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고 단순하지 않고서는 행동을 지속할 수 없다.
지난글에서 인간 행동에는 자동 반응과 의식적인 반응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번에는 또 다른 행동 체계 중 하나인 정지체계에 대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정지 체계를 이해한다면, Self Facilitation 시스템이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지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저는 귀신은 무서워하지 않지만, 벌레는 무서워합니다. 몇 살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어린이 시절에 TV에서 '미이라'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벌레가 사람을 잡아먹고, 몸에서 기어 다니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어렸을 때 본 그 장면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벌레를 보면 몸에 있는 여러 구멍으로 이녀석들이 내 몸으로 들어오지 않을까? 살을 파헤치고 제 몸에 들어오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모기나 파리와 같이 친숙(?)하지 않은 벌레를 발견하면 일단 정지하거나 한 걸음 물러섭니다.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니까요.
몸이 얼음처럼 굳거나, 회피 반응이 일어나는 것은 벌레만이 아닙니다. 밤길을 가다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것을 마주하거나, '쾅!' 하고 큰 소리를 듣거나, 등산을 하다가 절벽을 마주하면 일단 멈추게 됩니다. 위협을 느끼면 멈추고 새로운 행동 방침을 따를지 판단하는 행위는 생존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10년 전쯤, 아프리카 튀니지에 출장을 갔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튀니지란 나라에서 동양인을 보게 되는 건 매우 생소한 일입니다.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신기하게 쳐다보고, 말을 걸고, 심지어 같이 사진 찍어보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위험에 대한 경계가 느슨해졌습니다. 어느 날 호텔 주위를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바디빌더와 같이 벌크업한 근육질 몸을 가진 남자가 말을 걸어왔고 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이야기하며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두침침한 분위기의 길목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사실을 직감하는 순간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돌변해서 제 가방을 가져가려 했습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제 가방을 낚아채고 그 사람을 밀치고 뒤도돌아보지않고 호텔까지 달려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태어나서 가장 빠르게 달리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정지하는 반응은 시상하핵(시상 바로 아래 위치한 신경세포 집단)에서 이루어집니다. 시상하핵을 통한 정지는 빠를 뿐 아니라 전면적입니다.[^1] 전면적이라는 뜻은 인간이 가진 자동반응이나, 의식적인 행위와 별개로 행동을 선택하는 최우선순위로 적용된다는 말입니다.
저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자고 싶다'는 생각만 떠오릅니다. 잠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편입니다. 자고 일어나도 상황이 변하는 건 없습니다만, 자고 일어나면 제 상황을 다른 자세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잠을 자는 동안에 뇌는 감각신호로 들어오는 정보를 해석하지 않아도 되고, 신체 행동을 관장하지 않아도 되는 여유로운 상태가 됩니다. 이때 뇌는 무엇을 할까요? 잠은 기억이 사라지지 않도록 저장 버튼을 누르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2] 깨어있는 동안 경험하거나 학습하면서 활성화되었던 신경패턴이 자는 동안 다시 활성화됩니다. 다시 해석하고, 정보를 분류하고, 신경세포 간의 연결을 더욱 용이하게 만들죠. 이 과정에서 이미 저장된 기억과 관련된 것과 연결합니다.[^4] 이 과정에서 이해가 되지 않았던 문제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되기도 합니다.
극심한 스트레스란 꼭 인생에서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나 고통만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수업이나 강의를 들을 때, 도무지 대화가 되지 않는다고 느끼는 상대와 대화를 할 때,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하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할 때, 정지 체계가 발동합니다.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정지 체계가 육체적인 행동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정신 작용에도 정지 체계가 동작합니다. 정신작용의 정지 체계가 멈추게 하는 것은 생각입니다.[^3] 어려움을 마주하면 생각을 멈추게 된다는 말입니다. 어렵다는 의미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저는 10년 가까이 3곳의 제조회사에서 일한 경험이 있습니다. 생산 조립 라인에 들어가면 작업 종류마다 '작업지도표'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작업라인에 부품이 들어오면 '불량점검 항목', '조립 방법', '판정 방법'이 명료하게 작성되어 있습니다. 제조과정이 간단한 작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명확한 지침이 있다면 작업자가 바뀌어도 인수인계할 내용이 없습니다. 작업자가 달라진다고 해서 제품 품질에 영향이 없습니다. 또한, 제품이 달라져도 간단한 작업으로 구성된 생산라인과 명확한 지침이 있으면 생산에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것은 도피하거나 멈추거나 방황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촉진시켜줄 시스템(Self Facilitation)을 만드는 것입니다. 정지 체계를 고려했을 때, 우리가 행동을 지속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간단하면서도 당연한 사실이긴 하지만, 쉬워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해야 합니다. 쉽고, 단순하고, 부담이 없는 작업 단위로 만들어진 프로세스가 우리를 정지하게 하지 않고, 행동을 지속하게 합니다. 이 원칙을 지킨다면 내가 다루는 장르, 컨텐츠, 결과물의 형태가 무엇이든지 시스템과 별개로 유기적인 작업 흐름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것이 Self Facilitation이 갖추어야 할 조건입니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데 방해되는 *디버프(De-buff) 요소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에는 행동을 지속하는 데 도움이 되는 *버프(Buff) 요소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그 이후에 Self Facilitation의 작업 흐름에 대해 소개하겠습니다.
※ 버프(Buff): 게임에서 캐릭터의 능력치를 상승시켜주는 효과를 말합니다. 여기서는 Self Facilitation의 맥락에서 행동을 지속하고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요소들을 의미합니다.
※ 디버프(De-buff): 게임에서 캐릭터의 능력치를 하락시키는 효과를 말합니다. 이 글에서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들, 즉 정지 체계를 작동시키거나 행동을 억제하는 요인들을 가리킵니다.
[1] 책, 생각은 어떻게 행동이 되는가 263p
[2] 책, 기억의 뇌과학 226p
[3] 책, 기억의 뇌과학 213p
[4] 유튜브 박문호 TV - 뇌는 예측하는 기계(예측능력이 관찰을 방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