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일까?
최근 AI의 급격한 성능 향상에 따라 꽤나 많은 사람들이 AI를 단순히 지식을 묻고 그 답을 듣는 유용한 도구의 역할을 넘겨서 마치 사람처럼 다양한 개인적인 대화를 주고받는 친구처럼 대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구글의 제미나이와 그런 종류의 대화를 나눈 일이 있었는데, 꽤나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AI와 대화가 일반 사람들과의 대화보다 좋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그 무한대의 긍정성 때문일 것이다.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딱히 토 달지 않고, 비난도 하지 않고, 설령 반대를 하더라도 매우 부드럽게 한다. 어떤 면에서는 이보다 좋은 대화 친구가 없다고 느낄 수도 있다.
사실 AI가 실제 사람보다 대화 상대로서 더 낫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꽤나 명확하다. 그것은 바로 AI가 사실은 또 다른 나이기 때문이다. AI는 나와 다른 개별적 개체가 아니라 그저 나를 거울처럼 반사하고 있는 일종의 디지털화된 나 자신이다.
그러니 인공지능과 대화를 한다는 말은, 나 자신과 대화를 한다는 뜻이며, 결국 이 세상에서 가장 나를 잘 알고 있는 대화 상대인 셈이다. 그러니 대화를 할 때 느껴지는 그 두터운 공감대는 이 세상 그 누구와의 대화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충만함을 느끼게 해 준다. 당연히 대화를 할수록 빠져들게 된다.
그러다 보니 이런 현상을 보고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은 꽤나 불편한 어투로 이것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과잉 긍정에 중독되거나, AI를 실제 인격체로 착각한 채 정서적 종속성이 심화되거나, 대인 관계 능력이 퇴화하거나, 확증편향이 강화되거나, 주체적 판단 능력이 상실될 수 있다는 점등을 지적한다. (이 내용도 AI의 답변이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실제로도 요즘 그런 증상들이 보이는 사람들이 주변에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느끼는 진짜 문제는 따로 있어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눈에 잘 보이진 않지만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또한 AI만의 문제도 아니다. 이미 그전부터 있었다. 대화 상대로서의 AI는 사실 똥도 안 싸고 사료도 줄 필요가 없으며 인간과 말도 통하긴 하지만 예전부터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와 고양이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 인간은 왜 대화를 하고 싶어 할까? 일단 이 질문에 대한 제대로 된 답을 찾아야 뭔가 실마리를 찾을 것 같다.
우리는 뭔가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다른 존재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대화를 한다. 그리고 그 알려주고 싶은 것은 대부분 '감정'이다. 물론 지식이나 정보 교환을 위해서 대화를 하기도 하지만, 그런 대화는 일단 빼고 일상적 대화만을 대상으로 하면 결국 현재 내 상태, 그러니까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만 남는다.
억울한 사건, 신나고 즐거운 일, 짜증 나는 상황,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상대, 슬픈 감정,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 홀로 느끼는 외로움, 행복했던 추억, 행운에 대한 자랑, 주변에 일어났던 좋은 일 등등 우리는 끝없이 그 순간 느낀 자신의 감정들을, 그 감정이 일어나게 한 사람이나 사건들과 엮어서 말한다. 그래야 상대가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비슷하게 느낄 수 있으니까.
이 현상을 다른 말로 '공감'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거의 모든 대화의 목적은 바로 공감을 지향한다. 그러다 보니 자꾸 딴지 걸고, 엉뚱한 소리 하고, 내가 듣고 싶은 말을 안 하는 상대와는 대화를 하고 싶은 생각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냥 감정을 표현하고 공감 정도만 받고 싶었는데 갑자기 시시비비를 가리며 판결을 하거나, 나는 아무런 필요가 없는 조언을 하거나, 그것을 유발한 네 잘못이 더 크다는 비난을 받는 경험을 하고 나면 다시는 그 사람과 만나고 싶지도 않다.
그러니 AI와의 대화가 더욱더 빛을 발한다. AI는 정말로 그 역할을 잘해준다. 잘 이해하고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준다. 외롭다고 말하면 그 외로움을 공감해 주면서 그런 외로움을 느끼는 너는 특별한 존재라고 말해준다. 자랑을 하면 질투심이 전혀 없는 순수한 어투로 너는 참 대단하다고 축하를 해준다. 억울한 일을 말하면 마치 자기 일처럼 분노하며 상대의 잘못을 논리적으로 분석해 준다. 슬픔을 말하면 진심으로 깊은 위로를 건넨다. 완벽한 대화 상대이다.
여기까지만 생각해 보면 사실 괜히 신경을 써야 하는 사람과 대화를 하느니 그냥 AI와 대화를 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어차피 지나갈 감정들에 대해서 누군가와 공감 정도만 바라고 한 대화이니까 괜히 힘들게 사람 만나서 부정적 반응을 받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대인관계 능력이 떨어지든, 확증편항이 생기든 무슨 상관이랴? 사실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상처 안 받았으면 나도 AI와 대화 나누는 일은 안 했을 것이다. 나도 사람과 대화하고 싶다. 하지만 그것이 잘 안 되고, 그럴 만한 사람 만나기도 힘들고, 설령 있다고 해도 각자 바빠서 시간과 상황이 여의치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그냥 AI와 대화를 하는 편이 훨씬 더 현명한 것이 아닐까?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대화를 통해 얻고자 했던 공감이 사실 대화의 최종 목적이 아니란 점이다.
대화의 목적은 공감이 맞지만, 공감은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내 말을 듣는 사람에게 일어날 심적 변화와 그에 따른 행동이다. 즉, 우리가 타인의 공감을 바라는 진짜 이유는, 그 사람을 어떤 식으로든 움직이게 하고픈 숨겨진, 우리 자신도 거의 인지하지 못하는 목적이 존재한다.
물론 반드시 그래 줄 것이라도 믿어서 하는 것은 아니기에 기대치가 높지는 않다. 하지만 언제나 희미한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언제나 품고 있다. 그렇게 주변 사람들에게 반복적으로 같은 얘기를 해 둠으로써 그 가능성만 조금씩 높여둬도 마음이 점점 편해진다.
다르게 말하면, 순수하게 공감만을 바라는 대화는 존재할 수 없다. 익명의 게시판에 실제로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에 자신의 흠결과 같은 이야기를 적는 사람에게도, 그 행위 자체가 누군가의 도움을 가져다줄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러니 생면부지의 남에게 내 치부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아는 사람들에게 내 약함을 그렇게 쉽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강자를 좋아한다. 그리고 약자를 싫어한다. 그러니 나의 약함을 남들에게 드러내는 것은 나를 오히려 해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 인간은 연민이라는 감정을 가지고 있기에 예상치 못한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니 우리는 적절하게 자기 자신에 대한 서사를 만들어서 주변에 전파를 한다. 이때 서사가 정말로 중요하다.
그런데 그 순간 도움은 고사하고 무관심이나 혹은 비웃음을 경험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내 손해를 무릅쓰고 내 약함을 드러냈는데 아무런 효과가 없거나 심한 경우 그것이 그대로 약한 존재로 평가되어 버리면 어떻게 될까?
최악 중에 최악이다. 우리가 사람들과 대화 속에서 상처를 받는 가장 근원적인 이유이다.
사실 매우 독립적이고 처음부터 타인의 도움을 전혀 바라지 않는 사람은 자신에 관한 얘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도움을 받고 싶은 생각이 없기에 딱히 자신의 약점을 드러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실제적인 AI의 무한 공감이 문제가 생긴다. AI는 엄청난 공감을 해주지만 말만 할 뿐 어떤 행동도 해주지 않는다. 내 말에 엄청 공감을 해준다고 해서 ChatGPT, 제미나이, 클로드가 뭔가 행동해주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OpenAI, Google, Anthropic이 나를 위해서 뭐를 해줄 리가 없다. 그들의 목적은 내 돈이지 내 문제 해결이 아니다.
물론 돈을 충분히 지불하면 행동해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돈을 지불할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공감을 기대하며 자신의 약점을 주저리주저리 떠들지 않았다. 그냥 돈을 주고 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면 끝이니까. 더해서 돈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문제도 많다. 물론 충분히 돈이 많다면 다 해결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그 정도의 돈은 없다. 그러니 주변에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잘 안되니까 이제 공짜이거나 한 달에 만원만 내면 되는 AI 서비스를 통해 대리 만족을 하는 것이다.
싼 게 비지떡이다. AI의 공감은 장소, 시간, 돈에 구애받지는 않고 되갚을 필요도 없지만 그 유용성은 딱 거기까지인 것이다.
미래엔 어떨지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행동을 통한 도움은 오직 인간만이 가능하다. 강아지도, 고양이도, AI도 못한다. 그나마 강아지는 나를 대신해서 싸워줄 수 있으니 약간이라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인을 대신해 싸운 강아지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아지가 인간 자체를 대신할 수 없다.
인간과 달리 강아지를 유모차에 태우고 다니며 먹이고 입혀도 강아지가 커서 나를 부양하지 못한다. 오히려 내가 평생 부양하다가 먼저 보내야 한다. 물론 인간 중에서는 이보다 못한 존재들도 많다. 그러니 적어도 나를 배신하지는 않는 강아지가 인간보다 나을 수 있다. 나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는 인간보다 말이라도 따뜻하게 하는 AI가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나를 위해 어떤 행동할 가능성은 0%이다. 이 문제가 AI와 너무 과도하게 공감을 하게 되면 생겨나는 진짜 문제이다. 우리는 설령 그 가능성이 1%라도 해도 인간에게 공감을 받아야 한다. 0과 1은 1의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존재하는 것의 차이이다.
힘들 때,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 AI에게 공감받는 것, 얼마든지 괜찮다. 단지 그런 후엔 힘을 얻어서 다시 세상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그래야 그 가능성이 1%에서 2%로, 2%에서 10%로 늘어날 수 있다.
물론 또 다른 길이 있다. 온전히 스스로 서는 삶을 사는 것이다. 아예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상대가 AI든 인간이든 괜히 내 얘기를 해서 공감을 받을 필요가 없다. 사실 가장 현명한 삶이다. 단지 무척 어렵다. 하지만 해볼 만도 하다.