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이안 Oct 05. 2020

해와 달이 동시에 뜨는 밤, 그리고 롤러코스터

#02. 내가 사랑하는 노래: Heavy Sun Heavy Moon


#02. 내가 사랑하는 노래
Peppertones- Heavy Sun Heavy Moon + Colorful



https://youtu.be/2ytweCCnqmw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어두운 청록색 밤하늘, 북유럽에서 볼 수 있을 듯한 침엽수가 우거진 검은 숲. 비정상적으로 크게 뜬 달이 푸르게 빛나고, 고개를 돌리면 햇살이 비쳐 나오는 초현실적인 광경.

노래의 포문을 여는 악기는 피아노와 기타가 전부. 서정적인 것처럼 보이는 피아노 멜로디를 듣다 보면 어느새 드럼이 제 존재감을 더하고, 베이스가 묵직하게 뒤에서 음악을 받쳐주고 있다. 아코디언 소리가 슬그머니 등장한 이후로는 피아노와 아코디언이 대화를 나누듯 번갈아가며 음악의 대표 멜로디가 된다. 홀린 듯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되는 아코디언의 주선율은 어쩐지 불안하고 위태로운 느낌이다. 아코디언 파트가 끝나면 신시사이저가 들어서고, 이내 휘몰아치는 드럼 비트와 독주하는 건반을 마주하게 된다.

비트가 점점 빨라지고 마디마디의 호흡이 빨라지며 누가 봐도 노래의 절정으로 다다르는 순간 다음 노래 'Colorful'이 시작된다. 'Colorful'을 들을 때면 늘 놀이동산이 생각난다. 노래의 시작부터 청자를 반기는 고주파수의 비명소리는 롤러코스터를 타고 내려가는 어린아이들처럼 들린다. 도입부가 가져가는 쾌활하고 활기찬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앞선 곡의 어둡고 침침한 분위기를 테마파크의 일부 섹션이었던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하여 트랙이 넘어갈 때, 청자는 해와 달이 동시에 떠 있던 비현실적인 공간의 문을 열고 햇살이 내리쬐는 시끌벅적한 현실 속 '환상의 나라'로 되돌아온다. 노래 사이를 채우는 다양한 효과음 하나하나가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헬륨 풍선 같다고 말한다면 그건 비약일까?

​노래 후반부에서는 사운드가 촘촘히 쌓이며 롤러코스터를 더 높이 밀어 올린다.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는 비명소리와, 신나는 감정을 한껏 표현하는 추임새와, 여전히 열 일하고 있는 건반과, 카트라이더의 노르테유 트랙에서 들릴 법한 사이버펑크 느낌의 효과음과, 긴장감을 한 번에 끌어올리는 현악기의 소리가 한데 뭉친다. 악기가 서로를 끌어올리며 노래가 클라이맥스에 오르는 바로 그 순간, 모든 시동이 꺼지며 꿈꾸던 소년은 잠에서 깨어난다.




초현실과 환상이 한데 섞인 꿈같은 이 노래는 페퍼톤스의 1집 7번 트랙 Heavy Sun Heavy Moon과 8번 트랙 Colorful이다. 내 십 대를 책임졌던 밴드 페퍼톤스를 처음 알게 해 준 노래인 동시에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꼽으라고 하면 주저 없이 선택하는 노래다.

​당시 피아노 좀 친다 하는 어린아이들에게 익숙한 노래는 이루마 혹은 히사이시 조 계열의 서정적인 음악이었다. 밝고, 사랑스럽고, 햇살이 창틈으로 비쳐 들어올 것 같은 하얀색의 노래들. 이 노래는 그와 정반대에 서있었다. 분명 슬픈 곡은 아닌데, 마냥 밝고 기쁜 음악도 아니었다. 박자가 처지는 것도 아닌데 노래 한편이 서늘했다. 어쩔 땐 불안하고 어쩔 땐 평화로운 제멋대로인 음악. 그때의 나는 음악에 쓰인 악기의 개수만큼이나 촘촘히 쌓인 다층적인 감정을 읽었다. 그 입체성이 좋아서, 나는 MP3를 들을 때 랜덤 재생 버튼을 눌러놓고 다음 곡에 이 노래가 나오길 간절히 빌곤 했다. (듣고 싶다고 목록에서 직접 찾아 듣는 건 재미없는 일이다.)

'Heavy Sun Heavy Moon'과 'Colorful'은 CD플레이어로 들어야 그 맛이 가장 잘 산다. mp3로 들으면 트랙이 넘어가는 동안 잠깐의 정적이 생기는데, CDP에서는 처음부터 한 곡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두 곡이 이어진다.

처음 씨디 플레이어로 앨범을 들었을 때, 찰나의 정적도 없이 7번 트랙에서 8번 트랙으로 바로 이어지는 순간의 전율을 기억한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특별한 기법도 아니다. 원래 한 곡인 긴 음악을 적당한 지점에서 잘라 두 트랙으로 나누고, 그걸 아날로그 방식의 씨디플레이어에서 재생하느냐 디지털 방식의 mp3 파일로 재생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하지만 당시 세상을 막 배워가던 중학생에게는 이런 특이함 하나하나가 큰 의미로 다가오곤 했다. 노래가 너무 좋아서 아껴 듣고 싶다는 마음을 그때 처음으로 이해했다.




그 후 페퍼톤스의 ​새로운 앨범이 나올 때마다 이번엔 '햅썬햅문'같은 노래 없나 기웃거리곤 했다. 그 뒤로 가사 없는 음악은 2집의 'Now We Go', 'We Are Mad About Flumerides'를 거쳐 이어지는가 싶더니 4집에서 객원보컬 없는 밴드 체제로 팀을 재편하며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물론 어르신들 하고 싶으신 음악 하는 게 제일이지만요, 그래도 햅썬햅문을 사랑했던 어린아이가 있었다는 건 기억해달라구요(울먹)

심지어 콘서트에서 이 노래를 연주하면 원곡과 또 다르다. 재즈 풍, 보사노바 풍으로 편곡되는 경우가 많아 원곡보다 좀 더 젠틀하게 격식을 차리는 느낌이다. 곡 자체가 좋기 때문에 어떻게 편곡하더라도 감동이 달라지지는 않지만, 2012년에 갔던 페퍼톤스 콘서트에서 이 노래를 연달아 듣던 나는 얼마간의 허탈함과 아쉬움을 느꼈던 것 같다. '아, 내가 사랑한 원곡은 영영 라이브로 들을 수 없겠구나.'

​그래서 더욱 애착이 가는지도 모르겠다. 나한테 'Heavy Sun Heavy Moon'은 다시는 나올 수 없는 곡이고, '이 노래 같은' 곡을 찾지 못해 다시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곡이다. 그런 비슷한 노래 듣고 싶으면 그 노래를 들으면 된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 매정한 말이지만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나는 아쉬움과 애정을 품에 가득 안은 채 해와 달이 뜨는 숲으로 들어간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느 와식 생활자의 침대 예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