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AI 활용은 공포에서 시작된다
지난달, 오래 알고 지내던 한 스타트업 대표와 저녁을 먹었다. 마케팅 에이전시를 7년째 운영하는 사람이다. 밥을 먹다 말고 그가 대뜸 자랑을 했다. "나 요즘 ChatGPT 플러스 쓰거든. 클로드도 유료야. 카피라이팅, 기획안 초안, 이메일 번역까지 — 우리 회사 거의 AI 기반이라고 봐도 돼." 자신감이 넘쳤다. 표정에 여유가 있었다.
나는 하나만 물었다.
"그래서 너, 두려워?"
그가 웃었다. "뭘? AI가? 아니, 오히려 편해졌지."
그 웃음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무섭게 만들었다.
테헤란로 20년 가까이 스타트업을 다니고 실제로 창업을 하면서 수백명의 창업자를 만났다. 잠시였지만 대학소재 기술연구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세대가 바뀌는 것도 지켜봤다. 그 세월 동안 내가 배운 건 의외로 단순한 것이었다 — 어떤 변화 앞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과 공포를 느끼는 사람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벌어진다는 사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살아남는 쪽은 후자다.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공포를 느끼는 사람이 왜 살아남는가? 편안한 사람이 더 안정적이고, 더 적응을 잘한 거 아닌가?
아니다. 전혀.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한때 그랬다. 2022년 말, ChatGPT가 처음 등장했을 때 나는 흥미로운 도구가 하나 나왔구나, 정도로 받아들였다. 몇 번 써보고, 제안서 초안을 뽑아보고, 꽤 괜찮네, 하고 넘겼다. 나 역시 수영장 얕은 쪽에 서서 "나는 물에 들어와 있다"고 자부하던 사람이었다.
전환점은 엉뚱한 데서 왔다. 프로젝트 컨소시엄 회사 중 하나가 AI로 시장 분석 리포트를 만들어 보내왔는데, 그 리포트가 우리 회사 시니어 애널리스트가 2주 걸려 만든 것과 질적으로 거의 동등했다. '거의'가 아니라, 어떤 부분에서는 더 나았다. 데이터 간의 숨겨진 상관관계 — 사람의 눈이 놓치기 쉬운 패턴을 AI는 놓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잠을 못 잤다. 과장이 아니다. 물리적으로 잠이 오지 않았다. 천장을 보면서 생각했다 — 이건 도구가 아니다. 이건 내가 20년간 쌓아온 전문성의 상당 부분을 복제할 수 있는 무언가다. 그 느낌은 편리함이 아니었다. 공포였다. 새벽 3시의 천장은 유난히 가깝게 느껴졌다.
그런데 말이다.
그 공포가 나를 살렸다.
내가 만나는 두 부류의 사람을 이야기해보자. 이건 이론이 아니다. 매주, 매달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이다.
첫 번째 부류. 이 사람들은 AI를 '쓰고' 있다. ChatGPT 유료 구독을 하고, 미드저니로 이미지도 만들어보고, 클로드에게 보고서 요약을 시키기도 한다. 주변에서 "AI 공부 좀 더 해봐"라고 하면 손을 내젓는다. "나 이미 쓰고 있어. 유료로." 이 사람들에게 AI는 스마트폰에 새로 깔린 생산성 앱이다. 카카오택시처럼 편리하고, 네이버 지도처럼 유용하다. 그 이상? 굳이. 지금 충분하다.
이 사람들을 비난하고 싶은 게 아니다. 사실 이 반응은 인간으로서 지극히 자연스럽다. 우리 뇌에는 일종의 안전장치가 있다 — 어떤 새로운 것에 일정 수준의 노력을 들이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적응했다고 믿으려는 본능. 건강검진 받았으니까 건강한 거고, 영어학원 등록했으니까 영어 공부하는 거고, AI 유료 구독했으니까 AI 활용하는 거다. 행위 자체가 결과를 대체해버리는 착각. 누구나 빠질 수 있다. 나도 빠져 있었다.
두 번째 부류. 이 사람들도 AI를 쓴다. 그런데 이들은 쓰면서 어느 순간 바닥이 꺼지는 감각을 경험한다. 왜? 이들은 AI에게 자기 직업의 핵심 업무를 시켜봤기 때문이다. 단순히 번역을 맡기거나 요약을 시킨 게 아니라, 자신이 전문가로서 10년, 15년간 갈고닦은 바로 그 역량을 AI에게 수행하게 하고, 그 결과물의 수준을 직접 확인했다. 그리고 멈칫했다.
이 차이가 전부다. 말이 쉽지, 이건 천지 차이다.
그리고 이건 단순히 "얼마나 깊이 써봤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더 근본적인 것이다. 첫 번째 부류에게 AI는 도구다. 망치나 계산기와 같은 범주에 있다. 잘 쓰면 편리한 것. 두 번째 부류에게 AI는 거울이다. 자신의 직업적 정체성을 비추는 거울. 이 거울 앞에 서면, 자기가 진짜로 잘하는 것과 그저 반복해온 것의 경계가 잔인하리만치 선명하게 드러난다. 도구로 보는 사람과 거울로 보는 사람. 같은 AI를 쓰면서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거다.
비유를 하나 들겠다. 수영장 멤버십을 끊은 사람이 있다. 매달 회비를 낸다. 일주일에 한두 번 가서 물에 들어간다. 발이 닿는 얕은 쪽에서 걷기도 하고, 가끔 평영으로 한두 바퀴 돈다. 이 사람은 "나 수영해"라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있다. 이 사람도 같은 수영장 멤버십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느 날 깊은 쪽에 뛰어들어 봤다. 발이 안 닿았다. 숨이 막혔다. 물을 먹었다. 패닉이 왔다. 그런데 그 순간, 이 사람은 자신이 실제로 수영을 못한다는 것을 — 몸으로, 폐로, 터질 것 같은 심장으로 — 알았다. 그 뒤로 이 사람의 수영은 완전히 달라졌다. 자세를 고치고, 호흡법을 배우고, 깊은 물에서도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훈련을 시작했다.
첫 번째 사람의 멤버십과 두 번째 사람의 멤버십. 같은 가격이다. 같은 수영장이다. 같은 물이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다.
AI 유료 구독이 바로 이 멤버십이다. 결제 자체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는다. 당신이 그 안에서 발이 닿는 곳에만 서 있는지, 아니면 깊은 곳에 뛰어들어 봤는지 — 그게 전부다.
여기서 한 가지 불편한 진실을 짚고 넘어가자. 첫 번째 부류의 사람 — "나는 충분히 쓰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 — 이 사람이 나쁜 사람인 건 아니다. 게으른 것도 아니다. 실제로 이 사람은 나름 노력하고 있다. 유료 결제도 했고, 시간을 들여 이것저것 써보기도 했다.
문제는 노력의 방향이다.
이 사람의 AI 사용 패턴을 들여다보면 공통점이 있다. AI를 보조 도구로만 쓴다. 내가 하던 일을 조금 더 빠르게, 조금 더 편하게 해주는 존재. 번역, 요약, 초안 작성, 아이디어 브레인스토밍. 전부 자기 업무의 주변부다. 정작 자기 직업의 핵심 — 자기가 전문가라고 불리는 이유, 자기 연봉의 근거가 되는 바로 그 역량 — 에 AI를 들이대 본 적이 없다.
왜?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거기에 AI를 들이대면 불편한 것을 보게 될 수 있다는 걸. 그래서 피한다. 유료 구독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발이 닿는 얕은 곳에서, "나는 충분히 하고 있다"는 내러티브를 스스로에게 반복한다. 이건 비겁함이 아니다. 자기 보호 본능이다. 다만, 그 본능이 이 시대에는 당신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가두고 있다는 게 문제일 뿐이다.
반면, 깊은 물에 뛰어든 사람 — 이 사람은 착각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자기 눈으로 봤으니까. 자기 직업의 핵심 역량을 AI가 수행하는 것을 목격했으니까. 그 결과물이 자기 것과 비슷하거나, 어쩌면 더 낫다는 것을 확인했으니까. 이 경험은 당신이 세상을 보는 렌즈 자체를 바꿔버린다. 되돌릴 수 없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진짜 질문이 시작된다.
"그러면 나는 뭘 해야 하지?"
잠깐 멈추자. 여기까지 읽으면서 당신 안에 뭔가 불편한 게 올라오고 있다면, 그걸 무시하지 마라. 그 불편함은 적이 아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당신이 가진 것 중 가장 값진 것일 수 있다.
이 질문을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 여기서 갈린다. 결국 그런 거다.
공포를 경험한 사람은 방향을 찾는다. 왜냐하면 지형을 봤기 때문이다. 어디가 절벽이고 어디에 길이 있는지 자기 눈으로 확인했다. AI가 자기 일의 80%를 해낼 수 있다면, 나머지 20%가 뭔지 정확히 식별할 수 있다. 그 20%를 극대화하는 것 — 그것이 AI 시대의 진짜 자기개발이다.
나와 함께 규모가 있는 해외 프로젝트를 진행한 스타트업 창업자의 이야기를 해보겠다. 10년차 영상 프로듀서 출신이었다. 처음에 그녀는 AI 영상 생성 도구를 "재미있는 장난감" 정도로 여겼다. 그러다 어느 날, 자기 포트폴리오에 있는 영상의 스타일과 톤을 AI에게 학습시키고, 비슷한 영상을 만들어보라고 시켰다. 결과물을 보고 그녀는 화장실에서 울었다고 했다. "10년이 우습더라고요." 그녀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 울고 난 뒤에 그녀는 앉아서 자기 영상 작업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기획, 촬영, 편집, 색보정, 사운드 디자인 — 이 중에서 AI가 대체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냉정하게 구분했다. 결론은 이랬다. 기술적 실행의 대부분은 AI가 할 수 있다. 하지만 "왜 이 장면이 여기 와야 하는가", "이 3초의 침묵이 관객에게 무엇을 느끼게 하는가" — 이 판단은 AI가 못 한다. 그녀는 자신의 직업을 실행자에서 디렉터로 재정의했다. 지금 그녀는 AI에게 편집의 80%를 맡기고, 자신은 서사 구조와 감정 설계에만 집중한다. 예전에 한 달 걸리던 프로젝트를 일주일 안에 끝내면서, 오히려 작품의 깊이는 더 깊어졌다.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 — "AI가 내 손을 빼앗은 게 아니라, 내 눈을 돌려줬어요."
이것이 공포 이후의 풍경이다. 두렵지 않았다면, 이 재정의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잠깐, 여기서 당신에게 묻겠다.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 — 당신 직업의 가장 핵심적인 역량 — 을 AI에게 시켜본 적이 있는가? 번역이나 요약 말고, 기획안 초안 말고, 당신이 전문가로서 돈을 받는 바로 그 일을 AI에게 맡겨본 적이 있는가?
없다면, 당신은 아직 수영장 얕은 쪽에 서 있는 것이다. 유료 멤버십 카드를 주머니에 넣은 채로.
나는 처방전을 써주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20년간 기술 혁명의 최전선에서 살아남은 사람과 사라진 사람을 모두 봐온 입장에서, 하나의 실험을 제안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48시간 자기 해부"**라고 부른다.
오늘 퇴근 후, 빈 종이를 꺼내라. 당신이 직장에서 — 혹은 사업에서 — 전문가로서 가치를 인정받는 이유를 적어라. 기획력인지, 분석력인지, 디자인 감각인지, 협상 능력인지, 글쓰기인지. 다섯 가지만 적어라. 그게 당신 직업의 코어다.
그 다음 48시간 동안, 그 다섯 가지를 하나씩 AI에게 시켜봐라. 대충이 아니라, 당신이 실제로 하는 수준의 인풋을 주고, 실제로 써먹을 수 있는 수준의 아웃풋을 요구해라. 시간 제한도 없다. 프롬프트를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다듬어라. AI에게 최대한의 기회를 줘라. 공정하게.
그리고 결과물을 봐라. 냉정하게.
당신이 느끼는 것이 "역시 AI는 아직 한참 멀었네"라는 안도감이라면 — 한 가지만 점검해라. 내가 아는 한 변호사는 처음에 AI에게 계약서 검토를 시켰을 때 같은 안도감을 느꼈다. 허점투성이였으니까. 그런데 프롬프트를 바꾸고, 맥락을 더 주고, 세 번째 시도에서 나온 결과물을 보고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안도감은 대부분 실험 설계의 허술함에서 온다. AI가 못한 게 아니라, 당신이 제대로 시키지 않은 것일 수 있다.
당신이 느끼는 것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서늘함이라면 — 축하한다. 진심으로. 당신은 이제 시작점에 섰다. 그 서늘함이 보여주는 것은 정확히 이것이다: AI가 당신의 일을 80% 해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신이 앞으로 집중해야 할 20%가 어디인지를 알려주는 가장 정확한 나침반이다. 그 20%를 찾아내고, 파고들고, AI와 결합하여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수준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 — 이것이 AI 시대의 유일한 생존 전략이다.
1997년, 체스 세계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가 IBM의 딥 블루에게 졌을 때, 사람들은 체스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스파로프는 패배 후 전혀 예상 밖의 일을 했다. 그는 **"어드밴스드 체스"**라는 새로운 형식을 제안했다. 인간과 AI가 팀을 이루어 경기하는 방식이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 AI+인간 팀이 순수 AI보다, 그리고 순수 인간보다 압도적으로 강했다. 카스파로프는 AI에게 패배한 뒤 끝난 사람이 아니었다. 공포를 직면한 뒤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만든 사람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놓치면 안 되는 게 있다. 카스파로프가 이것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딥 블루와 직접 대국을 했기 때문이다. 깊은 물에 직접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나는 세계 챔피언이니까 충분하다"며 대국을 회피했다면, 어드밴스드 체스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뭐, 이렇게 말해도 누군가는 여전히 이럴 것이다. "그래도 나는 지금 충분해."
그 말에 나는 더 이상 반박하지 않는다.
다만 한 장면만 남겨두겠다.
지난주 한 대학 캠퍼스에서 산책을 하다가 대학원생 하나를 만났다. 철학과가 아니라 컴퓨터사이언스 전공이었다. 그 학생이 묻더라. "대표님, 저는 코딩을 10년 했는데, AI가 저보다 코드를 잘 짜요. 저는 이제 뭘 해야 하죠?" 그 학생의 눈에는 공포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공포가 반가웠다. 왜냐하면 그건 이 학생이 이미 깊은 물에 들어갔다는 증거였으니까.
나는 이렇게 답했다. "자네가 방금 한 그 질문 — AI는 그 질문을 스스로 할 수 없지 않을까?."
소크라테스가 지금 살아 있다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알고 있다고 믿는 자가 아니라, 모른다는 것을 아는 자가 — 그 오래된 진실이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당신은 AI를 잘 쓰고 있는가? 아니면, 잘 쓰고 있다고 믿고 있는가?
그 질문이 불편하다면 — 좋다.
이미 깊은 쪽으로 한 발짝 내디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