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김삼순
배드민턴 치는데 별안간 알림이 떴다.
조회수가 만명을 돌파했단다. 무슨 조회수?
까맣게 잊고 있었던 브런치였다. 간만에 들어가보니 일기장 들춰보듯 낯부끄럽다.
그래, 이참에 다시 써볼까? 근데 타자가 안 쳐지네.
심적 고통은 글쓰기가 아니라 근섬유에 전가 중인 현재의 나.
덕분에 신체 건강해졌으나 뇌까지 맑아져버렸다.
아냐 할 수 있어. 중요한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니까.
롱 롱 어고...그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고
난 무려 이십대 초인데다가 조건없는 솔로에 무한 알콜분해능력 보유자였다.
그러므로 나는
우선 찜해놓은 영화를 보고 삼겹살에 소주로 배를 단단히 채운 다음 2차로는 와인을 즐기며 성탄 야경을 한껏 감상하고 3차는 입가심용 맥주에 가벼운 안주. 하지만 이대로 헤어지긴 아쉽지. 해장국으로 막차 갔는데 어라 처음 보는 안주가 있네? 먹어줘야지. 근데 술이 없네. 뭐든 밸런스가 중요하니까 한병 더! 그렇게 풀코스를 즐기고 나왔더니 누가 영하 십몇도래 이상하게 씨~원하네? 겨울 코트는 역시 막 풀어헤쳐줘야 제맛이고 거리엔 캐롤이 막 흐르는데 화려한 조명이 막 날 감싸고 이야 메리 크리스마스로구나! 그때 무리 중 누군가가 눈에 들어오고 뭔가 눈빛이 서로 통하는거 같고 심장이 좀 쿵쾅거리는 거 같고...
그랬어야 했다.
간과한 사실은 내가 시사 프로 막내작가였다는 것이었다.
나 : (설마 저녁은 안먹겠지...)
선배님 : 저녁 먹을 사람?
나 : (설마 피디 기다리는 건 아니지?)
선배님 : 이제 끝날때 됐을걸? 전화나 해볼까.
나 : (설마 프리뷰도?)
선배님 : 오는대로 빨리 맡겨야 돼!
나 : (설마 회의하자는건 아니지?)
선배님 : 잠깐 얘기 좀 할까?
나 : (설마.... 안 가...?)
선배님 : 나 테입 좀 보려구. 근데 이거 알아봤니? 이건 왜 없지? 이것도 좀 알아봐.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언제 오냐 기다리고 있다 빨리 와라란 문자도 더 이상 오지 않았다....
그래... 모두들 메리 크리스마스.....
조용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차가운 타일벽 구석에 서서 내 머리 크기만한 화장실 창밖을 바라봤다.
오늘따라 빌딩숲 여의도 야경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어디서 폭죽이라도 터뜨린 걸까. 아님 불꽃놀이라도 하는 걸까.
뭔가 팡팡 터진 거 같고 눈이 시렸는지 눈물이 주륵 흘렀다.
난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난 무엇을 위해 이 시간까지 일하고 있나. 이 일이 맞긴 한 걸까.
주르륵 주르륵 눈물이 흐르는데 누가 듣기라도 할까봐 입틀막을 했는데도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러면서 이거구나 싶었다.
입봉하기 전 거치는 첫 단계. 화장실에서 통곡하기.
전설처럼 내려오던 방송국 귀신이 사실은 막내작가 화장실 울음소리였다는 그것을
내가 직접 체험하게 될 줄이야.
그 해 공전의 히트를 친 드라마는 내 이름은 김삼순이었다.
삼순이는 삼년 사귄 남친한테 차이고 화장실에 들어가 통곡한다.
화장이 떡지도록 우는데 밖에서 누가 계속 문을 두드린다.
(똑똑)
삼순이 : 있어요.... 흐윽흐윽
(똑똑똑)
삼순이 : 있어요오....
(똑똑똑똑)
삼순이 : 흐으으으윽... 사람 있어요오!! 있다구요!!!
나는 삼순이었다.
크리스마스라고 어설프게 바른 마스카라가 검은 눈물이 되어 흘렀다.
얼룩덜룩해진 화장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나는 제발 이 화장실에 아무도 오지 않길 빌었다.
그해 크리스마스 소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