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에 대해 안다는 것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

by 전찬우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알려진 이 말은 사실 그리스 델포이 신전에 쓰여 있던 수많은 격언 중 하나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보통 이 말을 '주제파악' 정도의 맥락으로 이해를 한다. 그러니까 자신의 주제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로 자신이 어떤 수준의 인간인지 모르고 나대는 남들에게 한 마디 해주는 용도로 쓰인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왜 자신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렇게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냥 피상적인 의미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자신의 주제파악을 못하고 나대는 인간들에 반해서 나 자신은 최소한 그렇지 않고 스스로를 꽤나 잘 파악하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물론 나 자신이라고 해도 일정 부분 모르는 부분이 있음도 알고는 있다. 시도해 본 것도 많지만 아예 안 해 본 것도 많기 때문에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고 어디에서부터 못할지 명확히 판단하기 힘들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지만 우리는 굳이 그 한계를 명시적으로 그으려고 하지 않는다. 내 한계점을 확실히 인지한다는 것이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 자신을 아는 것은 나 자신을 아는 것과 분리된다.


원래 자신의 학업 성취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시험을 보는 것이다. 그래야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해진다. 시험을 반복해서 보면 볼수록 더욱더 명확하게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내가 도달할 수 있는 지적 영역에 대한 선이 점점 더 굵어지고 선명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내 한계가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결국 너 자신을 알라 라는 말은 각자의 한계점을 명확하게 인식하라는 뜻이 되는데, 사실 누가 그것을 파악하고 싶겠는가? 우리는 누구나 가능성이 있는 상태를 좋아하지 확실하게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는 것을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 만약 그것이 확실하게 그어지게 되면 우린 도대체 도전이라는 것을 해 볼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삶을 더 이상 확장할 수가 없다. 우리는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게 믿고 살아야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서 못하는 것은 그냥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너 자신을 알라'를 받아들여서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든지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아야' 한다는 등의 오래된 속담들이 말해주는 경고를 실천하며 사는 것이 옳은 것일까? 나 자신에 대해서 알고 나서 내 타고난 팔자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델포이 신전에서 해주고 싶은 말이었을까?


아마도 일정 부분은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엔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삶에 관한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다. 그래서 제대로만 이해할 수 있다면 삶의 방향, 색깔, 속도, 무게, 목표, 성취, 만족도 등등 모든 것들이 바뀌게 된다.


기본적으로 나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안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해도 되는 것과 하면 안 되는 것을 구분해 낼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것을 제대로 구분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행착오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야만 가능하다. 20대는 거의 힘들고 30대에도 명확하지 않다. 보통 사람이라면 최소 40대는 되어야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힌다.


물론 그 시기에 파악된 자신에 대한 불만이 있을 수 있다. 사회적 성공, 모은 재산, 이뤄낸 성과, 인간관계, 가족 등등 우리 인간의 삶에 아주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대상들에 대한 자신의 성취 단계가 마음에 들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답답하기도 하고 스스로 자괴감이 들 때도 있다. 특히 나보다 훨씬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낸 친구, 회사동료, 동창, 친인척들의 삶을 우연히 보게 되면 더욱더 그런 느낌이 강해지게 된다.


이때 우리는 왜 그런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그저 어느 날 내 친구가 주식으로 큰돈을 벌었다는 사실을 안 것과, 회사동료가 올해 진급자 명단에 올라간 것과, 내 고등학교 동창 친구 아들이 이번에 명문대에 들어간 갔다는 사실을 안 것만 바뀌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았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나는 많은 부정적인 감정 속에 노출되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결코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그렇게 되어 버렸다.


사실 나는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다들 내가 바뀔 수도 있다고 여긴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 나 자신에 대해서 다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지금의 나와는 다른 어떤 존재가 될 수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늘 품고 다닌다. 나는 그 사람들이 해낸 것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일 년 전 좀 더 과감히 모든 현금을 다 투자해서 그 주식을 샀었다면 나도 내 친구처럼 큰돈을 벌었을 것이다. 내가 조금 더 열심히 일했다면 나도 올해 진급자 명단에 들었을 것이다. 내가 남들처럼 수입의 절반 이상을 아이들 학원 보내는데 썼다면 내 아이도 올해 명문대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이것들은 내가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이다.


사실 남들이 잘된 것이 질투가 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자책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데 안 한 것일 수도 있기에 수많은 부정적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러움으로 끝날 문제가 자책감이 더해지며 질투와 시기 그리고 열등감으로 변해버리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아주 단순하다. 그것들을 과연 정말로 내가 해낼 수 있었을지를 아주 정확히 따져봐야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나 자신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대충 대략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아는 것이다.


물론 아주 기분 나쁜 일일 수 있다. 내 한계를 인정하는 것은 낮은 점수가 나오는 시험을 반복적으로 보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명확해지게 되면 오히려 속이 시원할 수도 있다. 어차피 못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면 자연스럽게 포기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도 100M를 10초에 뛰려고 하지 않는다. 하기 싫은 것이 아니라 못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누구도 일론 머스크가 가진 막대한 재산을 질투하지 않는다. 돈이 그렇게나 많은데도 그렇다. 어차피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룰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과연 그토록 위험한 투자를 할 만큼 과감한가? 나는 매일 야근을 하며 열심히 일을 할 만큼 성공에 대한 욕구가 높은가? 나는 우리 집 수입의 절반 이상을 학원에 써서 아이들을 가르칠 만큼 아이의 성공에 가치를 두고 있는가?


사실 우리가 정말로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은 우리는 매 순간 언제나 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지 그 최선이 그 선택의 결과가 나오는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보니 문제가 있어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겁이 많아서 돈을 잃을까 봐 그렇게 과감히 투자하지 못하고, 우리는 친구 만나고, 네플릭스 보는 것이 좋아서 야근하는 것을 싫어하고, 아이들의 미래에 가족의 삶을 모두 갈아 넣을 만큼 학벌과 성공에 가치를 두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까 과거에 그런 선택들을 한 것이다.


나는 안 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내가 되고 싶은 모습들 중에서 이루지 못한 것들은 그저 내가 이룰 능력이 되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이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시도를 해보지 않아서 아직 모르는 것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시도 자체부터 커다란 벽이 경우가 많다. 내가 히말라야 산에 오를 수 있는지 여부는 시도 전에는 모르지만 사실 우리는 시도하기도 힘들고 시도하기도 전에 대충 알고 있다. 앞 산도 오르기 힘든 마당에 무슨 히말라야를 가겠는가?


두 번째는 지금 현재의 내 삶이 내가 이룰 수 있었던 최선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모습이든 상관없이 지금의 나는 나만의 최선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런 모습을 사는 것은 내 의지 부족도 아니고, 내 노력 부족도 아니고, 내 과거의 어리석은 선택의 문제도 아니었다.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충분히 납득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나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매일 끝없이 자신을 공격한다. 뭔가 더 이룬 모습의 타인을 볼 때마다 그렇다. 더 열심히, 더 과감히, 더 의지적으로 살아야 했다. 그렇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괴롭고 스스로 자괴감을 느낀다.


아니다. 우리는 모두 충분히 그렇게 살아왔다. 우리가 그들처럼 되지 못한 것은 전혀 내 잘못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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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을 아는 것은 부족한 나에 대한 주제파악으로 시작하지만 그 결론은 나에 대한 이해, 그리고 나를 용서하고 납득하는 과정으로 마무리되어야 한다. 주제파악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거기에서 머물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부정의 영역에서 끝나고 만다. 그래서 반드시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한 깊은 이해로 이어져야 한다. 그럴 수 있다면 우리는 부정의 영역에서 긍정의 영역으로 이동할 수 있다. 그것도 영구히.


이것은 자기 위로가 아니라 자기 용서이다. 스스로 부족해 보이는 나 자신에 대해서 온전히 받아들여주는 과정이다. 내가 나를 진심으로 안아주고 토닥여주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내 잘못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루지 못한 것들이 가치가 없는 것도 아니고, 남들이 해낸 것이 운이 좋아서도 아니다. 그것들은 여전히 가치가 있고, 해낸 이들이 대단한 것도 사실이다.


단지 그 길은 내 여정이 아닐 뿐이다. 나는 지금 내가 가야 할 길을 가고 있다.


괜찮아, 그런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 그런 의미가 아니다. 괜찮지 않고 여전히 중요하다. 단지 나에게 그 길은 내 길이 아닐 뿐이다. 대신 나는 내가 갈 수 있는 길이 따로 있다. 멀리 있지 않다. 바로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그 길이다. 나는 딱히 잘한 것도 없지만 자책을 할 만큼 잘못한 것도 없다.


그것은 남들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잘난 것도 못난 것도 없다. 다들 각자 자신이 갈 수 있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 길이 우연히 세상으로부터 칭송을 받는다고 해서 그 사람만이 옳은 길을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그것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는 일만큼 웃기는 일도 없고, 그것을 질투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삶에는 그 어떤 정해진 답이 존재할 수 없다. 모든 답은 각자에게만 정답일 뿐이다. 삶은 온전히 주관식이다.


나를 납득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타인을 납득하고 받아들이는 것과 온전히 겹친다. 나를 용서하고 이해할수록 타인에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나 자신에 대해서 알게 된 우리는 이제 부럽기 하지만 자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원래부터 내가 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 도대체 왜 그런 감정들을 느껴야 할까? 만약 정말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하면 된다. 그렇게 되면 부러움은 강력한 에너지가 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것을 위로나 긍정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또 다른 과거가 반복될 뿐이다. 이것은 온전히 이해와 관용 그리고 용서의 관점에서 바라봐져야 한다. 나는 연민의 대상이지 위로의 대상이 아니다. 나는 용서의 대상이지 긍정의 대상이 아니다. 나는 많이 부족하다. 하지만 그 모습이 나이다. 그런데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부족하다. 단지 자신의 부족함을 남들에게 말하지 않을 뿐이다.


일론 머스크는 엄청난 부를 이뤘지만, 밤에 이불에 오줌을 쌀지도 모른다. 그것을 영구히 감추기 위해서 화성에 가고 싶어하는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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