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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루시아 Jul 22. 2021

말의 기운

힘들다고 말한 날에는 더 힘들었다


3년 전, 지금 직장에 발을 내디뎠다. 산후 우울증과 다른 약의 부작용이 겹쳐 2년을 고생하고 난 후였고, 병원 가는 일이 잦아 오후 시간대에 잠깐, 사실은 사람을 만나는 것을 목적으로 일을 구했다. 집과 가깝고 무엇보다 이 지역에서 내 경험을 살릴 자리는 귀했는데, 나름 지역 색을 경험해 볼 수 있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경험을 쌓아 나중엔 공부방이라도 해 볼 요량으로.

 걸어서 10분 거리의 직장. 처음에는 너무 좋았다. 사람도, 일도, 수다 떠는 것도 마냥 좋았다. 나를 포함해 모두 7명의 선생님이 계셨는데, 각자 다른 과목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수업 대상은 같았다. 수업 전후에 커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대화는 처음에 너무 흥미롭고 재미있어서 수업 스트레스를 푸는 데도 그만이었다. 그런데 갈수록 일은 재미있는데 무언가 기운 빠지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힘들다고 말을 하고 난 후에 더 힘들어졌고, 그만두고 싶은 날이 많아졌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일을 그만두지도 않았다. 대신 퇴근하고 오면 함께 힘들었을 남편 옆에 앉아 넋두리를 했다. 이래서 싫고, 저래서 싫다. 그래서 안 하고 싶다. 돌이켜 보면 내 말을 가만 들어주던 남편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한 사람이 가진 말의 힘은 커서 내가 무심코 내던진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한 번쯤 상기하고 싶었다. 그 시간 함께 나눈 대화를 돌이켜 보면 좋은 말보다는 불평이, 거슬러도 될 이야기를 꾸역꾸역 나누는 시간이 많았다.

사람마다 말의 결이 다르다. 딱딱한 어투지만 말을 있는 그대로 들어주고 위안과 위로의 말을 해 주는 사람도 있고, 이해해주는 듯 말하면서도 거기에 자기 몫의 미움까지 얹어주는 사람도 있다. 함께 이야기를 하다 보면 누군가는 내 일도 아닌데, 감정을 보태어 내 일인 냥 분노하고,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켜켜이 쌓인 불만이 힘들어서 이 일 못 해 먹겠다! 하고 멈추는 경우도 있다. 물론 그런 마음에 불을 지핀 최초의 원인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있겠지만 하나씩 보탠 말이라는 땔감이 가진 힘은 엄청난 것이었다.

시간이 흘러 여러 이유로 선생님 두 분이 그만두셨다. 내 몫의 일은 더 많아졌고, 그만 두신 한 분 선생님이 하시던 어머니들과 상담 업무까지 내게 맡겨졌다. 그런데 희한하게 그 전만큼 힘들다는 말은 줄었다. 남편이 내 안부를 묻기도 전에, 요즘엔 괜찮아. 수업도 괜찮고 선생님들하고 지내기도 나쁘지 않아. 좋아.라고 먼저 말할 수 있게 됐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일은 늘어났는데 이제 할 만하다니. 나는 이게 말의 기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생각을 하며 산다. 그런데 그 생각은 말이나 글로 표현하지 않으면 나만 아는 ‘생각’ 일뿐 아무 효용이 없다. 말의 힘은 글보다 훨씬 즉각적이라 말이 오갈 때 오해가 생기기도 하고, 말로써 빠른 위안을 얻기도 한다. 지금도 어디서든 말은 끊이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되고 있으며 누군가와 마주하며 나눈 대화 속 그 말은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조심스러워지는 이유기도 하다. 들었을 때 기분 좋은 말은 진심이든 아니든 가볍지만 마음에 잔잔히 내려 살아갈 힘이 되었고, 짜증과 불평불만, 화가 섞인 말은 내내 마음의 짐이 되어 나를 눌렀다. 나도 말을 조금 더 가려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 중이다. 생각은 그렇지 않더라도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은 듣기 좋게 가려서 하려고 한다. 말의 전염력은 속도가 빨라 내 기운을 좋든 나쁘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때문에 더더욱.


내가 사는 곳은 작은 동네지만, 내가 하는 일의 일부가 어머니들의 응대도 겸하고 있어 약간의 스트레스가 있다. 다행히 나는 학부모님과 대면보다 메시지나 전화로 주로 연락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그래서 더욱 말은 가는 만큼 온다는 말을 실감한다.  누구의 말이나 겸허히 듣고 인정의 말을 건네면 상대도 화를 누그러뜨리고 좋은 말로 되돌려준다. 상대의 불만 장단에 맞추어 덩달아 곱씹다 보면 결국 그 화도 나의 몫이니 그저 좋게 여긴다.


다 아는데 내 편인 가족에게는 살가운 말을 건네지 못할 때가 많다. 가끔 지쳐서 집에 돌아온 날에는 힘듦과 지침의 중간 강도 화살이 아이에게 가서 꽂혀 너무 미안하다. 시작부터 그러지 말아야 하겠지만 진심으로 아이에게 사과하고, 진정으로 사랑한다 말해주면 아이의 언 마음도 금세 녹긴 한다. 그것도 말의 힘이다.


내가 가진 말의 기운이 나를 좀 더 긍정적이고 단단한 사람으로 이끌면 좋겠다. 누군가의 강연에서 얼핏 말의 그릇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렇게 나의 말 그릇도 커서 내 감정도 담고, 다른 사람을 헤아릴 아량도 담을 수 있으면 좋겠다. 말의 기운이 넘쳐서 처음 직장에 왔을 때처럼 유쾌한 날이 많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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