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그런지, 절에 가면 그리 신기하고 재밌는 볼거리가 많습니다. 경건한 종교시설에 볼거리란 경박한 단어가 웬 말인가 싶겠지만, 아직 제 눈엔 그렇게 보입니다. 어쩌겠습니까, 그릇이 고만한 걸. 그렇게, 제 기분에 휩쓸려 이리 기웃 저리 두리번대며 절을 쏘다니다, 경건하게 합장을 하시는 분들을 지날 때면 가끔 뜨끔해져서 나대는 발걸음을 살짝 진정시키기도 합니다. 그리, 오래가진 못합니다.
우이동 도선사에는 참 특이한 볼거리가 있습니다. 나무로 만든 탑 같은 모양새에, 알록달록 다양한 색과 모양의 문양으로 치장하고, 바닥과 닿은 곳은 팽이처럼 뾰족하며, 허리춤에는 ‘가마’ 앞에 달렸음직한 큼직한 나무손잡이까지 달린, 겉으로 보면 무슨 용도로 만들었는지 참으로 알쏭달쏭합니다. 안내판을 보니 ‘윤장대’라고 쓰여 있네요.
내용을 읽어보니 더 신기방기합니다. 이 구조물은 탑이 아닌 일종의 방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모셔 놓는 방이냐 하면, 불교경전이랍니다. 책들의 방이니 일종의 책장이겠지요. 가까이 들여다보니 고서들이 쌓여있는 게 보입니다. 정리를 해보면, 탑같이 생긴 책장 안에 경전을 모셔놓고, 가마 같이 달린 나무손잡이를 잡고 빙글빙글 도는 겁니다. 글로 써 보니 더 낯설어 보입니다. 사진을 올리지 않았다면, 읽는 분들이 어떤 상상을 할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윤장대의 쓸모는 이렇습니다. 글을 모르거나 일에 쫓겨 불경공부가 하기 힘들 중생들이 이 윤장대를 돌리기만 하면 경전을 읽지 않아도 공덕을 쌓을 수 있다고 합니다. 아니, 이런 기적 같은 일이 가능하다면 당장이라도 이 안의 불경들을 끄집어내고, 처세술이나 재테크 서적 혹은 영어책을 쌓아 놓고 돌리고 싶어 졌습니다. 아니지, 아들녀석을 데려와 참고서를 채워 넣고 돌리게 하는 게 먼저일 겁니다. 한동안 이런 불경스러운 잡생각을 하며 윤장대를 돌려대었습니다.
근데, 요거 생각할수록 더 희한합니다. 부처님 사리라든지, 금은보화를 모셔놓는 것도 아니고, 책이라니요. 책은 읽는 것이지 모셔놓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읽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라고 쓰여 있지만, 그 또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그런 분들에게는 소리로 알려주면 되는 거 아닐까요. 글이 없는 시절에도 경전은 존재했고, 인도의 ‘베다’ 같은 경전은 낭송으로 전해졌다고 해도 토씨하나 틀리지 않았다고 하는데, 저렇게 돌리고 있으라니요. 지식을 쌓는 행위와는 너무도 다른 방식이어서 더욱 생경해 보였습니다.
어쩌면, 누군가에게 윤장대는 목마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타고난 신분으로 배움과는 거리가 멀기에, 주워들은 몇 가지 부처의 말씀으로는 영혼의 허기는 쉬이 채워지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아마, 그런 분들은 윤장대를 부여잡고, 기도하듯 돌렸을 겁니다. 자신이 외우고 있는 몇 가지 문구를 되뇌고 되뇌며 돌았을 겁니다. 소원을 바라는 기복행위와는 다른 마음이었을 겁니다. ‘복’을 받기보다는 ‘덕’을 쌓고 싶은 마음이 일었을 겁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이 윤장대는 저에게도 꽤 쓸모가 있어 보입니다.
안다는 건 어디까지일까.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것은 과연 아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마음은 고요하고 너른 바다요, 생각은 바다에 이는 파도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에 끄덕였음에도 늘 파도에 휩싸여 허우적거리며 사는 건 아닐까. ‘무소유’라는 책을 읽었음에도 마음은 늘 바겐세일 하듯 쉽게 팔아먹으며 사는 건 아닐까. '여한 없이 살려면 단순하고 명징한 진리를 따라야 한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머릿속 꽉 채운 잡념들을 한 번이라도 정리할 생각이나 했나. 아니지, 그 말 또한 생각 없이 마음 한 구석에 방치해 놓은 건 아닐까. 마음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게 너무 많구나 싶었습니다. 그럴 땐 몸을 써야지요. 그래서 윤장대를 만든 건 아닐까 싶었습니다. 백팔배도, 탑돌이도 그렇습니다. 마음만으로는 안 될 땐, 몸을 써야 합니다. 알게 될 때까지. 종종 찾아와 돌려야겠습니다. ‘알고 있다는 생각’을 내가 배신할 때, 더 이상 아파하지 말고 와서 돌려야겠습니다. 안 돌리는 것보단 낫겠지요. 최소한 산자락 맑은 바람이 잠깐이나마 기분은 좋게 만들어줄 겁니다.
하산길에 들린 기념품가게에서 각각 눈, 귀, 입을 막고 있는 동자승 삼형제를 구입했습니다. 불교에서는 '삼불원'이라고 합니다만 저에게는 ‘봤으면서, 들었으면서, 뱉었으면서’ 행하지 못하는 자신이 보입니다. 그럴 때마다 돌아볼 수 있는 '반성의 오브제'로 삼아야겠습니다.
기념품을 계산해 주신 보살님께서 친절하게도 가래떡 두 봉지를 챙겨 주셨습니다. 집에 와서 석쇠에 노릇하게 구워 아들녀석과 나누었습니다. 당신의 '행'함에 벌써 아들까지 '행복'해졌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