 글은 대개 메모장에 초안이 있다. 완성된 글은 브런치나 목글모 밴드에 있기도 하니 일단 통과. 수업 자료는 10년 이상 된 자료들도 있어 가장 아까운데... 안 쓰고 묵혀둔 것도 많았으니 필요하면 이제부터 다시 모으겠다는 마음으로 극복. 센터 문서는 최근 4-5년 간 가장 오래 잡고 있던 것들인데, 차라리 잘됐다. 만약을 위해서 어떤 파일을 남겨 둬야 하나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주일학교 문서들은... 전례 시기별로 ppt 자료를 따로 만들어 두었던 것, 출석부, 서류 어느 하나 남아있는 게 없는데 미리 공유된 밴드에 올려두었으면 일이 되지 않았을 걸. 별 수 없다. 지난해 밴드에 올려놓은 딱 하나 있는 ppt 자료를 받아 그것부터 다시 수정하기로 했다. 그러고도 지난주 전례에 맞게 밤새 수정한 파일을 어이없게 다음 날 아침, 그러니까 어린이 미사가 있는 날 아침에 몽땅 날려먹는 사고가 또 발생했다. 다행히? 반 정도 수정된 파일을 복사해서 다른 이름으로 저장해 둔 덕분에 시간 소모는 덜했지만... 나의 멍청함을 탓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건이다.




그런데 이상한 건 나의 마음이었다. 어느 때보다 편한 마음이 들었다. 지선님과 나눈 채팅에서처럼 전보다 홀가분하다는 느낌이 더 컸다. 당장 필요한 파일을 모두 새로 만들어야 했지만 그럼에도 오래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간 것 같은 그런 느낌?


정리는 무척 힘들다. 자발적으로 무언가 정리를 하다가 아, 이건 필요하겠지, 필요할 거야란 자기 세뇌를 하면서 정작 정리라고 부르기도 그런 상태가 지속된다. 그날의 실수가 내가 억지로 붙잡고 있던 것, 무쓸모지만 언젠가는 필요할 거라 믿었던 파일들과 생각을 함께 가져갔다. 미련을 두고 생각하면 그 파일들을 icloud에 저장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아니. 이미 그곳에 가득 찬 사진 용량을 바라보며 또 묵은 파일을 쌓아만 두고 정리하지 못했겠지, 나는 분명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좋게 생각한다. 정리는 결국, 마음속에 남겨 둔 미련의 지분에 따라 성공과 실패로 나뉘는 것 같다.




나도 모르게 버린 문서들은 정리‘되었다’. 그 쓸모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흔적 없이. 그러나 한 번쯤은 내 주변도 그렇게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른다. 쓸모는 당장이 아니면 모두 소용이 없는 것으로 여기고 정리를 시작해야겠다. 집은 돌보지 않고 밖으로 나가려던 나에게 남편은 정리가 잘 되어 있는 집이라면 집에만 있고 싶을 거라는 말을 했던 적이 있다. 맞는 말 같다. 정리란 결국 누구도 아닌 나의 편안한 마음 상태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어느 날 문득 마음먹고 집을 초토화로 만들어 청소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고, 원하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가까운 내 마음을 먼저 다독이고 정리해야겠다. 내 마음과 집이 누구라도 머물 수 있는 편안한 공간이 되도록 조금 더 애써야겠다. 마음 정리에 불을 지핀 그 뜻밖의 사고는 도움 요정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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