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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 Jun 23. 2023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하고

여러 여성 성장 서사에 대한 이야기

우리 부모님 세대에게 가수 이미자는 영원한 엘레지의 여왕이다. 그의 히트곡인 '여자의 일생'의 가사 첫 두 구절은 다음과 같다. '참을 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 /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 마디 못하고.' MZ세대가 들으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가사인가 싶을 것이다. 여자에게 입이 없나 귀가 없나 발언권이 없나, 왜 말을 못 하나. 무슨 이런 구닥다리 노래가 다 있나. 그러나 사실 젠더갈등이라는 게 우리나라 사회 전반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것도 무척 고무적인 일이라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한다. 여성이 2등시민이라는 생각은, 어쩔 수 없이 마이너리티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은, 여전히 지울 수가 없다. 나는 생물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여성이고, 그래서 어쩔 수 없는 마이너리티다. 이 글을 읽는 일부 남성 독자 분들이 어떻게 생각하실진 모르겠지만.


내 글들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래서인지 소설이나 시, 영화 등의 매체를 접할 때 편향이 다소 있는 편이다. 여성 창작자가 만든 것들, 여성이 주인공인 것들에 아무래도 마음이 더 가는 걸 어쩔 수 없다. 물론 여성 창작자가 만들었다고 아무 작품이나 좋아하는 건 아니다. 내게도 호불호라는 건 있으니까. 다만 아무래도 같은 여성으로서 느끼는 바가 비슷하다보니, 여성 창작자가 만들었거나 여성이 주인공인 콘텐츠에 공감이 더 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살면서 본 영화들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의 주인공도 여성이고, 최근에 가장 인상깊게 본 드라마의 주인공도 여성이다. 이들의 공통점을 굳이 꼽아보니, 요즘 평단이나 대중들이 흔히 '여성 성장 서사'라고 이름 붙인 것들의 주인공들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조나단 드미의 미스터리 스릴러 <양들의 침묵>이다. 이 작품을 처음 본 것은 사춘기 시절, 19금 영화라 당시에 어떤 경로로 보게 된 건진 모르겠는데 여러 의미에서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빌런인 버팔로 빌이나 특이한 사이코패스인 한니발 렉터의 잔인무도함도 충격적이었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건 주인공인 클라리스 스털링의 캐릭터였다. 그처럼 매력적인 캐릭터를, 이전까지는 본 적이 없었다. 이후에 원작 소설도 인상적으로 읽긴 했지만, 그보다는 영화에서의 클라리스 스털링이 (그 역할을 맡은 조디 포스터의 이미지를 포함하여) 너무나도 좋았다. 철저하게 남성적 권력 위주인 FBI에서, 그럼에도 자신의 정체성을 끝까지 지켜내며, 서툴더라도 한발 한발 나아가는 모습이 멋있었다.


물론 다른 장점도 꼽아보자면 셀 수가 없다. 이 영화는 음악, 인상적인 장면들이 품고 있는 이미지들, 스토리라인, 주연들의 연기와 생생하고 빛나는 캐릭터들, 뭐 하나 빠지지 않는, 그러니까 덜어내고 더할 것이 없는 영화다. 그러나 내게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면은 클라리스 스털링이 보여주는 꾸준함과 끈기였다. 과연 나라면 저럴 수 있었을까, 거듭 생각해보았지만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두꺼운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사람을 죽여 그 간을 요리해 먹어본 적이 있다고 담담하게 말하는 렉터 박사를 마주했을 때, 그의 눈을 마주 바라볼 용기가 내게 있을까. 무릎이 후들거리지 않을 수 있을까. 버팔로 빌과 단 둘이 어둠 속 공간에 있을 때, 보이지 않는 그를 향해 총구를 겨눌 수 있을까.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런가 하면 최근 들어 가장 인상깊게 본 드라마는 tvN에서 방영되었던 정서경 극본, 김희원 감독의 <작은 아씨들>이었다. 우리가 아는 영미 장편소설인 <작은 아씨들>의 제목을 가져오긴 했지만, 캐릭터들 중 어떤 특성도 어느 정도는 가져오기는 했지만, 이 드라마의 분위기는 소설과는 전혀 다르다. 일단 세 자매가(소설에서는 네 자매가 등장한다) 등장하긴 하지만, 장르는 미스터리 스릴러다. 로맨스도 일절 없다. (자기파괴적이거나 탐욕에 가까운 사랑 이야기는 나오긴 한다) 그런데 완결화까지 전부 챙겨보고 나서는 왠지 굉장히 개운하고 말끔한 느낌이 들었다. 종방한 지 꽤 되었는데도, 실은 이 드라마의 여운으로부터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아직도 조금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래서 이 글을 쓰고 있는지도)


드라마의 주인공은 앞서 말한 것처럼 첫째 인주, 둘째 인경, 셋째 인혜이다. 홀어머니는 사고뭉치로, 이들을 떠나 외국으로 도주했다. 세 자매만 남아 현실의 지독함을 어떻게든 헤쳐가야 한다. 인주는 회사에서 경리로 일하며 적은 월급으로 살림을 꾸려가고, 인경은 기자이지만 특유의 성격과 고집으로 내부에서 인정을 못 받고 있다. 인혜는 그림에 특출한 소질을 보이지만,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꿈을 마음껏 펼치지 못한다. 이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돈이다. 돈이 있으면 어려운 집안 살림을 보살피고 인혜의 꿈도 마음껏 응원할 수 있다. 그러나 돈이 없어서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런 인주의 앞에, 어느 날, 거액의 검은돈이 주어진다. 발각과 살해의 위험까지 함께. 한 마디로 이 드라마는 거대한 음모와 사건에 휘말린 세 자매의 이야기다.


이 드라마 방영 당시, 시청자들 중 일부는 세 자매 캐릭터가 각각의 이유로 비호감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첫째 인주는 너무 속물적이면서 각종 사건과 주변 인물들에 대해 무방비하고, 둘째 인경은 지나치게 고집이 세고 꼿꼿해 주변을 돌아보지 않으며, 셋째 인혜는 첫째와 둘째에게 경제적으로 가장 의존하는 처지이면서도 이들에게 괜히 날이 서 있고, 가장 친한 친구와 그의 가족들(그러나 알고 보면 이들을 둘러싼 거대한 음모와 사건의 중심에 있는)에게만 필요 이상으로 의지하여 첫째와 둘째를 곤란하게 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렇다. 이들은 각의 이유로 마음놓고 좋아하기 어려운, 그러니까 구멍이 숭숭 나 있는 캐릭터들이다. 그런데, 실은 그래서 매력적이다. 클라리스 스털링이 마음놓고 좋아할 수 있는 캐릭터라면, 이들은 그럴 수 없는 캐릭터들이다. 그런데 계속 보다보면 정이 든다. 마음이 간다.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를 보기 때문이다. 여타 드라마나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의 다수는 굉장히 납작하다. 흔하고 속된 말로 성녀 아니면 창녀, 또는 억척아줌마라고 해야 하나. 남성 캐릭터의 성장이나 성공을 돕거나, 그의 아픔과 슬픔을 위로하거나, 또는 그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하거나 좌절시키거나, 또는 그를 헌신적으로 돌보다 끝내 희생하고 스러지는 어머니이거나. 그러니까 여성 그 자체가 어떤 욕망의 주체인 서사를 (특히 우리나라의 대중 대상 콘텐츠에서) 보기가 정말 힘들다. 여성도 때로 속물이고 고집이 지나치게 셀 수 있다. 자기 주장만 하다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지르거나 뼛속까지 이기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다. 심지어는 한 남자가 허망한 죽음에 이르도록 심리적으로 조종할 수도 있다(이건 세 자매 캐릭터 이야기는 아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여기까지만)


한 마디로 여성에게도 무언가 이루고자 하는, 누군가의 마음을 사로잡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는 것을, 이들 콘텐츠는 보여준다. 그 점이 나는 좋았다. 한국 영화는 아니지만 근래에 인상깊게 본 영화 중 하나인 셀린 시아마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도 그랬다. 이 영화는 두 여성의 사랑과 이별 이야기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뿐이 아니다. 영화는 18세기 말, 여성의 욕망은 하나부터 열까지 저지되고 억제되던 시대의 유럽을 배경으로 하여, 그럼에도 꾸준하게 자신의 욕망(화가로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실현해 온 주인공 마리안느를 통해, 우리 여성들에게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계속해서 자아를 실현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우리의 모습을 감각적이고 아름다운 거울에 비추어보게 한다.  


결국 우리-여성들-가 여성 성장 서사라 하는 콘텐츠를 좋아하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그 서사 속 여성 캐릭터들에게서 우리의 모습을 보기 때문에, 또는 우리가 희망하는 모습을 보기 때문에. 여성도 욕망할 수 있다. 성애, 권력, 자유, 자아의 실현을. 또는 주변에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려 어이없이 실수할 수도 있다. 서스펜스 스릴러나 블록버스터급 액션 장르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남성 권력 위주의 FBI에서 신참 요원이 될 수도, 허영이 많고 속물적인 사람이 될 수도, 정의와 신념 앞에서 갈등하는 풋내기 기자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래서 결국 무언가를 이룰 수도 있고, 무언가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우리는 어떤 일이든 겪을 수 있다. 경험을 통해 성장할 수 있다. 한발 더 나아갈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의지와 가능성의 존재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더 많은, 다양한 여성 창작자들이 만들어나가는 그들의 이야기를 보고 싶다. 내가 나의 이야기를 여기저기에 끊임없이 주절거리듯이, 그들이 들려주는 많고 다양한 이야기들을 보고 듣고 싶다. 세상의 많고 다양한 여성들이,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 가사처럼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참을 수가 없을 때,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 마디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마음놓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언제나 눈을 크게 뜨고 귀를 활짝 열고 그들의 이야기를 기다릴 것이다. 나 또한 나만의 이야기를 여기저기에 열심히 주절거려볼 것이다. 그러니까, 여자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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